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맑 16:1-18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취사선택하여 믿습니다.
성경 전권을 통째로가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들만 이리저리 골라 내어 믿는다는 얘기지요. 반면 교계 명사들의 베스트셀러나 세상의 흥미 도서들은 가리거나 고르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 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올바른 구도자의 태도가 아니지요.
성경 말씀들은 자기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가리고 고르고 뽑을 게 아니라 통째로 삼켜 소화시켜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그래서 나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게 그 작은 책을 주시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갖다가 먹으시오. 그대의 배는 쓰게 될 터이나 입에선 꿀처럼 달 것이오.'" (요계 10:9 사역)
물론 위 본문의 '작은 책'이 우리가 가진 성경전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계시의 말씀임은 분명합니다. 성경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이 처음엔 달지만 소화시켜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감할 수 없는 말씀이라면, 우리가 믿되 가리지 말고 모두 다 믿어야 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새 새끼는 어미새가 갖다 주는 먹이를 가리지 않고 그냥 받아 삼킵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새이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어미새는, 열심히 짹짹거리며 극성적으로 받아 먹겠다는 새끼새들을 아무래도 더 먹여 주기 마련입니다. 그러지 않는 새끼들은 병든 조짐이고 결국 시들시들하다 죽고 맙니다.
신자들이 이 16장 전체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16장의 대부분이 일부 사본에는 없다는 점에 집착, 은근히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특히 학식에 뛰어나다는 '엘리트' 학자들이 그렇지요.
그러나 흔히 '대명'이라고 불리는 행 1:8 성구를 포함한 행전을 쓴 루카가 루카복음서에도 그랬듯, 복음서의 네 기자들이 모두 각기 나름대로 주님의 대명(the Great Commission)을 기록했습니다. 행전 1:8만 대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맑16장 내용이 다른 복음서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마르쿠스는 본 장에서 거듭거듭 믿음에 관한 교훈을 언급합니다.
사실, 불신의 태도와 믿음의 태도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기도 하지요.
주님의 부활 사실에 대한 불신의 태도는 처음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16:12,13).
제자들은 되살아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확실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긴가민가 하며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토마는 제 손으로 주님의 몸을 만져 보기 전엔 결코 믿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 결과..어떻게 됐을까요?
주님이 그들의 불신과 강퍅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도무지 목격자의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목격자는 한 명도 아니고 최소 3명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클로파스 및 그의 친구였지요. 성경은 진실 확인에 반드시 2-3 증인을 요구합니다. 초기 부활 증인들도 이 숫자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조차 성령님을 모셔 들이기 전인 초기엔 진실/진리를 좀처럼 믿지 않는 불신앙을 지녔다는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약속된 대로 성취되기 위해선 인간 스스로가 의지를 발동시켜 믿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지의 발동과 믿음의 실천 즉 사도 야코보가 말한 행위까지도 모두 자동으로 돼야 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갖기가 일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 결핍증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소관으로 몰아 붙이기가 쉽지요.
많은 신자들이 이름은 신자이지만 구원을 받고 나서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믿기 위한 신앙을 발동하지 않습니다. 일단 거듭나고(?) 나면..구원 받았다고.."난 이젠 천국 간다"고 자신하고 나면,
방언도 하나님 소관
은사도 하나님 소관
치병도 하나님 소관
죽음도 하나님 소관
모두 하나님 소관으로 다 맡겨 버립니다. 결국 자신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지, 주시면 믿고 안 주시면 안 믿겠다는 말 같이 돼 버립니다. 게다가 그런 방관적 신념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대단한 신앙으로 치부하고 만족합니다.
그렇게 믿음 생활이 쉽다면, 왜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라도 산을 바다로 던질 수 있다고 했을까요?
그렇게도 믿음 생활이 간단한 것이라면..그런 주권적 신앙이 훌륭한 신앙이라면 왜 주님은 왜 제 발로 병 고침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그대의 믿음이 크오!"라고 칭찬했을까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해 주시길 바라고, 자신은 꼼짝도 않고 다 받아 먹기만 하려는 사고들이 생각과 생활 속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이지요. 그런 것을 모범적이고 훌륭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신앙보다는 신념에 가깝습니다.
하다 못해 양떼들이라도 꼴을 얻기 위해서는 목자를 믿고 문을 드나들며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하며 이리저리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하고 목자가 이끌어 주는 들판에 가서 자신이 풀을 뜯어야 하고 되새김질 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합니다.
목자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다 해 주길 바라면서 우릿간 안에 잔뜩 자빠져 드러누운 양들은 굶주리고 병들다 죽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의 빵으로 이미 제공해 놓으신 치유나 복, 기타 선물들은 자기가 애써 흠모하고 부르짖어 차지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얻기까지, 손 안에 쥐기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믿는다면 거기 걸맞은 행동까지 따라야 합니다.
방언을 하거나 은사를 받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거저 갖다가 먹여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은근히 원망하거나 심지어 믿음으로 받아 활용하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기까지 하는 신앙을 우리는 모범적이고 올바른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관한 남의 구전(口傳)/증언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말 그것도 신자의 말을 믿는 데 둔했거나 아예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말을 일단 검증해 봐야 하지만, 믿을 것은 믿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예언된 것이 성취됐음을 2-3 명이 입으로 증거했을 때 믿음으로 받아 들였어야 합니다.
죄에는 commission의 죄와 omission의 죄가 있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걱정 근심도 불신의 죄에 속합니다.
믿어야 할 것을 안 믿는 것도 선이 아닌 죄악입니다.
비신자가 끝끝내 예수 크리스토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지옥의 파멸로 몰아 가는 큰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약속하고 성령님이 준비해 놓으신 복, 방언이나 은사 등을 믿지 않는 것도 선은 아닙니다. 죄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내가 믿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입니다.
어느 누구 남의 책임이 아닙니다.
만약 남을 원망하고 질투하면서 마치 복과 방언, 은사 등을 누리는 사람들이 잘못된 양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더 큰 죄악입니다.
결점은 결점으로, 죄는 죄로 우선 인정해야 정직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용서는 둘째 문제입니다.
제자들의 이 초기적 결점을 당연스럽게 여겨 우리들의 결점으로도 삼아선 안 됩니다.
남의 결점을 내 것으로 되받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결점은 앞서 겪은 사람들의 경험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하고 답습할 전철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16:17-18에서 새 방언과 함께 주님이 약속하신 '5 표징'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즉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게 돼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필수적인 것일 터입니다. 주님이 별 필요 없는 것을 표징이라고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5 표징을 별로 필요 없는 것인 양 경시/천시/무시/간과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무시하는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지요. 불필요설, 불필수설은 큰 착각입니다.
방언만 예를 들어도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고할 때 쓰이므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교에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음과 의지로 직접 입을 열고 혀를 움직이기까지는 방언이 자동으로 되지를 않지요. 방언은 받는(to receive) 게 아니라 하는(to do, to speak) 것입니다!
방언은 신자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게 돼 있습니다.
방언이 아니면 무엇으로 귀하의 영의 비밀을 하나님께 아뢰시겠습니까?
주님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신자에게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표징인데..
이 가장 기본적인 방언조차 없이 무엇으로 9 은사 중 내게 주어진 내 몫의 은사를 받을 길이 있습니까?
신앙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자신이 입을 벌려 모국어가 아닌 성령님이 이미 주신 언변으로 스스로 말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왜 방언을 강조하냐고요?
방언은 예나 이제나 성령님을 모셔들인 첫(initial) 표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행전을 보면, 성령을 가득 채워주심(성령침례/성령충만/infilling)의 우선적인 표식은 언제나 보고 들을 수 있게 즉 방언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순절 당일 예루샬렘 120성도가 전원 방언을 했습니다.
코르넬리우스 일가가 전원 방언을 했고 방언노래까지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전원 또는 대다수가 방언을 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심지어 마술사 시몬까지도 자기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에페소 교우들도 전원 방언을 했고 일부는 예언까지 덤으로 했지요.
사도 파울은 코린토 교우 전원이 방언을 하기를 바랐고..자기 자신 그들 모두보다 방언을 말했기에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행전 기록을 볼 때 방언은 확실히 성령 침례/충만의 표징이며 성령의 9은사들중 자기 몫을 끌어들이는 관문 역할을 합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 성경의 약속들을 받기 위하여, 믿음을 의지로써 행동으로 옮겨 과감히 실천하여 승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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