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먹고 마심 그리고 자신이 애쓴 기쁨을 마음 깊이 누림보다 더 나을 게 없어라. 이것 역시 알고 보니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고 누가 즐길 수 있으랴? (전도서 2:23,24 사역)
왕/전도자 슐로모의 후반기 삶에서 위와 같이 통째로 바뀐 세계관/가치관/인생관 등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앞서 비친 대로..슐로모는 인류를 대표하여 실험적으로 자신에게 지구촌 최상/최고의 것을 한동안 공급해 봤습니다(전 2:1~11). 맘껏 누리고 즐겨 보라고. 물론 하나님이 이미 주신 슬기와 부와 권력과 영예 안에서 한 '실험'이지요.
그 결과는 모든 게 그저 헛되다는 장탄식 다음에..위와 같은 부분적 결론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불교나 기타 종교의 무상론/허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에게 의미라고는 오직 자아뿐 참 신이 없으므로 공허와 무, 무상론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마치 한 개 해골로 표현되는 프리메이슨들의 금욕적 허무론처럼.
사람이 세상에서 허무만 얻는다면 소망의 내세가 아닌 허무한 죽음 밖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극락', 예쁜 처녀들의 낙원(회교의 천국) 따위는 인간의 상상과는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슐로모의 모든 화려하고 사치스런 전반적 삶보다 위 결론을 중시해야 합니다. 즉 삶의 보람은 오로지 사람에게 삶을 갖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본래 아파르(흙)로 창조됐으므로 창조주의 생명/호흡/영 없이는 흙가루처럼 허무할 뿐입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성자님 즉 예수 크리스토는 첫 아담의 잃어 버린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되돌려 주셨습니다(코린토A 15:47).
사회와 교계를 둘러 보면, 요즘도 슐로모처럼 입체적 쾌락, 또는 '다른 색'을 좇아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보다는 혼과 몸, 자기 만족에서 보람을 찾으려는 사람들이지요. 우리 자신들이 각각 그런 성향들이 있습니다만..인간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아는 마귀 싸탄의 원색적인 유혹에 얼마나 말려드냐로부터 선과 갈림길이 결정되지요.
살짝 삼천포로 빠집니다만, 그런 얘기..들어보셨나요?
한국 기독교 초기에 평양이 거의 '성시화' 돼 다시피 하니까 밥줄이 피앙~하고 끊기게 된(?) '피양' 기생들이 "목회자들정절허물기작전"을 펴기로. 그래서 몇몇 거물급들을 겨냥해 장안에 최고 아리따운 기생이 하나씩 호리러 몰래 찾아왔더랍니다. '호리고 홀리기' 전술이지요.
그중 몇은 아마도 하릴없이 허무하게 무너졌나(?)..그런 비밀 얘기가 있고, 어느 한 분은 방안에 들어 와 완라로 자빠진 기녀에게 엄하게 호통쳐서 혼쭐을 내어 기어이 물리쳤다는군요. 그래서 더 은근히 존중을 받았다지요. 물론 근거 있는 비화입니다만 선택의 차이를 절감케 하지요.
그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냉철한 신앙적 가치관과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믿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과 내세의 상급을 좌우하지요. 그런 유혹과 선택의 기로가 거의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듭니다. 슐로모는 '인생 대표'로 그런 유혹들 앞에서 느슨하고 펑퍼짐 하게 잘못된 선택들을 반평생 누리고 즐기다가..그만 이 지경까지 왔지요.
예수님도 우리들처럼 한결같이 모든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만 100% 다 이기셨습니다(히브리 4:15)! 그래서..마치 예수님이 유혹 받아 넘어간 양 신성모독적으로 표현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소설 및 마틴 스콜스시스의 영화 '크리스토의 마지막 유혹', 크리스토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후손'으로 형성됐다는 메로빙 왕조의 전설 따위는 헛된 신화와 몰상식에 불과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받을 심판을 그려 보십시오.
바로 그래서..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12:2)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아직 유혹/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좀처럼 대항하지를 않지요(12:4).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운다는 거..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대신 싸워 이기신 주님을 늘 바라보면 그분 안에서 늘 넉넉히 승리하지요!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이제 와서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데 이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랍니다(히 10:39). 잠시 잠깐 후, soon and very soon, 오실 분이 오십니다. 그때 다들 제각기 빛난 상급을 받아야지 무궁한 수치를 당해선 안되겠지요.
다시 삼천포로부터 빠져 나와서..
아무튼 슐로모가 인생대표로 즐길 만큼 즐기고 누릴 만큼 누려서, 앞서 시범을 보일 만큼 보였으니 우리는 슐로모의 결론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역시 "아, 헛되고 헛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는 장탄식만 반복하게 됩니다.
풍요와 재정의 비밀
그런데 여기, 재정에 관한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독자에게 펼쳐 전달해 드리렵니다. 특히 경제를 중시하는 독자는 잊지 마시길.
슐로모의 다음 말을 주의 깊게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분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행복을 주신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수고를 주셔서 모아 쌓게 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에게 주게 하시니, 이것 또한 바람 잡듯한 헛일이다. (2:26)
보십니까?!
하나님은 세상 죄인들의 재물을 걷어다 의인들에게 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약속된 진리입니다. 이것을 슐로모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들 즉 신자들이 세상에서 정당하게 재물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에서 돈자루를 떨어뜨려 주시는 게 아니라..우리가 세상 죄인들에게서 마땅히 건네받을 것을 건네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정당하다"는 말은 재물을 얻을 능력(신명기 8:18)과 노력의 대가일 뿐 아니라 "무엇이든"(yes!) 주님께 구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요한복음 14~16장 참조)는 말씀의 대상에도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마치 신자는 누구나 세상 재물로부터 "초탈"해야 하는 것처럼 주장들을 하는데 그건 불교나 (카톨맄)수도원 정신이지 기독교정신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씀새에 달렸지 재물 자체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 돈이 만악의 뿌리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선교도 못합니다!
소위 '형통신학'/'번영신학'/'무당신학'이라고 매도하면서 신자가 하나님께 물적인 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니 자신도 물적인 복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 수 없으면서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하는 겁니까?
세상 만물과 자연이 모두 하나님이 사람의 번영과 번성을 위한 자원과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창 1:28, 9:1,7). 하나님은 성도가 번영하길 진정 원하십니다(연대기A=역대상 4:10, 요서C=요한3서 1:2). 여기엔 구/신약 시대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가난만이 아니라 물적 가난도 해결하러 오셨습니다(뤀 4:18,19).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죄는 물론 (가난을 포함한) 모든 저주를 영원히 박살 내 버리셨습니다!
저주를 나열한 '에발 선언'엔 엄연히 가난도 포함돼 있습니다(신명기 27:13, 28:15~19, 30b~33, 38~42,44,47,48,51, 29:22,23).
복을 나열한 '그리짐(Gerizim=그리심) 선언'엔 엄연히 풍요도 포함돼 있습니다(신 27:12, 28:2~6,8,11,12).
가난은 마귀 싸탄의 파괴 작용에 포함돼 있습니다(요복 10:10a).
물적 풍요는 예수님의 생명과 더 풍요로운 삶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요복 10;10b).
이 점을 우리는 바로 똑똑히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일찍이 이 법칙을 내다 본 아브람은 성자님의 그림자인 샬롬 왕/사제 멜키쩨뎈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창 14:18~20, 비교: 히브리 7:2~9). 이짜크와 야콥은 선조 아브라함을 영적/물적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따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엘리온을 믿었습니다. 그 후손도 마찬가지지요.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야웨 이레(창 22:14)-이시고 우리의 보상자(창 15:1)이십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모든 영적인 복과 함께 물적 복도 아울러 누리게 돼 있습니다(갈 5:7~14)! 십일조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물적 복까지 누리려는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합니다(말라키 3:10).
십일조 법칙은 '율법'이 아닙니다! 모쉐 이전 이미 아브람 때 세워진 초율법적 법칙입니다. 오늘날도 십일조가 영적으로는 하늘 대사제-예수 크리스토께 바쳐집니다(히 7:8, '표준새번역' 및 영문 성경들 참조). 히브리 7:8 원문은 (대다수 한글성경의 오역/곡해와는 달리) 현재형으로 돼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이 올바른 번역입니다.
영문 성경들도 대부분 현재형으로 바로 표기했습니다.
이 진리를 안 믿는 사람들이야 자기 자유겠지만, 진리를 잘못 해석해선 안 되겠지요.
본 필자는..하나님이 성도의 모든 재정을 손수 관여하시길 원하시며 아울러 모든 성도가 풍요롭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배워 왔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우스)님, 범사에 그대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빕니다. 그대의 영혼이 잘 되듯. (요서C 2)
[ 필자는 외래어를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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