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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요일 1:5-10] 회개와 용서의 진리(티엘티경배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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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곧,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듣고 여러분에게 알리는 소식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는 그분과 친교를 한다'고 하면서 어두움 속에 걷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시듯 만약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갖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자신들을 속이는 것,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면 그분은 신실하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터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하기를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니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서신서A=요일 1:5-10 사역)
 
신자의 삶에서 용서와 사죄의 은총만큼 좋은 것도 드뭅니다.

어린아이가 호기심으로 아빠의 서재와 서랍을 온통 뒤져 뒤죽박죽 만들어 놓았다가 돌연 귀가하여 이를 발견하고 눈을 부라린 아빠를 바라보는 심정은 "간이 콩 알"만 할 터입니다.
아빠가 야단과 호통을 치고 이윽고는 매를 들 때 울음을 터뜨리지만, "잘못했어요, 아빠!"하고 빌며 매달릴 때 아빠로부터 "괜찮아, 이젠. 하지만 다신 그러지 마?" 하고 모든 것을 용서 받는 순간의 기쁨과 안도감은 그 어떤 것과도 쉽사리 비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아이가 또다시 그러더라도 아빠는 용서해 줄 마음이 있고 용서해 주려고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훈련시켜 나아갑니다. 자기 자식이니까요.

세상에 숱한 종교들이 있지만, 참된 용서와 사죄의 기쁨은 오직 성경과 기독교로부터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엄한 단죄와 죽음, 그에 준한 형벌로써 모든 것을 마무리 하려 드는 무서운 보복성 율법 종교가 세상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크리스토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죄를 용서 받지 못하고 비슷한 수준의 같은 사람인 사제를 찾아 와 대안적인 '용서'를 받거나 매번 얇은 과자로 된 '크리스토의 몸'을 먹는 것으로 속죄를 대신하고 그것을 빌미 삼아 다시 세상에 나가 쉽게 죄를 짓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며 자신이 모든 것 위에 판단 기준이 되어 죄와 도덕의 경중도 스스로 측정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안위를 얻거나 참 신이 아닌 잡신들의 용서를 바라고 비는 저급한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 세상 종교에서는 용서와 속죄의 크나큰 은총과 평화, 그로 인하여 오는 참된 평화를 맛 볼 수가 없습니다. 

구약인들은 율법으로 단죄를 받고 제사로써 용서를 받았습니다. 피 없이는 용서가 없으므로 죄로 인하여 사람이 죽는 대신 짐승들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더욱이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경우, 흔히 율법 조항에 따라 응보형이 자행됐습니다.

그러나 구약 때도 무서운 응보 형벌만이 모든 범죄의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과실치사인 경우 도처에 있는 '도피성'으로 무사히 피신하기만 하면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지요. 또한 다윋 왕처럼 마땅히 죽을 죄를 짓고도 진정으로 용서를 빌 때 죄가 사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짐승의 피와 몸으로 대신하는 제사로써 사람들의 죄가 대신 사해졌습니다.
특히 일 년에 한 번 대사제가 온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몽땅 한꺼번에 전가한 짐승을 잡아 바친 후 지성소에 들어 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의 선언을 받을 때 백성들의 환희는 컸습니다.

또한 백성의 죄를 짊어진 '희생염소'를 광야에 내어 보내 맹수에 물어 뜯기게 한 예도 있습니다. 

이 모든 희생 제물은 바로 오실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님의 그림자였습니다. 피 없이는 용서도 없다는 원리에 따라 주님 자신이 피를 흘려 모든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다 치러 주셨기에 모든 속죄와 용서가 한꺼번에 이뤄졌고, 우리는 삶에다 그것을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행복을 누립니다.

'적용한다' 함은 첫째로, 내 죄로 인하여 영영 죽을 수 밖에 없던, 사실 상의 사형수와 다름없는 내가 단지 나 대신 죽으신 영원한 어린양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고 그분을 내 삶 속에 모셔 들임으로써 얻는 구원과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적용한다' 함은 둘째로, 빛의 자녀들답게 빛 가운데 행하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용서의 본질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화해(reconciliation)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란 것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정치와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 각처에서 '화해'란 것이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죄의 개념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죄를 밥 먹듯 물 마시듯 지으면서 '화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분은 홀로 순결하고 완전하고 거룩하시기에 어두움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에겐 따라 돌아 다니는 그림자조차 없습니다. 그분은 죄를 그냥 두실 수는 없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모쉐에게 율법을 몽학스승으로 내려 보내어 죄를 죄 되게, 죄를 죄 답게 단죄하십니다.

반면 세상의 많은 잡신들에겐 여러 가지 복잡한 칼러의 명암이 따라 붙어 다닙니다. 빛인지 어둠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모호한 성격이 잡신들의 특징이지요.
소위 '관상'(contemplation)의 대상인 '신'이 그렇습니다. 관상의 대상인 '신'은 죄와 속죄, 구속과 용서를 도무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라도 '신'과 만나기만 하면-도통하여 경지에 이르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관상가들은 거의 누구나 보편론적 구원관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죄와 어둠을 갖고서는 근접할 수 조차 없는 분이십니다! 관상가들의 근접하지 못할 대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한다"고 말만 하면서 실상 어둠 속에 걷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장이가 되고 맙니다. 진리와 참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러기 쉽습니다.
어둠 속에 걷고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 더구나 회개도 않으면서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속이는 예와 때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요! 자기기만인 동시에 상대기만이지요. 결국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영광을 가리는 셈이 됩니다. 뉘우치고 돌이키지 않고 그런 행실을 지속할 때, 거기 걸맞은 썩은 열매들만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놀라운 은총과 영광에 참여해 온 그분의 아들딸 답게 빛 가운데 걸어가야만 합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결코 버리쟎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라는 찬송가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사람으로서 빛 가운데로 걷기만 하면 캄캄한 죽음 골짜기로 걸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어 앞길을 환히 밝힐 수 있을 터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인 까닭이 그것입니다. 빛의 사람은 빛의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로만 행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 친교가 성립되고 지속됩니다. 또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세제가 세탁물의 온갖 더러운 때를 씻어 내리듯 우리의 온갖 더러운 죄를 씻는 '세제'-cleaning agent는 오직 참 어린양이신 예수 크리스토의 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친교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은..죄를 지었으면 죄가 있다고 그 분 앞에서 시인, 고백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허리에 질끈 동여 맨 진리의 띠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굵고 두꺼운 가죽 혁대가 중요한 척추를 비롯한 우리의 몸을 지탱하고 받쳐 주듯 진리가 우리 삶의 중추를 지탱시켜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짐짓 "죄가 없다"면서 죄를 숨기고 어둠 속에 걸을 경우, 진리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우리 인간의 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입의 기능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도 찬송이고, 기도도 기도이고, 복음전파도 복음전파이고, 위로도 위로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과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기능도 중요합니다.

모든 입은 결국 궁극적으로 상급이나 심판을 받는 최후 순간까지 고백과 시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 자체가 마지막 날 스스로 하나님께 자백하는 자동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치 거듭 나 성령침례를 받은 신자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고백하듯 말입니다.

다음 노래의 뒷 부분처럼 말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 무덤에서 살아나신 나의 주
   모든 무릎과 모든 혀마다 주 예수 시인하리라

   He is Lord, He is Lord, He is risen from the dead and He is Lord;
    Every knee shall bow,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신자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지은 죄를 그때 그때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마치 속을 토해 내듯 깊이 숨은 죄를 토설해 내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더러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즉 모든 죄에 대한 용서와 우리를 보호하고 덮어 주는 크리스토의 의가 '도매금'으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거짓말장이일 뿐더러 우리가 믿는 하나님까지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셈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진리로서 지탱하고 내주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흔합니다. 드물지 않습니다. 그렇게 거짓말장이로 그럭저럭 살다가 그럭저럭 가는 것이지요.
어차피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밀과 가라지,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알곡과 쭉정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교인이라고 해서 다 참 신자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지도자들과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계 명사라고 해서 다 의롭고 거룩하고 참된 줄 알고 명사라면 무조건 믿어주고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흔하지요. 그들이 그럴 듯 하게 쓴 책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음이 동하여 금방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계 명사들 가운데는 양처럼 보이지만 양의 껍데기만 쓴 사실 상의 늑대들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고 순진한 양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뱀처럼 슬기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역자들, 많은 교인들이 죄를 숨기고 어둠 가운데 살아감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과 친교가 끊긴 가운데 스스로도 거짓말장이, 하나님도 거짓말장이로 만들어 가며 살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합니다.
지금 바로 나 자신, 우리 자신들이 그렇지는 않은지요..   

본문인 요한서신A 1장은 10절로 그치지 않고 2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성경의 장/절 구분은 후대에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요한이 본 서신서 앞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대신 말해 주실 대언자 예수 크리스토가 계십니다.

예수 크리스토는 우리의 하늘 대사제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한 화해의 제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계명(진리/사랑)을 지킴으로써 세상이 우리가 크리스토를 아는 것으로 알 것이며..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장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
우리가 그분 속에 있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거한다, 살고 있다는 사람들은 그분이 몸소 실천해 오신 대로 자신도 행할 것이 요청됩니다.

오늘날 저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이 주님이 행하신 대로 몸소 실천하기를 열망하며 살아 가렵니다. 여러분 역시 그런 모습이길 저는 열망합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속죄의 은총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
성령님의 기름부음과 이끄심이
티엘티 형제자매들께 항상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