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모 왕에게선 큰 아쉬움도 느끼지만 다윋에게 하신 복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신 하나님의 사랑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지상의 누구도 누린 적 없는 큰 은택을 입고서도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 괘씸하지만..하나님은 슐로모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 자신이 아닌 아들 대에 가서야 징벌로서 왕국 분열을 허락하십니다.
슐로모와 같은 슬기와 영예, 부와 쾌락을 한꺼번에 누린 사람은 역사상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가장 미련한 사람이 돼 버린 셈입니다.
주된 까닭이 뭘까요? 앞서 언급한 대로 허영과 과욕을 끝도 없이 좇고 부리다가 하나님을 잊어 버린 때문입니다. 특히 엄청난 숫자의 황후/비빈/후궁들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슐로모의 케이스는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남겨 줍니다. 궁극적인 파멸을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하나님 그분이시라는 것이죠.
돌아 보면, 슐로모는 역사상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슬기를 하나님께 받았고, 이스라엘 사상 최강국을 이룩하여, 온 나라가 평화와 외교/무역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지상의 모든 부자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풍요와 사치를 즐겼고, 가장 호화로운 왕궁/건물 속에서 천 단위를 넘는 여성과의 성생활, 그리고 궁중음악/정원 가꾸기 등 예술을 향유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40년 남짓한 통치기 후반에 지상의 모든 종교를 통틀어 수용하는 관대한 종교다원가이기도 했지요.
그의 방대한 저작 중에서 가장 중시되는 전도서에서 슐로모는 이 모두를 "실험적으로 해 봤다"(2:1)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전도서가 정녕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됐을진대, 슐로모는 "인류 잘되기 한계 실험"의 시범 격이 아니었을까요?
코헬렡(전도자)의 "아, 헛되고 헛되고 헛되어라!"라는 삼중(三重) 장탄식으로 시작하고 일관하는 전도서는 슐로모의 생애 말엽에 썼다고 보여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이 "거듭난" 뒤에 쓴 것이지요. [물론 성령시대의 거듭남과는 다른 뜻에섭니다.]
슐로모처럼 정치/법정/외교/무역과 예술..성생활을 비롯한 온갖 쾌락 탐닉에 바빴던 사람이 군인이었던 아버지 다윋과는 달리 펜을 잡는 저술 생활로도 '한 가닥' 했던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슬기 때문이지요.
'노래들의노래'(아가/雅歌, Song of Songs)를 읽어 보면, 그는 온갖 분야의 문화 예술 감각을 비롯해, 문예도 '천재들의 천재' 급이었습니다. 탁월성을 시사하는 '노래들의노래'라는 이름 그대로 과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애가(愛歌)/연애시요, 일종의 희곡이고 노래입니다.
슐로모는 끊임 없이 그리고 쉼 없이 슬기와 권력, 명예와 풍요, 아름다움과 예술, 쾌락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특히 인간의 참 사랑을 맛보고 싶어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참 사랑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늘 거느리고 평소 함께 했던 1,000 여 여성들 가운데 단 한 명에게서도 참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그러나 슐로모가 벗으로 교제하고 사귄 1,000 명의 남자들 중 딱 한 사람의 참 친구를 발견했다고 고백한 것은 정말 큰 비밀입니다(전 8:28). 과연 그가 누굴까요? 바로 성자님 (즉 구약 시대의 예수 크리스토)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바로 슐로모에게 전도서를 쓰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지요! 이 분이 아니고선 그에게 참 사랑, 삶의 참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있을 수 없었음을 우리는 감안해야 합니다.
[성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앙 선조들에게 수시로 나타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대리하신 하나님의 형상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지난 삶을 회고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된, 12장 길이의 전도서는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교본이요 모범답안의 하나입니다. 전도서는 구구절절 인류가 귀 기울여야 할 내용들입니다. 인류의 타고난 본질과 뿌리 깊은 죄성, 늘 완전/완벽을 추구하는 지향성, 창조주가 마련해 놓으신 온 세상의 자원을 누리다가 스스로 지쳐 버리는 헛됨, 인류 생활의 모든 분야의 한계 등을 샅샅이 체험하고 분석/자평했기에 우리가 좌시할 수 없는 필독서이지요.
슐로모처럼 삶의 지고(至高)에서 '극락'을 누린 사람은 인류사상 두 번 다시 없었기에 그의 생애는 하나의 실험 결과이고, 따라서 그 총결론 격인 전도서는 우리 삶의 귀감이고 샘플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자 예수 크리스토님은 첫 아담 이후 지상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완전 정복하시고 승천하셨기에 둘째 아담이시면서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였습니다(코린토A 15:42~49).]
본 서 서론 부분에서 슐로모는 "만사가 피곤한 것-사람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네. 눈은 암만 봐도 충족되지 않고 귀는 아무리 들어도 채울 길 없어라!"고 개탄합니다.
진리이지요. 맨날 눈이 퀭해질 정도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인터넽 글들을 읽거나 쓰는 우리가 실감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계 명사가 제 눈을 물끄러미 보더니 "방금 광산에서 기어 나온 사람만 같다"고 한 말, 기억납니다. 당시는 기분 나빴지만 맞는 말입니다. 제가 거울을 들여다 봐도 그렇습니다. 사명감 갖고 글을 써 왔지만 눈에 어쩔 수 없이 표시가 납니다.]
슐로모처럼 맨날 밤낮으로 궁중음악 그것도 생음악을 즐긴 사람이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당대 전국 최고 수준의 음악인들 수 천 명 또는 그중에서도 최고 악사들이 연주하는 성악/기악이었습니다. 외국 방문객을 맞을 때나 침궁 속에도 늘 음악은 흘렀을 것입니다. 하물며 미술 보다 음악이 발달한 그 나라였겠습니까? 그 음악을 아무리 듣고 들어도 왠지 늘 한 구석 허전한 마음 공간을 메우고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 오래 전 신학대학원 시절, 친구 따라 어느 대학교 캠퍼스를 방문했다가 학생 대상 전도사역을 하던 선교사가 기증한 수많은 클래식 LP판 레코드 음반을 봤습니다. 많은 세월과 돈을 들여 가며 수집한 것이지만 아낌 없이 내놓았습니다. 그 선교사의 결론은 아마도 슐로모와 같았을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어라! 암만 듣고 즐겨도 끝이 없구나."
[필자도 오랜 세월 신학과 함께 클래식, 종교음악을 전공/종사했습니다만..성령의 은총과 영감을 받던 어느 날, 그동안 해 온 음악에 갑자기 피곤함과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그후로는 타고난 재능과 기교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음악계 명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게 됐습니다. 일류 지휘자, 일류 작곡가, 일류 연주자, 일류 성악가가 선망의 대상이 못 됩니다. 가치관이 180도 바뀌어 버린 뒤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음악이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아무리 아름다워도 의미 없는 음악은 궁극적으로 슐로모처럼 우리 역시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복음을 담는 그릇과 도구가 되어 하나님 왕국의 일익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테지요. 그러나 정말 성령님의 기름부음과 영감을 받아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모차르트는 인류사상 가장 아름답고 많은 악곡들을 낸 최상의 음악천재였지요. 네 살 때 이미 8곡의 미뉴엩을 연주할 수 있었고 여섯 살 때는 건반악기/바이올린/오르간을 프로페셔널하게 연주할 수 있었으며 시창력/즉흥연주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6세 때 5개 건반악곡을 썼는데 현재까지도 자주 연주된다니 가히 그를 능가할 음악천재는 없을 터입니다. 그와 누나 나네를(Nanerl)은 어릴 적부터 유럽 대륙을 누비며 황실과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얼마나 감미롭고 신나고 아름다운지는 모태의 어린아기들이 입증해 준답니다. 태아들에게까지 행복감을 안겨 준다니까. 그의 음악이 후배 베토벤의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천부적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명랑하고 한없이 아름답다면, 후자는 인위적/기획적/구축적이고 자주 우울하다는 것이지요.
다들 알다시피 모차르트의 이름은 '볼프강'(늑대 걸음걸이란 뜻), 가운뎃이름은 아마데우스입니다. 그와 잘리에리의 경쟁 관계를 과장한 연극/영화 '아마데우스'로도 유명해진 이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신을 사랑한 사람' 정도이지요. 카톨맄 '영세명'은 같은 뜻의 그리스어 '테오필루스'였지만 훗날 자신이 라틴어로 바꾼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증스런 이름이 되고 맙니다! 까닭이 뭐냐고요? 그는 아버지 레오폴트를 따라서 바바리아 왕국의 모차르트 가문 선조들처럼 프라이마우러(프리메이슨)가 되어 (1784년 12월 빈/비엔나: '추어볼타티카이트' 라지에 입단) 모든 세계 메이슨들이 최고로 존중하는 메이슨 명사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메이슨 단원이 되는 것도 모자라 '마술피리', '작은 메이슨 칸타타' 등 메이슨리를 찬양하는 수많은 음악도 작곡/연주한 헌신적/적극적인 메이슨이었지요. 입단 전 이미 '오 젤레 데스 벨탈스'(우주의 마음에 바침)라는 친메이슨 음악을 썼습니다. 그의 수많은 후기 음악에 메이슨 정신이 녹아 들고 스며 들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후기 음악을 즐기는 신자는 이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는 그래서 싸탄에게 철저히 이용 당한 뒤 불과 35세로 병사합니다. 또 최후의 미완작 '레퀴엠' 등 화려하고 수많은 카톨맄 종교음악을 썼습니다만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 그의 무덤은 비석은커녕 위치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재능과 실력의 최고 음악인이었건만 그 어느 음악인보다 비참한 종결을 맞았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음악인들이 비슷하게 뛰어난 재능을 받고 태어나지만 하나님과 크리스토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그렇게 마귀한테 이용 당합니다. 수많은 클래식 작곡가들이 그랬고..또 현대에 싸탄을 숭배하고 동물제사 따위를 하면서 악령의 영감을 받은 라큰롤/헤비메탈 주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애의 종착역이 어딜까요.
'아마데우스'란 이름은 슐로모의 또다른 이름 '예디디야'(주/야웨님께 은총 입은 사람)와도 거의 똑 같은 뜻입니다! 슐로모 역시 생애 후반기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종교다원적 삶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사랑하셨지만 동시에 혐오하시고 그의 아들 레호보암 대에 왕국 분열로 징벌하십니다(왕들A 11:9~13).
슐로모는 처가인 미쯔라임(아이귑트) 파라오 왕실을 본받아 왕과 신하들에게 포도주를 따르는 신하와 침실의 술 시중 시녀들을 두고 술로 적극 인생을 즐겨 보려는 취미도 있었습니다. (전 2:3b. 파라오 왕실은 고대로부터 술 시중 관리들을 적극 활용했지요. 창 40:5~23, 물론 다른 나라 왕실도 비슷했습니다만. 네헤미아 2:1).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마지 않았고 내 마음에 즐거운 것은 무엇이든 막지 않았다.." (전 2:10a)
한 마디로 해 보고 싶은 것은 원도 한도 없게 맘껏 실컷 해 봤다는 뜻이지요. 누구건 그래 보고 싶은 맘이 왜 없겠습니까.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러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 함정이 있지요.
슐로모가 정작 그렇게 해 본 결과는 이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뒤돌아 보니 내가 내 손으로 이룬 모든 일들과 애쓴 수고가 죄다 헛것이고 바람을 잡기에 그쳤다. 해 아래선 도무지 보람이랄 게 없었다." (2:11)
그렇게 한껏 즐기고 나서 보니 남는 건 허탈과 허무, 환멸 뿐이란 것이지요.
또 슐로모의 대명사가 슬기인데.. 당대 최고 현인이었던 그의, 슬기에 관한 허무감은 "현인이나 우인이나 죽기는 마찬가지"(2:12~17) 였습니다.
특히 슐로모가 아쉬워 하고 한탄한 것은 선대가 애써 이룬 것이 결국 그 후대 차지가 된다는 것(2:18~21). 사실 슐로모가 세운 화려한 왕궁을 비롯해 그가 한껏 이룬 업적은 모두 그의 후대가 계속 활용했지요.
이것을 예술작품에다 적용해 본다면..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당대에 별로 이렇다 할 찬사를 받지 못했다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호평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70년후인 멘델스존 대에 와서야. ['텔뎈'사는 바흐의 전체작품 약1200곡을 CD 153장에 담아 펴 낸 바 있습니다. 이 가운데 바흐 생시에 자주 연주되거나 제대로 평가 받은 작품은 드뭅니다.]
바흐로서는 다소 억울한 일이죠.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신앙이 있었기에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세속 곡과 기독교 작품을 막론한 총10,000쪽 분량에다 "SDG"-'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라틴어 성경 로마서 16:27, 유다서 25절) 문구를 써 넣기도 했지요.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애를 살아온 슐로모 역시 끝 무렵이 다 돼서야 비로소 '전도자'로서 전도서를 쓰면서 궁극적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계속>
[ 필자는 외래어를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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