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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주변의 동성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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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  
 
오래 전 맨해튼에서 아내가 사업체를 운영하던 때였다.

고객들 중 '벹'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유대계 여성이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와 쾌활한 성격에다 말씨가 빠른 전형적인 오피스 걸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눈길이 갈 법한 매력적인 미혼 여성이었다. 형식적인 유대교인이었는데 나의 어슬픈 히브리어 발음도 고쳐 주곤 했다.

고객들 중에는 가끔 오는 매우 핸섬한 몇몇 남성들도 있었다. 설화석고를 깎고 다듬은 듯한 용모에 키가 후리후리했다. 주말이면 남자 둘이서 수수한 차림으로 거리를 거니는 데 왠지 별 말이 없다. 벹은 오가다 이들과 만날 때면 꼬리를 친달까, 눈에 띄게 관심을 보이며 몸 달아 했다. 그 남자들이 오가면서 최소한의 관심을 보일 만 했건만 이상하게도 전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간파한 원인은 그 남자들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 요즘 동성애자들은 아주 드러내고 다닐 만큼 대담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별로 티를 내지 않고 다녔다. 그래도 유심히 보면 어딘가 모르게 표가 났다.
벹이 어느 날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리엔 멋진 남성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어요. 남자라면 여성에게 관심 있는 거, 당연하지 않아요? 저들이 암만 멋 있고 잘 났으면 뭘 해요? 겉은 멀쩡해도 속은 곯은 걸요."

맏아이가 중학생 때였다. 방학 때면 한 번 씩 친구들이 모아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파티 겸 오버나이트를 하곤 했다. 아내는 아이 친구들에게도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밤에 다들 자려고 리빙룸 안에 흩어져 제각기 누운 자리에서 한 아이가 불쑥 던진 말이 연못 위에 파문 같았다.
 
"동성애는 아름다워. 그렇지 않니?"

어른이 지나가듯 던지는 말로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 또래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 아이의 가정교육이 좀 문제시 돼 보였다. 그 날 이후 그 아이 주변 친구들이 눈치를 보며 슬슬 갈려 가는 듯 했다.

경제와 예술의 도시 뉴욕에는 아마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다음으로 동성애자들이 많을 것이다. 게이들 중 예술가들이 많은 탓. 필자가 아는 음악인들로부터도 대다수 음악학교의 동성애적 성향은 물론이고..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는 어느 명문 음악학교의 명성 높은 합창단도, 지휘자로부터 단원 대부분이 동성애자였고, 동성애자가 아니면 입단하기조차 어렵단 말을 들은 지가 퍽 오래다.

실제로 그 학교에서 공부하던 내 후배 (남자) 하나는 어느 날 기숙사 욕실로 들어 가다 반쯤 벗고 뒤따라 오는 남학생을 보고 기겁을 하여, 일찌감치 그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 기숙사에서는 밤마다 남자들끼리의 이상한 신음소리가 난다고 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파리하게 생긴 백인이었다.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던 중 내가 복음 얘기를 꺼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도 성경 얘기를 시작했다. 성경을 퍽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늘 무뚝뚝한 서브웨이 대중들 가운데서 모처럼 만난 크리스천과 성경 얘기를 나누게 된 게 하도 반가워 이것도 하나님의 복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이어 나가면서 내심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한 주위의 남성들을 정말 정답고 친절하게 돌보셨죠. 제일 어린 요한을 늘 아끼고 사랑했고… 심지어 요한은 예수님의 어깨에 어리광을 부리듯 기대기까지 했죠.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요! 예수님이 보여주신 남성들에 대한 이런 사랑은 후에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죠. 페트로와 요한도 나란히 두 손을 잡고 성전으로 올라갔고요."

페트로와 요한이 손을 잡고 올라 갔다? 나는 성경에서 그런 부분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아니 뭐, 페트로와 요한이 손을 잡았다 치자.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그는 컨텍스트에서 벗어난 '성경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이 사람이 일종의 '크리스천 동성애자'라고, 또는 그런 성향을 지난 사람이라고 속으로 단정 짓자 왠지 껄끄러운 게 구역질 같은 것이 나려 했고 더 이상의 대화가 꺼려졌다.

나도 웬만큼 대화를 즐기지만 당시로서는 복음을 헛되이 받은 사람과는 별로 얘기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가 그런 나의 낌새를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도(?) 몇 정거장 뒤에서 하차해 버렸다.

한 기독교 언론사에서 일할 당시. 하루는 어떤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목쉰 음성에다 심각한 어조였다. 미국의 동성애 현실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해당 꼭지를 번역한 날더러 번역자 자신의 견해는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런 식의 질문을 받는 게 처음이어서 좀 당혹스러웠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해 대답해주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동성애자임을 직감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댁의 견해를 묻는 거지, 성경의 견해를 묻는 게 아닙니다!"
"저의 견해는 성경에서 터득하고 제 것으로 소화시킨 것입니다."

그는 이내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 동성애자임을 정중하게 밝혔지만, 말을 이어 나가면서 점차 흥분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고 느끼기엔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 그렇게까지 단죄하진 않는데도, 정작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들을 너무 괄시한다는 쪽으로 말을 해나갔다.

"형제님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성경은 동성애에 관해 단호하다고 저는 생각하는 데요."
"어떻게 단호하다는 거죠?"
"성경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렇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는 나름의 성경관과 동성애관을 한참동안 설파했지만 동성애자인 자신의 현실과 교인을 겸했다는 점에서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쁜 신문사에서 마냥 전화통만 붙들고 있을 수 없어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필요하면 자신이 걸겠다는 것이었다.

별 도리 없어 이렇게 말을 맺었다.

"형제님. 저도 자주 죄짓는 사람으로서 동성애자들을 단죄하진 않습니다. 내겐 그런 자격도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동성애자든 누구든 그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도 형제님의 영혼을 사랑합니다. 다만, 다른 온갖 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자체는 미워해야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