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모가 생애 후반기에 삶을 돌아 본 수기인 듯 느껴지는 전도서의 제 3장은 본서 전체 가운데서도 독특한 장입니다.
특히 앞 부분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에는 제 철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목적엔 때가 있네 /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 /
죽일 때와 고칠 때,
허물 때와 세울 때 /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
돌들을 던질 때와 돌들을 한데 모을 때
껴안을 때와 껴안은 것을 풀 때 /
얻을 때와 잃을 때
지닐 때와 내버릴 때 /
찢을 때와 꿰맬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가 있다네. (3:1~8)
'때의 시'라고나 할까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단순한 인생철학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늘 아래 모든 목적은 최종 지점이 있다고 말해 주기 때문이지요. 지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반드시 시작했을 때가 있듯 정리정돈 할 때도 온다는 겁니다. 목적/시작/종착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흔히 '종말'과 '최후의 날'(doomsday)을 거들면서 미래와 미지의 공포에 떱니다. 그러나 말뿐이지 실제로들 어떤 의미성을 둬 가며 믿진 않지요. 오히려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죄악 생활을 즐기며 하루하루 살아 갑니다.
성경적이 아닌 무의미한 긍정주의, 무의미한 염세주의, 무의미한 '퀘세라세라' 정신들이 충일합니다. 그러다 졸지에 죽는 사람들도 많지요.
전도자 슐로모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것의 시종을 간추려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시종(始終)-시작과 끝을 모른다는 것. 우리는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하게 언제 시작할지를 모릅니다. 당일까지 가 봐야 압니다. 그냥 기대를 하다가 기대 대로 되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게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시작하게 되고 흘러가듯 진행하게 되고 계속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예기치 않은 종국이 오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라는 것은 전체 시간의 흐름 속에선 무작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사람이 헤아릴 수 없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영원을 그리워 하는 마음-그것입니다(11a절). 사람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또 아는 체 해도 미래와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만사의 시종을 실상 모르므로 영원을 그리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지닌 영원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다수가 깨닫지 못합니다. 또..영원을 그린다 하더라도 참 영원에 대한 참 그리움인가 라는 물음이 뜹니다.
흔히 사람들은 '영원'을 그립니다.
'영원'을 말합니다.
한 편의 시나 소설, 한 폭의 그림에서도, 잠깐의 대화에서도 '영원'을 말하고 이야기 합니다.
음악으로도 '영원'을 노래합니다. 영원, 영원히, 길이길이, 무궁히, 끝없이 등의 말을 끝없이 되뇝니다.
영원보다는 훨씬 짧은 길이, 낮은 수위의 '영구성'이란 것도 추구합니다.
이 모두가 사람에게 영원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입증해 줍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끝이 있는데 그 끝이 언젠가를 모르기 때문에 영원을 그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올바른 '영원'을 올바로 그리워하는가..
이것이 의문점입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영원'을 논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참 영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님을 모르고들 있지요. 참 영원이 아닌데도 참인 양 속고 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는 영원의 대안 비슷한 윤회를 말합니다. 환생을 통한 끝없는 순환고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증명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심령술이나 불교에 '도통'했다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환생'한 사람들의 사례를 말하는데 알고 보면 '환생'했다는 존재는 악령들입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제임스왕역/KJV에서) 그런 악령들을 '친숙령'(familiar spirits)이라고 부릅니다. 악령들은 얼마든지 고인을 흉내 내며 심지어 예수님 흉내도 비슷하게 그럴 듯이 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지요!
[추모예배 등은 꼬박꼬박 가질 성질이 아닙니다. 그냥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고인의 사진이나 유품을 오래 간직하면서 너무 떠 받드는 것도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 유품에 자칫 친숙령들이나 저주가 낄 수도 있거니와 그렇게 받들고 몽매에도 그릴 경우 일종의 우상숭배가 되고 해롭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고인과는 결코 '대화' 할 수가 없습니다. 카톨맄의 '수호성인' 숭배나 성인에게 하는 기도 따위가 비성경적인 까닭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죽은 자와의 친교"(necromancy)에 해당하지요. 마리아나 천사에게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친숙령들은 거짓 영원을 대표합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은 영원인데 영원한 불못이지요. 그들은 무저갱(밑바닥 없는 구덩이)이 자신들의 최후운명을 알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인간을 속여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원합니다.
한 쪽은 영원한 복락과 영생,
한쪽은 영원한 저주와 심판, 영멸을 뜻합니다.
우리는 참된 영원-하나님의 왕국인 하늘나라에서의 영원을 쟁취하고 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영원은 곧 예수 크리스토이십니다!
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님 앞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님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 16:11)
[위 시편은 '메시아 시편'들 중 하나의 끝 절이지요.]
전도자는 또 말합니다.
나는 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영원하리라는 것,
아무 것도 거기 더 할 수 없고 거기서 덜 할 수도 없다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경외하게 하시련다는 것을.
(3:14)
자, 이런 모든 때를 위해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하시는 것이 뭘까요?
"..의인들과 악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테니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기 때문이다.." (3:17)
[ 필자는 외래어를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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