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서 1:46-55
위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루카복음서1-2장엔 그밖에도 침례(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벹의 찬양, 요한의 아버지 제카리야의 찬양, 천사들의 찬양, 시메온의 찬양 등이 연이어집니다.
카톨맄에서는 이 노래를 '마그니피카토'라는 이름을 붙여 그들 나름의 대림절(대강절/강림절)/성탄절 시즌에 미사경문처럼 사용하지요. 이달 뉴스에도 카톨맄이 진화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진리와 거리가 먼 제도권 사람들입니다.
참 교회의 뿌리는 로마가 아닌 하늘 예루샬렘임을 우리가 잊어선 안됩니다.
마리아의 이 구약적/예언적인 찬양곡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 하나님은 (마리아를 비롯한 인류의)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을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내셨습니다. 마리아는 구원의 대상이지 카톨맄 일각에서 주장하듯 공동구원자/공동구속주(코레뎀트릭스)가 아닙니다.
- 마리아는 족보 상으로 왕가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사회의 하층인 양, 가난한 '천민'으로 살아 왔습니다. (53절 참조)
- 마리아는 (성령 강림 전까지는) 구약시대에 속한 사람 즉, 하나님의 여종에 머물렀습니다.
- 마리아는 믿음으로 복된 사람이 됐습니다.
마리아가 왜 복됩니까? 성경은 극명히 알려 줍니다.
우선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45,48절)!
둘째로는 구원자를 낳은 (육신으로서의) 어머니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신모(神母), 공동구속자, 공동중재자로 신격화 될 수 있느냐? 노! 우리와 같은 성정의 인간일 뿐입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같은 인간으로서 많은 헛점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카톨맄 '성화'에 그려진 그런) '중심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이미 큰 일을 행하셨기에 그 분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 받기에 합당하시며 그 사랑은 그분을 경외하는(믿는) 오가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 싸탄 마귀를 추종자들인 (오만하고 부유한) 악인들을 역사 속에서 심판해 오신 하나님은 이제 메시아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낮고 천한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을 마리아처럼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찬양이 구약적이라는 것은..
첫째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불려졌기 때문이며,
둘째로, 메시아의 첫 임재에 관한 예언적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신약시대/성령시대/은혜시대/복음시대의 특징의 하나인 방언 찬양이 나타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성전음악인들의 신령한 노래들은 방언 찬양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찬양은..
메시아의 전인적 구속사역에 관한 또다른 예언인, 고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한 말씀(뤀 4:18)과 내용이 일맥상통합니다.
영적인 해석만 중시하는 사람들은 마리아의 비천함과 가난함, 굶주림 등을 영적으로만 해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찬양 중에 나타나는 부자들은 영적인 부자들인지요?
그런 억지 해석을 멈춰야 합니다.
이 노래에 나타난 가난하고 천하고 굶주렸던 사람들은 일단 문자 그대로 봐야 합니다.
마리아-요셒은 문자 그대로 가난했습니다. 왕손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 몰락한 유다 왕가의 천민으로 살아 왔습니다. 이것은 부부가 아기 예수님의 정결례(할례식) 때 가장 작은 예물을 바쳐야 했던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에게서 태어날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을 믿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높이셨고 '복의 뿌리' 아브라함의 복의 혜택을 그녀에게도 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 예방 후, 이 집안은 가난을 벗어나 검소하고도 풍요로운 삶을 꽃피웠습니다. 나자렡의 성실하고도 이름난 목수 요셒-예수 부자(父子)는 편법을 쓰지 않는 정직한 근로자/장인들로서 근면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함께 무엇보다 하나님이 내리신 아브라함의 복을 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죠.
최소 8 식구가 쪼달리지 않게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가족이 평생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고 착각/주장하는데 중세에 청빈/금욕주의를 부르짖던 카톨맄적/수도원영성적 전설일 뿐,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 가난해지셨음은 하늘 차원에서 볼 때 그렇지, 세상 차원의 면걸(免乞) 가난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엔 하늘 차원의 가난이 있을지언정 세상 차원의 가난이 존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자렡을 떠나 카페르나움에다 일종의 사역'본부'를 개설하셨던 사실, 이 본부를 제자들이 방문하고 만족했던 사실, 12제자들이 3년간 세상 일을 하지 않았지만 수시로 외식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 넉넉한 생활을 했음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12제자가 돈이 없어 굶주렸다는 기록은 네 복음서에서 전혀 읽을 수가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높여 주시고 풍요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복되다고 일러 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새 삶을 살게 하시고
아브라함처럼 복되고 풍요롭게 하시며
단순한 종으로부터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구약 대언자들의 모든 구원관이 영/혼/육 등 인간 3차원에 걸쳐
전인적/통전적이었듯
믿는 우리들의 구원과 삶도 아브라함처럼 전인적/통전적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티엘티 독자들에게
전인적인 생명과 복, 풍요가 넘치길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묵상연구 > 사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Jn 6:34-47]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Will Come to Me (0) | 2008.09.28 |
---|---|
[Jn 6:25-33] The Work of God is This (0) | 2008.09.21 |
[마 18:15-35] 신앙의 기형현상을 극복하자(김동열) (1) | 2008.08.19 |
[마 18:1-14] 의식적으로 주님의 뜻 외면하지 않나(김동열) (1) | 2008.08.09 |
[마 17:14-27] 살아있는 믿음은 생명과 기적을 일으킨다.(김동열) (1) | 2008.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