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요일 2:4-5] 인류애? 아가페? (경배도우미)


Original graphic from crosscards.com

    "그분(예수 크리스토)을 안다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사람이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되기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는 줄을 압니다." (요한서신A 2:4-5 사역)

오늘날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외침을 많이 듣습니다.

최근의 한 통계를 보면, 한국교회가 사회에 점수를 많이 깎였다고들 합니다. 주된 요인은 교회가 사회에 대한 기능을 제대로 못 다 했다는 주장.
그런데 교회는 본래 사회에 적응하거나 사회에 칭찬을 받으려고 태어난 존재는 아닙니다. 올곧고 참되려고 몸부림하는 교회는 기실 (도덕적으로 잘못하지 않는 한에서) 사회의 박해를 받는 존재임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교계 안에서도 제 구실을 못 하는 경우인데.. 예를 들면 당연히 해야 할 교우들 구호를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세상이 좋아져 간다고는 하나 아직도 세상이나 교회엔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중대형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도 그들의 자존심이 너무 강해 돕기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경우 교회는 돕는다는 요란한 광고를 하지 말고 이름도 빛도 없이 조용히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냥 자존심이 강한 가난한 교우들은 때로는 사랑의 도움과 섬김을 받을 줄도 아는 게 겸허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건 그렇고..사랑, 사랑,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 특히 교인들 가운데서는 진리에서 벗어나 인류애만 강조한 사람들을 참된 사랑의 사역자인 양 존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빈민의 어머니 격으로 떠 받들려온 고 테레사 수녀,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고 헨리 나웬, 람바레네의 고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엉터리 크리스천들이었지요! 그들에게선 비진리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화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참 사랑의 뿌리를 모른 채, 겉으로 드러나는 인류애나 휴머니즘, 언론 매체가 부각시켜 온 사례들을 사랑의 참 표본으로 삼기가 쉬웁니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신자들까지 그러고 있는 경우를 자주 발견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손에 가까운 성경 속에서 참 사랑의 뿌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무시하는 소치이지요.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어디로서 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야웨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크리스토를 땅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심으로써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극진한 사랑의 절정, 결정체를 역사 속에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배신한 인류와 다시 화목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적인 사랑, 곧 아가페입니다.

요한과 아가페

예수 크리스토는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시려고 땅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특히 열 둘 가운데 가장 막둥이 제자/사도였던 젊은 요한을 통해 교회와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가장 사랑하셨기에 사랑의 계시를 제대로 전달하리라고 믿으셨고 요한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 크리스토 안에 구현된 하나님의 위대한 아가페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요한 서신은 사랑 이야기로 가득찬 뜨거운 편지의 하나이지요.

요한은 주님의 공사역 3년간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늘 넘치게 받고 있음을 적극 의식하며 살아 갔습니다(예: 요복 13:23, 19:26, 20:2, 21:7,20). 마치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의식할 때 긍정적 인생관을 갖듯 말입니다. 그는 주님의 최측근인 페트로/야코보/요한 중에서도 주님과 가장 가까이 지낸 셈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고난/죽음 전날 밤, 만찬석상에서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 정겨운 모습은 유대인들의 관습상 식사 때 비스듬히 누웠기에 자연스럽게 펼쳐진 정경이기도 합니다만, 그만큼 요한이 허물 없이 주님과 가까이 지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페트로는 주님과 요한의 그런 특별한 사이를 알기에 특별한 시점에 특별한 주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더욱이, 주님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시던 때에 십자가 아래 바짝 다가간 유일한 제자였지요.
그 요한에게 주님은 유언 같은 부탁을 한 가지 하십니다. 즉 어머니 마리아를 대신 돌보고 부양하라고 간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날부터 요한은 명실공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받들어 모십니다. 이것은 아가페 사랑 실천 계시의 일부임은 두 말 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면 남의 가족도 내 가족의 참 일원으로 받아 들여 조건 없이 섬길 때 참 아가페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받은 바 아가페 계시를 진정 표출하고 증언하는 때는 오순절 성령이 오시고 난 다음입니다. 즉 권능을 받은 후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자 요한에게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의 첫 열매인 사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는 평생 사랑의 계시를 전달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에게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구약 때부터 하나님의 양대 성품으로 강조돼온 사랑과 진리를 동시에 증거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인들은 주/야웨 하나님과 그 종인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인자와 진리, 곧 사랑과 진리를 늘 함께 자주 강조한 예를 우리는 발견합니다(예: 창 24:27,49, 32:10, 시25:10..등 다수). 

마찬가지로 요한도 진리와 사랑을 늘 함께 강조합니다(예: 요복 1:14).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동과 진리로써 합시다"(요서A 3:19) 라고 역설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과 함께 진리를 얼마나 강조했는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에서 두 개념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

무엇을 말합니까? 진리 없는 사랑이란 인류애일지언정 거짓 사랑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를 일부라도 거부하는 사랑은 그런 헛사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파울과 아가페

파울은 그의 '사랑의 시', 코린토A서 13장에서 아가페의 속성을 개념적으로보다 실천적인 면에서 웅변합니다. 그가 성령님의 영적 은사 및 사역 은사들과 방언에 관해 12장과 14장에서 언급하면서 그 사이에 사랑을 논한 것을 우리는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이 받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도 같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아가페 없이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성부/성자님과 한 분이시기에 같은 한 분 안에서 모순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과 권능/은사 등은 서로 모순될 일이 없다는 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빼 버린 권능은 기름이 빠져 녹슬어 버린 초라한 기계와 방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의 시를 갖고 아가페 아닌 인류애, 인본주의적 사랑을 논합니다만, 파울은 역설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코A 13:6b).
예수 크리스토가 유일한 구주이심을 부정하는 보편구원주의자들은 그래서 아가페 사랑을 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아가페를 말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재의 동성애를 허용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들 아가페 없이는 헛일, 헛수고, 헛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페트로와 아가페

부활하신 뒤 주님은, 한 여종 앞에서 주님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뒤늦게 통곡하며 회개했던 페트로에게 세 번 "그대가 날 사랑하나?"라고 물으십니다. 처음엔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었지만 페트로는 "주님, 저를 너무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자 마침내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그러면서 내 양들을 먹여라, 기르라(치라)고 당부하십니다(요복 21:15-17).

과연 성령의 권능이 임하자, 페트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함께 복음을 전할 만큼 담대해지고 사랑도 넘쳤습니다. 주님의 계시를 받아, 무할례자인 이방인-더구나 종주국인 로마의 장교-인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초대에도 기꺼이 응합니다(행전 10:1-11:18).

훗날 그는 그의 편지에서 하나님의 신적 성품의 일부로서 형제 우애에다 사랑을 공급하라고 교우들에게 당부합니다(페트로B 1:4-7 참조). 그러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토를 아는 데 게으르고, 열매 없고, 소경에 불과하여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죄를 정결케 해 주심을 잊어 버린 사람이라고 경고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있는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길입니다(같은 편지 1:8,9 참조)!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가페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하여 모든 성도에게 부어지며 삶 속에서 성령님의 열매로서 맺히고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증언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크리스토의 성품을 교회와 우리를 통해 끊임없이 증언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가페 사랑은 진리 없이는 작용되지를 않습니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예수 크리스토께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비진리를 저지르면서는 '사랑 실천'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no matter how hot(!) it is.. 천하고 세속적인 휴머니즘이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사랑! 사랑!을 외치고 부르짖고 떠드는 교계 명사들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고 반드시 성경에 따라 검증해 봐야 합니다. 과연 그들이 성경의 모든 진리를 100% 받아들이고 믿고 시인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사랑은 진리가 빠져 버린 헛 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우리 자신들도 과연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으로만 나타나는 아홉 열매의 첫 열매로서의 아가페 사랑을 진리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아니면 또다른 휴머니즘을 구사하고 있는지를 늘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늘 함께 갑니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기뻐합니다.
이 진리와 사랑의 절대 상관 관계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티엘티 독자들에게
성령님의 이 아가페 사랑과 진리가 넘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