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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히 11:1] 믿음은 무엇인가? (경배도우미)



믿음은 무엇인가?
-신앙의 본질

가끔 믿음/신앙에 관하여 질문을 받곤 합니다.
"과연 믿음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명쾌한 해답을 줍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히 11:1).

그러나 흔히들 이 정의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추상적이거나 심리적, 철학적인 믿음을 가진 신자들도 흔합니다. 성경대로의 믿음보다는 '나름의 신앙'을 지닌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을 너무 쉽고 값싼 것, 또는 반대로 마냥 어렵기만 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나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정작 진짜 믿음이 필요할 때 당황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나 위기 등 우여곡절 끝에 체험을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이적 체험 중심의 신앙을 위험하다고 보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한 결과가 이적의 열매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자의 삶 속에서도 믿음은 우여곡절과 기복 곡선을 그립니다. 카르멜산 정상에서 바알-아쉬타롵 사제들과 믿음의 대결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굴복시키는 등 승승장구의 길을 걷던 엘리야가 예제벨 왕후의 칼이 무서워 도주하다 "이젠 족하오니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가소서"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신세가 된 것이 그 예입니다.

주님은 "그대의 믿음이 어디 있나?", "믿음이 적은 사람, 왜 의심했는가?"라고 물으십니다. 믿음의 유무와 분량을 물으시는 물음이기에, 긴장하고 근신하면서 나 자신을 조심스레 살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고(히브리서 11:6a), 우리 자신이 믿음에 서 있는가 늘 검증하고 확증해야겠기에(코린토B서 13:5) 우리는 자신의 믿음 상황을 점검하고 그러기 앞서 믿음의 정의부터 곰곰히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믿음의 선조들의 족적을 되더듬어 봅시다. 이것은 일종의 흥미로운 역사탐방인 동시에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가 활용한 "언약험증적"(驗證的)-언약을 믿음으로 실천한 체험을 통한 변증-방식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우리의 믿음 이해를 위해 따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일 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아벨로부터 구약 말기 순교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 사례에 가장 많은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8절부터 19절까지).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자, 자신이 태어나 늘그막까지, 여지껏 살아온 본 고장과 친척들을 냉큼 떠나 카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뜻이지요.

아브람의 이 '출(出) 우르' 내지 '탈(脫) 하란' 사건-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신선한 '충격'을 안겨 드린 일입니다. (아브람/롵의 출 하란 사건에 앞서 테라 가정의 출 우르 사건이 앞섰습니다. 테라 가정의 출우르도 사실 하나님의 인도 때문이었습니다. 창 15:7 참조).
그도 그럴 것이, 아브람의 본국인 칼데아-우르는 잡신과 우상, (뉴에이지의 원조 격인) '올드에이지'가 우굴대던 바빌로니아 제국 땅이었기 때문입니다(창 11:27,31, 10:10 참조 ). 게다가 아브람의 아버지 테라는 우상제작자였습니다. 하란에 와서도 테라가 우상제작을 멈췄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느 날 돌연 들은 하나님의 음성(창 12:1-3)을 귀담아듣고 순종했다는 것은..아브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입맞췄다"는 뜻입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말씀에 믿음을 "화합"(和合)한 것입니다(히 4:2). 
 
하나님은 또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義)로 여겨 주십니다(창 15:6)!
이 말의 엄청난 뜻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본래 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을 적극 섬겨온 조상들의 죄까지 그에겐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한 이 믿음을 보셔서 하나님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전환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과거 에놐과 노아도 물론 그랬었지요(창 5:21-24, 6:8,9).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성자님(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의 구속 사역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의 벌거벗은 수치를 위해 짐승(양) 가죽옷을 손수 마련해 주시던 그 사랑 때문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아브람을 따라 왔다가 소돔/고모라 거주를 택했고 나중엔 부지 중 두 딸과 동침해 후손을 낳은 그의 조카 롵까지도 '의인'으로 불러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그만큼 귀히 보셨다는 얘기지요.

아무튼 그런 아브람의 '출 하란' 반응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그는 야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 순종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우상들 대신 눈에 안 보이는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는 말 못하는 우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무조건, 보이지 않는 땅으로 떠납니다.
-그러기 위해 고향과 친척 등 눈에 보이는 모든 끈들을 잘라 버려야 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장차 이뤄질 것을 바라고 그 약속의 끈을 붙들고 의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믿음은 걸맞은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행동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의 표현으로서 마땅히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의지의 결단으로 시작됩니다.
바꿔 말하면, 믿음의 의지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말씀의 약속은 이뤄지기 시작한다는 것. 이 행동이 곁들여지지 못하고 빠지면, 믿음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관념적/심리적/신학적인 '나름의 신앙' 또는 단순한 희망으로 머뭅니다. 

그러나 소망과 믿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서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파울이 믿음/소망/사랑을 구분해 나열할 필요가 없었겠지요(코A 13:13 참조). 소망은 미래지향적이지만 믿음은 현재지향적입니다. 소망을 앞당겨 현재화하는 것이 믿음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망과 믿음을 혼동합니다. 바라기만 하면서 믿는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 것이지요.

이 신앙의 행동화에 대해 (예수님의 동생, 사도) 야코보도 덩달아 입맞춰 웅변해 줍니다(야코보서 2:14-26 일부중략, 사역). 

   나의 형제님들.
가령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면서 행동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 선조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짜크를 제단 위에 바칠 때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믿음이 그의 행동과 함께 작용하고 행동으로 믿음이 온전해졌습니다. (구약) 성경도 말해주듯,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겨 주셨다는 말씀이 ...     
이렇게 보건대, 사람이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믿음으로만은 아닙니다.
영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현대인의 구체적인 실례도 들어 봅니다.

케닡 헤이긴은 16살 무렵, 당대 의사들이 모두 포기하고 '필사 선고'를 내린 중병으로 하루종일 병상에만 눌러 붙어 지내야만 신세였습니다. 그의 몸은 나날이 말라가 거의 뼈만 남습니다. 집안 사람들도 모두 그가 곧 죽을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믿고 조용히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집안 사람들과의 대화와 성경 읽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쿠스 복음서 11:24이 눈에 번쩍 띄었습니다. 믿음에 관한 주님의 교훈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오.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오. 그러면 그대들에게 그대로 될 테니."

이 말씀에 따라 헤이긴 소년은 스스로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낫기를 바라기에 이미 나은 사람, 건강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몇달동안 누워있던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하고 천근만근 무겁고 모든 아픈 증상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쳤지만,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그 병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 최근 헤이긴에 관해 웹 세계에 많은 비평들이 나돌지만, 딴 건 몰라도 이 소년의 믿음의 깨달음과 실천 만큼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병 나음을 구하고 믿는다면 나은 것처럼 행동하여 병석을 털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중풍환자에게 일어나 병상을 들고 가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지요. 
헤이긴에게 모종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 소년의 믿음 자체가 헛되다고 말하긴 어렵네요. ]

그밖에도 우리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박을 따러 사다리를 타고 초가지붕에 올라가 박을 딴 아들이 내려오려 하자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박을 아래로 던지게 한 뒤 "너도 내가 받아 줄테니 냉큼 뛰어 내려라"고 한 아버지의 믿음 요구.. 가뭄 끝에 비를 바라는 기도를 하러 가는 교우들 틈에 끼어 유일하게 우산을 들고 간 소녀 이야기 등을 통해 어린이의 티 없는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엔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면서 거기 응할 믿음을 인간에게 심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합해져야 합니다.
선물이 선물다우려면 주는 이의 뜻 못지 않게 받는 이가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입니다.

이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의 행동화를 통한 실현을 내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이 믿음의 정의에서 소망과 믿음을 구분해 줍니다.
소망과 믿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은 소망이지만 소망의 실체가 믿음입니다.
소망을 실체로 구현해 주는 것, 즉 바람의 실체화/실현화가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 이 구현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바라는 것들이 이뤄지기 위해 걸어 갔고 움직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일 뿐더러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비록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힌 것도 없지만 이미 가진 것으로 확증된 것처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듯 손에 잡힌 듯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믿음의 사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조심을 하되 행동의 일부로서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 믿은 바에 대하여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입술과 혀의 열매를 먹으며 살아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할 터입니다. 

[여기서 지난 세기에 (프리메이슨 33단) 노먼 빈슨 필이 주로 퍼뜨린 뉴에이지적인 '긍정철학'과 성경의 믿음을 구분할 필요가 대두됩니다. 필은 부정적인 사고와 말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긍정으로만 봐야 한다는 편파적인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 크리스토와 그 구원의 유일 절대성을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무조건 긍정' 사고는 어떤 비평과 검증도 거부합니다. 그런 사고는 사회에 무서운 부정부패를 몰고 오며 절대독재의 거름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뉴에이지운동은 부정과 비평 없는 향후 최악의 적크리스토인 '짐승'의 지구촌 절대독재화를 위한 모종밭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고백 이외에 사물을 긍정/부정으로 고루 보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제가 늘 드는 일례로, 주님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긍정적인 말씀만 하시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서신서들도 당대 교회에 관해 긍정/부정적인 평가를 고루 가합니다. 성경은 '무조건 긍정' 사고로 가득 차 있지 않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과연..우리가 늘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갑니까?
흔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런 결단과 믿음의 행동들이 일어나곤 하지요.
그래서 이런 체험들이 축적되고 쌓여 가면, 우리는 믿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글이나 얼굴로 만난 티엘티 사람들에게 성구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들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권하곤 합니다. 먼저 입술과 혀로 믿음의 고백을 하라고 일러 줍니다.

믿음 실천의 가장 쉬운 예의 하나로 방언을 다뤄 봅시다.

일부인들에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의 하나로 흔히 오인 받는 방언은 실상 믿음의 행동화를 이해하는 데 쉽고 좋은 실례입니다. 물론 방언은 이미 믿는 사람, 거듭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믿자마자 거의 동시에 방언을 하는 예도 있지요.)

성령님이 지상에 내리신 오순절 그날, 사도들을 비롯한 120 성도들은 모두 한결 같이 성령님이 각자에게 주신 언변(utterance)에 따라 방언을 시작했습니다(they began to speak in tongues, 행전 2:4). 신약시대/교회시대/복음시대/성령시대/은혜시대/참하나님의왕국시대를 알린 시점이죠.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한 가지는 성령님께 언변은 받지만 방언 자체는 본인이 시작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경엔 "방언을 받는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방언은 내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은사방언은 다릅니다)
성령님은 이미 2천년 전 오셔서 오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게 해 놓으셨기에 우리가 믿음을 행동에 옮기면 될 뿐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교계 지도자들이나 목회자 등 다수인들이 과거에 쓴 책에다 '방언실패담'을 간증(?)처럼 늘어 놓은 것을 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런저런 '성령론'(?)까지 쓰면서도 내용인 즉 "해 보니 안 되더라"가 급기야 "오늘날 방언은 없다"는 둥 "방언은 필요 없다"는 둥 방언무용론으로 발전한 예를 보입니다. 오착(誤錯)이 오착(誤着)이 된 셈이지요. 바로 성령님이 교회에 주신 방언을 거부하면서 성령님을 논한다는 건 그야말로 지독한 넌센스가 아닐까요???

저 자신, 오래 전 일년간 꼬박 (유명 부흥강사들을 두루 섭렵해 가며 안수를 받는 등) 온갖 '짓'을 하며 방언을 오매불망/학수고대하다가 거의 좌절 경지에 빠져 급기야 '방언 실패 군단'의 전열에 서게 되지 않나 하던 처지였습니다. "나는 고아입니까, 서자나 버린 자식입니까?"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방언을 하고 난 거의 즉시 깨달은 것은 방언은 믿음으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데 어떻게 하냐?!"는 말은 말이 안됩니다. 본질적으로 내 자신이 해야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자신이, 모국어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신 그 언변으로 "이상한" 발음을 혀에 올리고 입술에 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뭐라든 간에 방언은 (긴 학업 과정 없이 혓바닥에 공짜로 냉큼 얹어 주시는) 외국어나 지상언어가 아닙니다!

가끔 성령님께서 하도 답답하셔서 거의 강제적으로 혀를 움직여 주시는 예도 있습니다만 늘/모두 그렇진 않습니다. 믿음의 실천을 기다리십니다.

그래서..방언을 하기를 기대한다면 모국어로 기도해선 안되지요. 믿는다면 거기 걸맞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성령론'을 논하는 학자나 목회자들이 혹시 아직도 방언을 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당장이라도 믿음으로 혀를 움직여 (모국어가 아닌 '이상한' 발음을) 해 보라고 권유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방언은 믿는 이들에겐 응당 따르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원리를 몰라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방언을 위해 애꿎은 소나무를 뽑으려고 붙잡고 있거나 실제로 한 뿌리 뽑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는 평생 방언을 해 보지 못하고 그냥 내세로 향하는 사람도 숱하지요. 그러니..약속을 쟁취하고 않고는 개인의 믿음의 행동화에 달린 것입니다.


[ 그리고 부탁인데, 제발..방언을 '일회용 체험'으로 전락시키지 마십시오.
매번 믿음으로 날마다 매 순간 방언을 하십시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평생이든 반평생이든 방언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많은 비밀을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게 되며..많은 것을 이루게 됩니다. ]

구원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거듭나며) 방언도 믿음으로 합니다. 그밖에 성경의 모든 언약/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는 말을 역이용해서 "난 이적 체험 따위를 안 해도 다 믿는다!"고 자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바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도들이 복음에 따르는 이적을 간구했을까요...............?
이적을 봐야만 믿겠다는 믿음과 이적을 낳는 믿음은 서로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모든 약속들을 믿읍시다.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듭시다.
믿는다면 행동으로 옮깁시다.
믿음 없음과 불순종으로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지 맙시다.
믿지 않는 악심을 품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조심합시다(히 3:12).
믿음의 찬연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 믿음과 행동의 사람들이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