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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막 16:17,18] 내게도 이런 표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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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마르코스복음서[각주:1] 16:17,18



맑 16:17,18에 관해 평소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으신 거 같군요.
과연 이게 예수님의 말씀일까?..그렇다면 나도 악령('귀신')을 쫓을 수 있고 뱀의 독과 독극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말인가..? 등등.
특히 새 언어(성령의 방언, 이하 '영언'/靈言으로 표기함)와 결부시켜, 그런 건 누구나 받는 공동 특혜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사도들 또는 초기 교인들에게나 걸맞은 말씀이라고 일종의 명사 또는 시대 차별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설마?! 아냐, 나는 뱀의 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독극물로부터의 자유라니 어림 없지.."라는 식의 말을 흔히 듣곤 합니다. 따라서 영언도 누구나 다 하는 건 아냐 라는 식으로 내달아 연결됩니다. 

물론 자신이 못 믿으면 그만입니다. 유감이지만, 주님이 전제로 삼으신 바로 그 믿음이 생길 때까지는 이 말씀과는 무관하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불신을 합리화하고 발전시켜, 남들도 이 말씀을 믿어선 안 되는 것처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래야 옳다면 이 말씀-맑16:17,18-은 왜 뭣 땜에 존재하는 겁니까?!

그런 분은 남들은커녕 바로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주님 말씀을 위하고 있는 건지, 가로막고 있는지. 남의 믿음을 돕고 있는 건지, 막고 있는 건지.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대 놋뱀을 바라 보면 낫는다는 언약의 말씀을 믿고 바라볼 때, 다 나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험한 광야 세상에서 싸탄의 독니에 물렸을 때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한 번 위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 첫 머리에 분명히 "믿는 사람들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믿음이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믿음 여부에 따라 이 '5대 표징'들이 나타나고 안 나타나고로 가려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겐 이 말씀이 믿음 격상의 도약 발판이 아니라 거침돌이 돼 왔습니다. 더구나 일부 성경 사본에 이 말씀이 생략돼 있다는 이유로 의혹을 추가하기도 합니다만. 본 성구의 사본 이슈는 지난 번 상세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 아닐 까닭은 없습니다. 모두 성취됐기 때문이죠. 그 이상의 이적과 표징들도 구약시대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우리가 일부러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고의로 직접 내 손으로 독뱀을 집거나 독극물을 마셔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단성 집단인 '독뱀 다루미들'[각주:2]의 그런 시위적/이질적인 '신앙'은 성경적인 참 믿음이 아니라, 영웅심리에 의한 만용과 자기과신에 불과합니다. 자기신념이죠.

여기서 이 성구가 의미하는 상황은..고의적인 '믿음' 테스트가 아니지요! 불시에나 부지 중 또는 강제적으로 독뱀의 습격이나 독극물의 해독을 당한다거나 하는 우발적/타의적인 상황을 뜻합니다. 의료 도움을 받기가 힘든 데서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바로 고대 엘리샤 때 대언자[각주:3] 학교 생도들이 들외를 따다 국을 끓여 먹으렸더니 거기서 독이 발견돼 엘리샤가 믿음으로 해독(解毒)한 사건(왕들B[각주:4] 4:39-41), 또한 사도 파울이 마지막 선교여행 차 로마로 호송돼 가던 중 죄수호송선이 유로퀼로 광풍에 밀려 멜리타 섬[각주:5]에 상륙했을 당시 모닥붙 곁에서 옷을 말리던 중 독뱀이 나와 그의 손을 물었던 사례가 그런 케이스입니다(행전 18: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분별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의 원뜻에다 믿음의 '과녁'을 맞춰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뱀의 독이나 독극물의 피해를 극복했다는 믿음의 사람들의 간증을 듣곤 합니다. 또 부족하고 외람되나마 제 자신 과거에 그런 유의 체험이 없지 않습니다만 여기선 자랑이 될까 봐 삼가렵니다. 

그런 사례들은 순수한 믿음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지요.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대가를 주시는 보상자(rewarder, 그리스어 '미스타포도테스'에는 일꾼이 받을 삯을 주는 주인의 뜻이 있음)시라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6). 신유도 마찬가지, 악령축출과 영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영언의 예를 들죠.

주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라고 하십니다.
즉 악령축출/영언, 독뱀과 독극물로부터의 자유, 안수치유 등이..

     1. 믿음으로,
     2.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언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영언의 언변/포텐셜은 모든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므로, 모국어가 아닌(!) 개인 고유의 영언의 언변으로 말을 시작해야 하지요. 자신의 혀를 움직여야 합니다!
믿음엔 엄연히 거기 걸맞은 행동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기대하고 행동으로 옮겨야죠. 그런데 이것을 "인위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따르는 행동들이 다 인위적이어야 할 터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거나 믿지 않기에, 자신의 고유의 영언 발음이 튀어 나오길 기대하면서 당장 시작할 생각은 않고, 계속 모국어로 "..주세요! 방언 주세요! 방언하게 해 주세요. 응..? 왜 안 되지? 왜 안 되나요, 주님?"라고만 합니다. (제 자신의 옛 경험이기도 합니다만.)
소위 '절대주권'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자신은 전혀 믿음을 발동하거나 움직이려 들지 않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 주시길 기다리곤 합니다. 영언도 자동으로, 다른 표징들도 자동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겁니다.   

안수자에게만 기대어서도 안 됩니다. 안수가 곧 영언의 통로는 아니니까요. 행동이 딸리는 믿음 아닌 선입견과 편견, 신학적 지식으로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표징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과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표징들의 의미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왜 그럴까요?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매우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죠. 우리 믿음을 Appreciate 하십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agent인 셈이지요.
주님은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실 때 거의 예외 없이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뭘 해 주길 바라느냐?"고 물으십니다. 즉 믿음으로 무엇을 바라고 행동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슬프게도, 주님이 보실 때 세상에서 참 믿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루카복음서/눅 18:8b). 이미 "믿는다"는 신자들조차 이름만 신자일 뿐, 실제로는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것 밖엔 믿는 게 거의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되, 정신적/심리적/혼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바라는 바 희망을 믿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히브리서 11:1). 믿음은 단순한 소망이나 기대와는 다릅니다. 믿음 없이는 소망을 이룰 수가 없지요.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우리들 중엔 과거 믿음의 체험들을 많이 하고도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도 식어져 정작 꼭 필요한 때 믿음이 쉽게 발동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지요.
이게 왜 이럴까요?

평소 말씀에 대한 마음 속에서의 신뢰와 입술의 고백으로 믿음을 작동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9,10에 의하면 우리의 거듭남조차도 마음 속 신뢰와 입술의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적과 표징들은 말씀에 대한 100% 신뢰와 말씀에 대한 고백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맑 16:17,18에 대한 신뢰 없이 이 표징들이 나타날 리는 천만예요..만무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악령들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믿음의 기도와 금식으로 가능하지요)
이름만의, 명목 상의 신자가 아닌 참 신자에겐 이 표징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영언 곧 "새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명목 상 신자가 아닌) 진짜 신자에겐 으레 따르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불시에, 부지 중에 또는 강압적으로 중독성 또는 치명적인 해독(害毒)을 받을 때,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그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다는 얘기지요.
[ 물론 이것은 곁에서 엄연히 가능한 의학적 도움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환자에게 손을 얹을 때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있냐 없냐와 그 분의 말씀과 이름을 신뢰하여 행동으로 옮기냐 못 옮기냐에 달려 있지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신학 지식으로, 선입견으로, 종교적 편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부터 권능과 표징 성취까지..의인은 다만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이 믿음이 심겨져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들이 삶 주변에서 성취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1. 마가복음 [본문으로]
  2. snake handlers [본문으로]
  3. 선지자/선견자 또는 (구/신약) 예언자와 비슷한 말. [본문으로]
  4. 구약 열왕기하 [본문으로]
  5. 한글성경 표기 '멜리데'. 현재의 말타(또는 몰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