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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뭔가를 보여주는 사회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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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보여 주던 이주일

김삼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 세상을 뜬 이주일 전 국회의원이 코미디언 시절 퍼뜨린 유행어다. 익살맞은 '오리춤'으로부터 금연운동까지, 숨지기까지 뭔가를 보여주려 애쓰다가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란 금언으로 마무리 짓고 갔다. 끝내 불교인으로 떠나 아쉽다.   

굳이 이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 보여주고 뭔가를 보는 사회―대한민국은 날이 갈수록 공연문화 공화국이 돼 간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정근 작사/작곡의 '텔레비전'이란 동요다. 이 노래가 직접 공연문화에 기여한 것은 혹 아닐지언정 한국문화의 흐름을 물밑으로 웅변한다고 생각한다. 옛날엔 으레 "대통령이 될래요" 하던 철 모르는 어린이들도 이젠 웬만하면 저마다 연예인이 되는 게 지상 목표다.
가장 앙증 맞고 귀엽고 천재적인 '동심'의 세계라면 고작 유명 연예인의 동작이나 노래를 따라 몸을 흔들며 흉내내는 게 아닌가 싶다. 옛날 한 때는 '바보상자'로도 불리던 텔레비전이 인기 사극 등 끊임없는 볼거리로 기세가 치솟으면서 TV 앞에서의 낮과 밤이 곧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도 흔하다. 

'내 방의 작은 극장'이 돼 버린 컴퓨터의 모니터나 한반도 전체에 하고많은 노래방도 공연문화를 부추긴다. 파티나 술잔치가 곧 가라오케와 노래방으로 이어진다. 남이 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우며, 자신이 따라 뭔가 보여주려고 실력을 기르는 '보여주기 국민 양성소'의 현장이다.

우수사려, 고뇌와 번민거리가 널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 해소, 희노애락 인생에 웃고 울며 한시름 잊고 장단 맞추며 그렁저렁 살아가기도 한다. 미국의 소웊 드라마처럼 한국의 흔해 빠진 연속극과 영화들도 그런 내용으로 점철된다. 요즘은 젊은이 중노년 할 것 없이 MP3 플레이어, 문자메시지 모바일폰 등 보고 들을 것을 늘 몸에 챙겨 다닌다.   

그 바람에 오래 전 가라오케가 세계 최대급 산업의 하나가 되고 한국은 '노래방' 민족이 된지 오래다. 한 술 더 떠 세계 각국에 노래방이 수출되고 심겼다. 국민 중 노래 몇 가락, 춤 몇 사위, 몸짓 몇 가닥 못 하는 사람들이 없고 "가수 뺨치는 가수"들이 돼 간다. 노래방 뿐 아니라 PC방도 있다. 뭔가를 보여주고 뭔가를 들여다 본다. PC방 역시 한국을 통해 세계화 돼 간다.

아무튼 나와 남을 가리잖고 뭔가를 보여 주려는 몸부림들이다. 자신이 생기고 붙으면 그 스스로도 나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고 들려 주려는 사람 사람 사람들. 뭔가를 보여주려니 '-짱'이 돼야겠고 그래서 얼굴도 몸도 이리저리 손질/칼질로 부지런히 깎고 고치고 다듬는다. '공연공화국'은 자연스럽게 '성형공화국'도 겸한다.

공연문화가 마냥 나쁘단 얘기는 아니다. 한국고유의 놀이문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한 많고 설움 깊은 '상놈'이던 민중들의 꺼트릴 수 없는 자기표현과 아우성의 출구가 돼 온 것도 사실이다. 동서양이 예로부터 극 문화가 있어왔고 하다못해 시나 음악, 그림, 조각, 건축도 모두 궁극적으로 자기가 즐길 뿐더러 남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려는 행위들이다.

성경적으로 봐도 시각과 청각은 하나님이 애당초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보고 듣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도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즐거워하셨고 아담에게 에덴의 좋은 것들을 이것저것을 두루 보여주셨다. 창조주 자신이 시각물을 적극 활용하셨다는 얘기도 된다.
하물며 시청각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랴.

그러나 요즘 공연문화와 놀이문화는 '기생문화'와 야합하기 일쑤다. 기생문화가 무엇인가. 상대방의 본능과 욕구를 역이용해 말초신경을 즐겁게 해 주면서 동시에 노골적으로 자신을 팔아 먹는 문화다.

배우나 가수나 뭔가를 보여주려는 욕망이 지나치다보니 홀라당 벗기고 훌러덩 잘도 벗는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 너무 잘 나가면 막가게 된다. 그래서 부끄럽고 속 깊은 곳까지 거침없이 보여주려는 대담하고 '화끈한' 남녀가 급증하고있다. 미국의 MTV 같은 걸 봐도 온통 그게 그거다.

뭔가를 보여 주려다 보니 체면도 수치감도 죄다 내동댕이쳐 버린 것이다. 보여 주고 따 내기 위해선 실오라기 하나조차 거추장스럽게 됐다. 그런 걸 즐기는 사람들도 덩달아 늘고 있으니 뭔가 보여 주고 뭔가 보려는 무리가 '쿵작'이 맞고 함께 늘어 가는 것이다. 광고산업도 뭔가를 보여주고 더 보여주며 돈을 벌려니 이젠 말초신경 끝까지 갈 데로 가버렸다.

뭔가를 보여 주는 사람들은 잘만 하면 금방 부자가 된다. 잘 나가는 연예인은 '부'를 상징한다. 번듯하게 잘 나고 잘 빠져 뭔가를 보여 주고 들려 주다가 이른 바 '히트'만 하면 금방 몇 십억, 백억 대 부자들이 돼 간다. 서민이 상상치 못 할 최고의 수익을 벌어 들인다. 서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 상상 속의 정서를 발산시켜 주는 대가로 서민의 돈을 몰수히 거둬 들이는 것이다.
 
요즘은 교회도 중요한 공연문화의 장이 돼 간다. 뭔가 보여 주고 들려 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목회자들도 그렇다. 아무래도 잘 생기고 허우대가 좋아 뭔가를 충분히 보여 주거나 그러진 못 해도 말발이 좋아 최소한 뭔가를 들려 주는 목회자가 더 잘 "팔리기" 마련이다. 모세나 바울처럼 말이 어눌해도 "말 보다 능력인" 목회자는 요즘 드물다.

교회음악도 현대화되는 건 좋은 현상이지만 알맹이보다 컬러풀한 시위성이 농후할 때가 잦다. 뭔가를 보며 허둥지둥 따라 부른 것 같은데 그냥 슬며시 지나 가는 날도 없지 않다. 형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나 형식에 치우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언젠가 한 후배가 어느 교회 CCM 연주 광경을 보다가 여성 찬양팀의 짧은 미니 스커트 아래로 슬쩍 비친 팬티 색깔이 모두 빨강으로 통일된 걸 보고 놀라, 예배 후 담임목사에게 항의했다는 얘길 들었다. CCM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아닌 눈과 귀에 초점을 두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인 21세기엔 첨단 시각문화가 발달할 대로 발달해 버렸다. 바깥 공연물은 둘째 치고 내 안방극장과 인터넷은 물론 심지어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으로라도 상대방 얼굴을 보고, 아무튼 뭔가를 보며 일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가 됐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이젠 어떤 문화든 종합예술화 돼 가는 추세다. 세계가 알아 주던 비디오 예술의 거장 백남준은 원래 작곡가였다. 그러나 청각예술만으로는 뭔가 아쉬워 시각예술까지 동원했다. 누드 연주자를 데려다 놓고 스트맆 쇼에 가까운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음악도 오페라가 값비싸고 인기 높듯 시청각이 아우러져야 하게 된 것.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체구는 작은 편이어도 솥뚜껑 같은 양손으로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다 간 사람이다. 그가 생애 후반기 어느 때부턴가 독주곡이나 협주곡 끝 마지막 굉음을 포르티시모로 쾅 때린 후 반동으로 튀어오른 듯 두 손을 번쩍 치켜든 채 스틸사진처럼 몇 초 머물러 있자 청중이 충격을 받곤 했다. 숨이 콱 막힐 정도로 멋지게 보여서다. 사실 음악은 끝 없는 흐름보다는 중간의 휴지부 즉 쉼표 때문에 더 음악답다.

그러자 위대한 음악엔 쇼오프 내지 연출이 들어가야 하는가란 이슈가 말 많은 평론가들 입에 회자됐다. 오케스트라도 그렇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 아래로 졸고 있는지 분간이 안 가게 명상적으로 지휘하곤 하던 헤어벨트 폰 카라얀이 있는가 하면 지휘대 위에서 방방 뛰던 레너드 번스타인도 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하얀 손수건도 그런 맥락에서 한 몫 했다. 음악 못지 않게 몸으로 연출도 해 내야 한다. 내노라는 독주자들도 표정과 동작이 따라줘야 청중이 즐겁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암시하는지 내용과 의미성, 더 나아가 지정의적 가치관이 문제다. 단순히 말초 신경을 간질이려는 건지, 건전한 자극을 주려 함인지, 몸과 맘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려는 건지, 보다 항구적이고 영구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인지 등등.

뭔가 보여주고 보려는 관점과 각도에 따라 예술 작품도 되고 저질 외설도 된다. 단적으로 나체상이 그렇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조각상은 보기와 상상에 따라 예술품도 되고 포르노도 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영적인 뭔가를 던져 주는 것이 최상의 가치관임은 두 말 할 나위 없겠다. 시청각은 대부분이 육적인 것이다. 육적인 것들은 보면 볼수록 공허와 혼동이 찾아 들며 그것이 늘면 스트레스와 환멸로 쌓여 간다.

가수나 배우들은 최대 희망사항이 "좀 더 섹시하게"란 것이다. 왜 그럴까? 속이 공허해도 채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대기에 오른 연예인들이 내리막길에 절망하고 자살한다. 기발한 노래와 현란한 몸짓으로 젊은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던 마이클 잭슨은 온갖 추문으로 삶을 장식해 왔다. 공허와 허탈을 메울 길 없는 탓이다. 해골처럼 변해 가던 그의 얼굴이 그런 결론을 반영해 주곤 한다.

영혼도 시청각과 기타 감각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 더욱이 우리의 눈은 마음의 창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우리 영혼도 상당량 좌우된다는 얘기다. 영혼도 보고 듣고 먹어야 산다.
영혼에게도 feeding을 해 주고 뭔가를 보여 주고 들려 줘야 한다. 성경 말씀을 들려 주고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모르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피드백(feedback)까지 이뤄진다. 그것 밖엔 가장 고상한 가치를 키워 나갈 길이 없다.

뭔가를 보여 주고 들려 주는 문화-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가치는 다양하지만, 교회와 패러처치, 선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하고 성도들의 영혼을 먹이는 도구로서만 최상의 가치가 있다. 영원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 뭔가 보여줄 때가 됐다. 사회정의보다는 바로 크리스토님 자신이다. 누구든지 바라봐야 할 모습이 그분이다. 이젠 우리의 눈을 주님께 돌려 그 찬란한 얼굴을 바라볼 때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