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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히 2:4] 오늘날도 필요한 이적과 표징 (김삼)

    


하나님도 증언하십니다. 표징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주신 성령님의 선물들로써 말입니다.
(히브리서 2:4)


오래 전 다니던 한 교회에선 '날마다 이적을 기대하라'(Expect a miracle everyday)란 노래를 부르며 신자들을 북돋곤 했습니다.
눈썹을 치켜 올릴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정말 날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도움 없이 단 하루라도 살아 갈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기실 자연적 도움만으로 제한하려는 '신학적'인 사람들이 많지요.

잘못된 일부 현대 영성이나 신학은 성경에 대한 신자들의 몰이해와 오해를 낳게 만듭니다. 그 대표적인 한 가지가, 이적과 표징은 오늘날 "다 사라졌다"거나 "불필요하다"는 인식이죠. 오늘날의 모든 초자연적 현상은 다 잘못됐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로부터 왔다는 식의 사고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성령님은 강단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심리적/정서적/윤리적으로만 역사하실 뿐, 아무런 초자연적 권능을 베풀지 못하고 지금 팔이 묶인 채 계시단 뜻인가요..? 구원만 베푸시고, 설교자의 설교 때 감동만 주시고(?) 나머지 시간들은 가만히 앉아 계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거듭남/구원은 초자연적 역사가 아니고 자연적 역사이던가요? 천만에!

물론 성령님과 선한 천사들 이외의 초자연현상은 모두 마귀와 그 졸개들인 악령들로부터 옵니다. 이교와 동양철학/역술/점술/도술/신비술/차력술 따위나 뉴에이지로부터 오는 모든 초자연현상이 그렇지요. 제 주장이 아닌, 성경에 명시된 사항들입니다.

아울러, 교계에서도 정체와 뿌리가 혼탁하고 불분명한 기존의 토론토 블레싱, 빈야드, 알파 영성 등은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으며, 특히 제3물결 또는 소위 '늦은비운동'에 이은 오늘날의 신사도영성 같은 것은 주권운동과 더불어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지요. 따라서 이들의 주장과 그들이 강조하는 초자연적 현상엔 비성경적인 심상치 않는 면모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들은 건전한 성경적 바탕 위에 서려는 신자들, 성령님의 것들을 사모하는 신자들에게 마냥 혼동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명시된 이적들과 표징들-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불필요하거나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고대인들과 다름 없이, 똑 같이 현대인들에게도 성령님의 이적과 표징들은 필요합니다. 오히려 고대보다 훨씬 더 죄가 많고 그 오염도가 높은 현대에는 과거보다 더한 권능과 이적과 표징의 필요성과 의미성을 띱니다. 죄 많은 곳에 은총이 넘쳤다는 말씀과도 같은 맥락이지요.

요즘 흔한 말처럼,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됩니다.
성경 진리에 관하여 예/아니오가 분명해야 하지만, 좌나 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혀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처럼 마냥 표징과 이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꾸짖지만, 그렇다고 선한 표징과 이적을 무용지물이라거나 현대에 불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지요. 성령님의 것은 주님 오시기까지 영구적, 항존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연적인 신이 아니라 언제나 초자연적인 신이십니다.
자연적인 신은 있을 수도 없고 그건 신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 자연일 수가 있나요..? 영은 언제나, 영원히 초자연입니다.

인간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영은 여전히 죄로 인하여 죽은 상태이기에 성령님의 감화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중재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을 제대로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학설에 따라 마음이 치우친 사람들은 성경을 언제나 학설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그 색안경을 벗기까지는 성경을 바로 보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초기교회 당대의 모든 이적과 표징은 오늘날 사라졌다고 하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그래야 할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칼뱅주의는 물론 여타 교파 중단론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예컨대 미국 시한부 종말론자 해럴드 캠핑은 성경 시대 이후의 모든 이적들을 "싸탄의 것"이라고 장담하지요.

어느 네티즌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오늘날도 그런 초자연적 역사를 하실 주권이 없으시냐고 물었는데 정말 옳은 말입니다.
도대체 주권은 학자들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성경과 학설, 어느 쪽이 더 권위가 있습니까?

소위 절대주권 사상의 틀 아래서 성경 자체보다는 모종의 해석과 학설을 더 믿는 사람들은 겉모양으로는 신본주의자인 듯 하나 사실 알고 보면 인본주의자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학설 색안경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성경을 볼 눈이 없다고 믿는 점에선 비신자와 대동소이하기도 하고요.

초기교회의 이적과 표징들이 다 사라졌고 현대교회에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주로 다음 성구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마태복음서 7:22,23, 12:38,39, 16:1-4, 24:24
루카복음 23:8.
요한복음 2:18, 4:48, 6:24-27,30, 20:29, 
행 8:9,10
코린토A서 1:22, 13:1,2,8-11
테살로니카B서 2:9....

위 성구들이 과연 그런 설을 뒷받침해 줍니까?
만약 그렇다면, 중단론을 주장하는 그들은 왜 현대의 것을 입증하려고 구태여 옛 시대의 성구를 인용하는 것입니까? 모순 아닙니까? 성경의 일부가 진부하고 중단된 것이라면 성구 자체를 인용하지 말아야 할 터입니다. 그래서 성경보다는 후대의 책과 학설들을 더 중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설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말씀대로 전혀 믿지 않고 체험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이 더 건전하고 좋은 믿음인 것처럼, 합리화해 주는 빌미와 핑계거리가 되어 있기도 하지요.
쉬운 예를 들면, 신유나 방언 따위를 전혀 추구하지 않아도 더 성경적이고, 따라서 더 건전하고 더 좋은 믿음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라는 말입니다. 제 자신이 그랬고 그런 예를 많이 봐 왔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 격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성구들은 어떤가요?

마태 9:35, 10:1, 11:2-6,20, 12:28, 13:58, 17:16-20, 21:21,22
마르코스복음 6:5,6, 9:23, 11;23,24, 16:17,18, 20(!).
루카 4:18-19, 5:26, 6:19, 7:16,17, 8:39, 13:16,17, 18:42,43, 
요한 2:11, 4:53, 11:40, 12:37,38, 14:12-14, 20:30,31
행전 2:17-21(전후 문맥 참조, 특히 22절!), 2:33b,43, 3:7-9,16, 4:13-16,29b-31(특히 30절), 5:12, 6:8, 8:5-7, 9:34,35,41,42, 10:44,45, 13:11, 14:3(!), 19:11,12        
코린토A 2:4,20,21, 12:7-11,28-31, 14:26,39,40,
테살로니카A서 1:5 
히브리서 2:4..   

 
위 성구들이 이적/표징들의 무용성을 말해 줍니까, 아니면 장반대인가요?
모든 부활은 어떤가요? 초자연적 이적이기에 '무용'하다는 말인가요? 현대의 이적,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고 안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어떻게 됩니까? 이적을 믿지 않는데도 구원과 부활은 보장되나요? 이 모순된 논리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이적, 그리고 정반대로 믿음과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는 표적을 가리고 헤아릴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균형을 갖춰야 합니다.

아울러 순수한 동기로 하는 참된 성령님의 이적과, 나쁜 뿌리와 어젠다를 지니고 빌려 행하는 권능(마 7:22,23)과 구분해야 합니다. 신사도운동 같은 경우, 아무리 자기네가 옳다고 떠들고 주장해도 그들의 어젠다가 상호신격화, 명사화, 거짓예언을 일삼고 주권운동에 개입된 한은 하나님의 권능을 이용하고 편승(hitchhiking!)하는 것 밖에 되지 않지요.

물론 기독교는 이적과 표징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맨날 매번 이적과 표징에만 치우쳐선 안됩니다. 성경의 나머지 교훈들도 다 지키고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적과 표징을 전혀 행하지 않고 기대하지도 구하지도 않는 것은 건강한 믿음일까요....? 오히려 불신일 뿐입니다.

이적과 표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채널이요 미디엄입니다. 
성령님은 크리스토를 증언하러 오셨고, 교회에 권능을 주신 것도 나타내시고 증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파울은, 교회에 권능과 은사 등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유익을 위해서"라고 명시했습니다(코A 12:7).

이적/표징/은사 중단론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초기교회에 유익했던 것이 현대엔 무익해졌냐는 것입니다. 어제 유익하던 게 오늘은 무익하다고요..?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으신 주 예수 크리스토의 영이신 한 분 성령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입니까? 그런 분이라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권능이 필요했거든, 하물며 마귀와 졸개들이 더욱 더 발악하여 더욱 타락해지고 더욱 더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초기교회보다 더 많이는 혹 아니라도) 그들과 같은 권능이 필요하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요? 초기교회 신자들에게 필요했는데 현대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 근거를 둔 걸까요?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또한, 올바른 이적과 올바르지 않은 이적을 구분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올바른 이적과 올바르지 못한 이적을 성경 상으로 구분해 봅시다.
다음은 올바른 이적이 거짓 이적에게 승리한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행전 8:5-13, 19:11-17
    
또한 올바른 동기를 위한 이적과 그른 동기를 위한 이적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음은 그릇된 동기를 지닌 이적의 예입니다.

마태복음 7:22,23

세상 시스템에다 '하나님의 왕국'을 구현한다고 주장하면서 서로의 영광을 구하고 신격화, 명사화 하는 신사도운동의 예 같은 경우지요. 또 큰 권능이 하나님의 것이기보다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입니다(참조: 코린토B 4:7). 그런 행실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임수의 일꾼일 수 밖에 없습니다(코B 11:13).  

이런 것들만 조심하고 내 영광, 우리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우리는 거룩한 이적과 표징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이해에 균형을 잃지 말아야 바람직합니다.

사도 파울은 신령한 것을 추구하고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단론자들은 "노! 추구해선 안 돼. 다 끝났어." - 이렇게 말합니다. 가히 반항적/도전적 태도가 아닌가요?

코린토A 13:8b-11에 근거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학학설 색안경을 벗고 12:31..(13장)..14:1이 전개돼 가는 연결을 유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이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께닫게 됩니다. 

"성경은 다 옳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해 보시길 권합니다.

1. 히브리서 13:8에서..늘 변함 없는 하나님 인식하기 
2. 행 2:17-21의 전체 문맥을 읽고 요엘이 말한 '말세'가 2000년전 오순절 때만인지 현대도 포함하는 말세인지 헤아리기
3. 코린토 13:10의 '온전한 것'이 과연 기록계시의 완성을 말하는지, 예수 크리스토의 재림인지를 가리기


독자들은 모두
성경대로 믿는 순수한 이적적, 표징적 신앙을 갖게 되길~!

나자렡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