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의 아들' 오벧
바탕 본문: 뤁 서(룻기) 4:1~22
나오미와 뤁의 기업무름 작전은 이제 드디어 보아즈에게 공이 넘어 갔습니다. 시모녀, 둘은 최선을 다했고..최종 결정은 기업 무를 사람들인 고엘 당사자들에게 달렸지요. 그런데 이 작전은 마지막까지 땀을 쥐게 하는 트릴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비록, 그냥 평소 알던 친족/고엘인 보아즈를 "찍어", 뤁을 통해 기업 무름을 호소했지만, 최소한 막연하게나마 보아즈 말고도 다른 고엘이 있지 않을까 짐작은 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보아즈를 통해 또 다른 고엘의 존재가 확인됐고, 이젠 어느 고엘이 뤁의 남편이 될지 그야말로 운명 아니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할 판입니다.
두 후보자들 중 누가 진짜 고엘이 될까 초조히 기다리는 정황은 당사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쉽지 않은 긴박한 판국이지요.
하나가 됐으리라고 생각되는 세 사람의 마음! 나오미/뤁/보아즈 3 명 모두가 정작 보아즈로 '낙착'되길 바라는 뜻에서 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셋은 각각 속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을 지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바랐겠죠만.
특히 뤁은 그랬을 법 합니다.
"아, 그 분이 꼭 됐으면..!"
뤁에게는 서로 연령차야 어떻든, 보아즈의 인품으로 보아 더 없이 마음에 드는 남편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보리밭/밀밭의 친교와 대화를 거쳐 타작마당에서 하룻밤을 잠자리 바로 곁에서 거의 남편처럼 지내 본 대로는 "이 분처럼 좋은 분도 드물다"고 생각했을 터입니다. 일정선을 넘지 않고 철저히 신앙과 경건, 도덕을 유지하면서도 온갖 자상한 친절을 베푸는 남성상이 더 없이 푸근하고 믿음직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누구도 모르는 법,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아즈 자신도 그동안 자기 밭에서 이삭 줍기를 해온 뤁과의 상면과 대화를 통해서, 이윽고는 한 밤에 자신에게 여종처럼 삶을 몽땅 맡기다시피 해 온 그녀, 마치 부부처럼 나란히 곁에서 하룻밤을 지샌 뤁이 더 없이 사랑스러워 흥분되면서도, 이제 만날 상대방 고엘의 마음에 따라 가부 간 결정된다 싶으니 가슴이 달아 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 지성의 사람이었습니다. 기업무름의 오랜 전통 대로 성문에 올라 가 앉아 있던 그는 나오미 집안에 더 가까운 그 고엘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릅니다. 보아즈가 이름을 불렀을 법 한데도 성경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보호 차원이었을까요?
사실 한 고엘이 기업무름을 거부할 경우 비겁한 행위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일이기도 합니다(신명기 25:5~10). 하물며 가장 가까운 친족이겠습니까. 그러나 시대가 많이 바뀐지라, 이미 이때쯤은 아마도 적당히 관용을 베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고엘이 앉자, 보아즈는 이 도시의 장로들 즉 지도급 원로 10명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상황 설명을 합니다. 아마도 이 유지들은 언젠가는 조만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들 멀거나 가까운 친척 간인 데다 온 성 사람들이 나오미의 귀국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즈보다 더 가까운 친족 고엘도 역시 이런 날이 올 것으로 내심 예상했을 것입니다. "왜 나오미가 조용할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도 벌어집니다. 그는 보아즈의 설명을 듣자, 누구보다 가까운 친족인 엘리멜렠의 기업을 무를 책임감을 느끼고 무르겠다는 답을 합니다만, 보아즈가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숨은 '카드'를 내밀자, 그만 딱 걸리고 맙니다.
고인의 아내인 이방 여인 뤁과 짝을 이뤄 고인의 대를 이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고엘은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모양입니다. 보아즈는 그보다 덜 가까운 친척인데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왜 그는 몰랐을까요? 분명한 것은 보아즈보다는 나오미 집안에 대한 관심이 덜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아무래도 내 기업(基業)에 손해 될 것 같으니 나 대신 당신이 하시라"며 마침 보아즈가 차순위 후보 고엘로 대기하고 있음을 그지 없이 다행스럽게 여긴 듯 합니다.
자..이 고엘은 왜 자기 기업에 '손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뤁이 단지 모압 출신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고인의 아내인 이방 여인과 짝을 이루면서까지 상대방 남편의 기업을 이어 줘야 한다는 것이 향후 큰 부담으로 작용하리라고 지레 짐작했던 모양입니다. 마치 형 에르의 대를 이어주기가 싫었던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처럼(창 38:8~10).
이런 경우, 고대 전통에 따르면 나오미나 뤁이 합법적으로 상대방 뺨을 칠 수도 있었지만 나오미/뤁은 보아즈에게 모든 수속을 일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뺨 때리기 정도가 관건이 아니었지요. 단죄가 아닌 구속이 관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역시 보아즈였습니다. 보아즈이기를 속으로 간곡히 바라온 사람들이 바로 뤁과 나오미임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세상 만사 우리 뜻대로 다 안 될 수 있어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뜻이 일치할 때 우리는 승리합니다.
그 사람은 기업무름을 포기하는 표시로 신발을 벗어 보아즈에게 줍니다. 아마도 보아즈는 이 순간 가슴에 환희가 벅차서 "주님, 역시 제가 무르는 게 님의 뜻이었군요!" 라며 젊은 미래의 아내 뤁의 얼굴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기색을 감추며(?) 둘러 선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엘리멜렠 가문의 기업을 합법적으로 나오미에게서 매입하는 건(件), 그 자부 뤁을 사서 아내로 삼는 건 등 두 가지에 그들이 증인임을 선언합니다.
순간 그는 하나님께 크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아슬아슬했던(?) 한 순간을 넘긴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쉬었을 지도 모르지요.
번거로울 수 있는 이 모든 수속을 침착과 신중, 이성으로 처리해 나간 보아즈의 훌륭하고 탁월한 면모가 더 없이 돋보입니다. 또 모든 시민들, 친척들에 대한 존중심도 넘쳐 납니다. 온 성 사람들도 마음 모아 보아즈와 나오미를 진정 축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입니다.
기업 무름 드라마는 대 단원의 끝으로 다가갑니다. 4장 11~17절은 환희와 감사, 축복이 넘치는 장면들입니다.
먼저 성민들과 원로들이 보아즈를 축하합니다.
"야웨께서 그대의 집으로 들어 오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가문을 일으킨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길!
그대를 에프라타에서 유력하게, 베틀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길!
야웨께서 이 젊은 여인을 통해 그대에게 후대를 주시어 타마르가 유다에게 낳아 준 페레즈의 집안 같게 하시길!"
이 축복은 몇 가지 내용을 담았습니다.
우선 모압 출신인 뤁을 새삼 정규 유다족의 일원으로 맞아 들였음을 재확인할 뿐더러 그녀가 선대처럼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을 기원했고, 이를 계기로 보아즈 가문이 이 지방 에프라타에서 명성과 영예를 떨치게 되길 바라고 있으며, 보아즈 당대 뿐 아니라 후대까지도 길이 융성하기를 빈 것입니다.
과연 이 축복대로 이뤄졌습니다! 예언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이 축하를 들으면서 한 편으로 하나님께 한 없는 감사를 올리며 돌아 온 보아즈는 성 안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스런 여인 뤁을 아내로, 나오미를 장모로 삼았고..더 나아가 옥동자(독자?)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처음부터 보아즈-뤁 부부에게 개입하셔서 잉태하게 하신 아들입니다(4:13). 다윋 왕가의 선조, 메시아의 선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탄생 소식에 온 동네 친척 여인들이 나오미를 축복합니다.
"찬양을 주님께! 그 분은 오늘 그대를 대가 끊기도록 놔 두시지 않았군요. 그의 이름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 떨쳐지기를! 그가 그대에게 삶을 되찾아 주고 그대의 늘그막을 돌봐 줄 것입니다. 그대를 사랑할 뿐더러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낳았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이 축복과 기원을 듣는 순간,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타향살이의 서러움, 며느리를 향한 안타까움 등이 모두 한꺼번에 눈 녹듯 사라졌을 겁니다. 실로 자기 이름답게 나오미(기쁨)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찬란한 영광이 자신과 가문의 앞날에 비쳐 오고 있음을 미처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나오미는 너무도 좋고 너무도 사랑스러워 이 아기를 자신의 품에 안고 다니면서 친아들처럼 직접 기르고 돌봅니다. 아낙네들은 아예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서 내친 김에 아예 아기 이름까지 지어 줍니다. '오벧'(섬김/경배)이라고.
오벧은 다윋 왕의 조부입니다. 또한 메시아의 선조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뒤돌아 볼 '여유'를 갖습니다. 나오미의 맏며느리 오르파에 관한 추상입니다(1:6~14). 오르파 역시 동서인 뤁처럼 당초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지만, 나오미의 강권에 마지 못해 '도중 하차' 했습니다.
끝끝내 나오미를 따르기보다 고향인 모압의 친가를 택한 것입니다. 만약 오르파도 뤁처럼 포기하지 않고 따라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상황과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오르파는 정과 눈물의 사람일지언정 뤁 같은 강인한 믿음의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뤁의 믿음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보아즈의 어머니 라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업무름과 대속
야웨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계획 가운데..유다족에 시집 온 한 믿음의 이방 여성이 과부-'기업무름'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유다족 정통 가문 사람이자 신앙인인 남편감을 만나 결국 다윋 왕가 그리고 메시아 계보를 이어간다는 점에 바로 뤁기의 독특한 위치와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또한 홀시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던 이방인 과부 뤁이 정통 가문을 통해 대속 받는 기업무름 사건은 메시아를 통해 구원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도 모두 은총의 해(=희년, Jubilee)의 혜택을 받아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 가문의 영예와 기업/복을 물려 받는다는 놀라운 진리를 그림자처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은총의 해-희년은 기업무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희년/기업무름 제도는 부동산/토지의 영구 사유화를 막기 위해 야웨 하나님이 직접 내신 제도로 고대 근동의 어떤 다른 나라도 비슷한 예가 없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 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 년이라 /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10)
레비 25장에는 안식년과 해방, 토지의 정의, 땅무름(토지무르기), 가옥 무름, 레비족 가옥 무름, 동족 빈민 대우, 동족 품꾼 대우/해방, 이방인 노예법, 근족 노예 대속 등의 제도들이 희년과 얽혀 있음을 봅니다.
즉 7년마다 땅이 경작을 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거듭한 49년을 지킨 바로 이듬해인 제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입니다. 이 해에 전국에 자유를 선포하여 각각 선대의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고 노예들은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샤나 하 요벨)이기도 합니다(레 25:13).
희년은, 잃었던 옛 삶의 터전을 되찾고, 남의 신세를 지며 섬기던 종살이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민으로서 가족에게 돌아 와 기업의 일원으로서의 위치와 기쁨을 회복하는, 거대한 기쁨의 해입니다. 반 세기만의 복구와 복원, 이것이 고대의 희년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토지는 영구적으로 팔지 못하고(임시는 가능) 동족을 노예로 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그네로 지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정의의 법이었지요(히브리서 11:13~16. 비교: 창 23:4, 47:9, 연대기A 29:15, 시 39:12).
희년이 선포되는 날은 해마다 갖는 '욤 키푸르' 즉 속죄일과 겹칩니다. 대속의 날, 구속의 날, 죄과 탕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속죄일은 매년 제7월 10일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날입니다. 죄의 빚을 탕감하는 날입니다. 자유와 해방, 대속과 구속의 해였던 것이지요.
말할 것도 없이, 구약의 이 은총의 해를 온전히 성취하신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이십니다! 루카복음은 은총의 해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성취됐음을 선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루카 4:18~19).
희년(Jubilee)이란 말은 '요벨' 즉 수양 뿔나팔에서 왔습니다. 희년의 시작을 알리는 당일(속죄일)에 대사제(대제사장)가 수양 뿔나팔을 불고, 전국에서 이에 화답하는 뿔나풀을 불어 선포했습니다. 대사제의 뿔나팔 '요벨'은 일반 뿔나팔 '쇼파르'와는 달랐습니다.
위에서 기업무름/땅무름/토지무르기의 '무름/무르기'란 명사의 히브리 원어는 '게울라'이고, 무르다란 뜻의 동사는 '가알', 기업 무를 자 즉 기업 대속자는 '고엘'입니다. 게울라는 신약적인 구속/구속/속죄(redemption)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과거 타인에게 팔고 떠났던 기업 일부를 근족이 물어주어 기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레 25:23~28).
기업무름은 이스라엘 각 지족(지파)별로 배당된 땅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딴 지족 사람이 차지할 경우 원 지족 몫의 토지가 그만큼 궐(闕)이 나기 때문입니다.
기업무름의 추가 관련법(신 25:5~6)에 따르면, 나오미의 경우처럼 남편과 아들이 모두 죽어 자녀가 없을 경우 그 기업을 물러주는 친족 즉 고엘이 고인의 과부와 결혼할 의무가 있고, 거절할 경우 그 죄값을 대신 받아야 했습니다(신 25:7~10). 보아즈도 엘리멜렠 집안 나오미/뤁의 고엘이 돼 주었습니다. 그가 뤁과 결혼할 수 있었음도 바로 이 법규에 의한 것입니다.
뤁 서는 매우 소중한 상징적 교훈 -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고엘'이시라는 것-을 입니다! 뤁은 믿음의 사람들 특히 우리 같은 이방 신자들을 상징하고, 기업을 무른 보아즈는 예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피값으로 기업을 무르시고, 뤁처럼 이방인인 우리의 죄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실 뿐더러, 신랑으로서 신부(교회/신자들)를 자신과 '결혼'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통째로 사셨고, 그리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복까지도 우리에게 물려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엘은 능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기업무름 수혜자와 결혼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권능과 풍요로부터 스스로 가난해지고 낮아지셔서 오신 분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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