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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약 1:6-8] 절대순종의 믿음 (티엘티경배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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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슬기로운 우리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의 신이신 하나님
계시의 신이신 주님
오! 모든 존영을 홀로 받으소서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
영리하고 꾀많은 사람들
철인, 학자, 현인이라는 사람들을 젖혀 버리시고
차라리 어린이들에게 계시를 보여 주시는 하나님

지식의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
메네메네 테켈 우파르신-그 말처럼
하나님은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저울질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
주님 말씀에 100% 복종하는 사람
그 음성에 전심으로 귀 기울이는 사람을
두루 찾으십니다

믿음의 비밀은 여기!
주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들에겐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겐 드러내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도 주님이 보여 주신 계시 앞에서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게 하소서
어린아이들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도화지마냥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의 손가락이 쓰시는 대로
주님의 손길이 보여주시는 대로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통째로 믿게 하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드리길 원합니다
바치길 원합니다

받으소서
나의 삶을
나의 생명을
나의 시간들을
나의 세월들을
나의 주변들을
나의 가족을
나 가진 모든 것
나의 소유를 

주님 받으소서
주님께 맡겨 드리길
원합니다

나의 전체
나의 온 존재를
주님
받으소서
이끄소서
주관하소서
다스리소서!

나의 영
나의 혼
나의 몸
나의 세포세포
나의 마디마디
나의 오장육부
나의 전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사온대
내가 어디로 가리까?!
주님께로
주님께로
아버지께로!

내가 늘 귀착하길 원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날 붙드소서
이끄소서
사로잡으소서

주님의 슬기로
주님의 지혜로
주님의 계시로
나를 붙드소서
이끄소서
다스리소서

[349장 후렴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내 모습 이대로
   날 위해 죽은 예수님, 날 받아 주소서

[다시 한 번]

   내 모습 이대로 내 모습 이대로
   날 위해 죽은 예수님 날 받아 주소서

[4절입니다]

   오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립니다
   주님의 일을 이루사 날 받아 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내 모습 이대로
   날 위해 죽은 예수님 날 받아 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도
사랑하시고
받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이젠
주님의 말씀도
주님의 계시도
있는 그대로
가감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변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믿으렵니다

오 성령님!
그렇게 믿게 하소서


[ 찬송가 425(옛 217)장입니다. 원시에서 그대로 옮긴 가사입니다. ]

    주 뜻대로, 오! 주 뜻대로! 주님은 토공, 나는 진흙
    주 뜻대로 날 빚으소서 나 기다리며 바랍니다

    주 뜻대로, 오! 주 뜻대로! 날 찾으시고 살피소서
    눈보다 희게 씻으소서 주 앞에 머리 숙입니다

    주 뜻대로, 오! 주 뜻대로! 상하고 지친 날 도우사
    권능의 손길 펼치소서! 날 어루만져 고치소서

    주 뜻대로, 오! 주 뜻대로! 내 삶을 모두 붙드소서
    성령님 가득 채우소서 주 함께 하심 보이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간구하시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바닷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시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 만사가 불안정합니다
.
       (야코보 서신서 1:6~8 사역)


믿어도 좀 센스 있게 믿지, 그렇게 무조건 통째로 믿냐?
그렇게 미련스럽게 믿지 말고 나처럼 좀 요령있게, 합리적으로 믿어 보라..

그런 말을 가끔 듣게 되지요?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따로-별도의 신앙표준이 있는 양, 그럴 듯한 신앙의 방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을 원하지, 어떤 정해진 규범이나 잣대를 따지길 싫어하지요. 포스트모던시대의 특징입니다만. 특히 미국 젊은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교회생활도 "나름대로" 해 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맘이지, 니 맘이냐..라는 내 방식, 내 스타일대로의 믿음이지요
사람마다 제 방식이 있어 천태만상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 시대 때에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판관들(=사사기) 기자를 보면, 여기저기서 네 번이나 똑 같은 말을 합니다.

"당시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에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눈에 옳아 보이는 대로 행했다. " (판 17:6, 18:1, 19:1, 21:25)

판관(사사)기-맨 끝도 이 구절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우리네 속담에도 "제 눈에 안경이다"란 말이 있지요. 남이 뭐라 하든 제 마음에 맞으면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이현령비현령 즉 귀에 매달면 귀걸이, 코에 달면 코고리라는, 풍자적인 한자성어와도 같은 뜻이지요.

그런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오늘날도 그런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젊은이들은 자기 믿고 싶은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계율이나 표준에 묶이길 싫어 합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종교적이 돼 가고 자칭 기독교인들이 80% 이상이나 됩니다만 과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냐..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믿는 표준이 다르고 제각기 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말 들으면 그게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 들으면 그 사람이 더 옳아 보이고..그렇습니다. 도무지 뚜렷한 판가름이 되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절대표준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No absolute standard, please.
요즘 세상에 절대란 게 어디 있냐..
절대는 절대로 없다..
이런 판국입니다. 

그래서 기록계시인 성경 말씀도 마구 무시돼 가는 세상입니다.
성경 해석도 제각기입니다. 제멋대로식, 엿장수 맘대로 식 성경해석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글자들 속에 명확한 뜻이 나타나 있는 것을 빤히 내려다 보면서도 영 딴 소리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지요. 

예컨대 방언에 관한 성경 교훈들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신자들에게(예!) 방언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피하고, 요리 틀고 조리 틀면서 기묘하게 빠져 나갑니다.
"비 사이로 막 가"라는 옛 유행어가 있었지만, 정말, 내리는 굵은 장대비 사이 틈을 비집고 살짝살짝 기막히게 빠져 나가면서 이런저런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굵은 빗줄기를 맞아 후줄근히 젖어서 가는 사람은 그저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우린 딴 건 몰라도 성경 말씀만은 "미련하게" 통째로 믿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달든 쓰든 가리지 말고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를 삼켜 먹는 무조건파가 돼야 합니다. 요령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잘 믿는다는 게 뭡니까? 한 마디로 어린이처럼 믿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드는 예화입니다만..어느 시골 집 아빠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얘야, 지붕 위에 올라 가서 박 하나만 따 오렴."

그러면서 아빠는 지붕에다 사다리를 걸쳐 줍니다. 옛날 시골집 초가지붕엔 큼직큼직한 박덩어리들이 달덩어리처럼 훤하게 많이 맺히곤 했지요. 너무 무거워서 지붕이 아래로 눌려 처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래서 아들은 익숙하게 성큼성큼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가 지붕 위에 냉큼 박을 하나 따서 끌어 안고 다시 사다리로 돌아 왔는데 아, 웬 걸..사다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갑자기 사다리가 어디로 갔을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래서 아빠가 소리칩니다.

"야, 박을 아래로 던져라! 아빠가 받을게."
아들은 조심스럽게 아빠한데 박을 내리던졌습니다.

"이젠 너도 뛰어 내려라! 너도 받아 줄게."

아빠가 팔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기다립니다. 아들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어 아빠의 품으로 훌쩍 뛰어 내립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를 받아 주시는, 있는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의 품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이들을 늘 사랑하시고, 그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있는 대로의 순수한 마음과 믿음을 주님은 귀엽게, 귀하게,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어린이와 같아야 합니다. 숨김 없이, 꾸밈 없이, unreservedly..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 그대로, 있는 계시 그대로를 가감 없이 믿어야 합니다.  

마치 그 사다리와 같은 내 생각, 내 방식, 내 꾀를 믿을 게 아니라, 믿고 뛰어 내리라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지붕 위의 박을 따러 올라 간 그 아들은 아빠가 시키는 대로 했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뛰어 내리라니까 그대로 뛰어 내렸습니다. 아빠가 받아 준다니까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어 드려야 합니다!
100% 믿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코보는 말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다 물결 같아서
바람만 불었다 하면 이리저리 밀려 뒤척거리며
흔들리고 요동질하는 모습과 같다고.

혹시 그게 지금 내 모습은 아닌지요. 너와 나-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린 정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진리를 신뢰하는 것입니까?
보증수표라고 꽉 믿고 있는 것입니까?
절대 보장되는 진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흔히들 말합니다. 기독교는 너무 쉽고도 너무 어렵다고.
왜 꼭 그렇게 믿어야 하냐고. 좀 적당히 믿을 순 없냐고.

그래서 교회보다는 절이나 성당 같은 데서 적당히 신앙생활 아닌 종교생활을 하려 듭니다.
요즘 그런 사람이 부쩍 늘지요. 

절이 얼마나 좋습니까..? 복잡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깊은 산 속에 들어 가서
겨울이면 뜨뜻한 아랫목 같은 사찰 방에서, 여름이면 곁에 냇물이 흐르는 시원한 데서,
밤이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스님이 두들기는 또로독똑 목탁소리를 음악 삼아  

마치 도를 닦듯 염불을 외며 신선놀음 하듯 절에서 지내는 게 편하고 좋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여러분. 거기 절대 진리가 있던가요?

불교는 나를 가장 중시합니다. 자아가 최곱니다! 겉으로는 적선도 하고, 자비도 베푸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엔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냥 자아가, 내가 곧 신입니다.
나 말고는 다 허무일 뿐.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하나의 무점
공허일 뿐. 불교엔 절대진리란 게 없습니다.

거긴 죄의 개념도 속죄의 개념도 사실상 없습니다. 그냥 내가 표준입니다. 내가 법입니다. 내가 좋게 생각하면 그대로 살 뿐입니다.
산이 좋아 산에 살고, 들이 좋아 들에 살고, 도시가 좋아 도시에 사는 삶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절대진리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 다른 표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는 삶이 곧 성경대로의 신앙생활이지요.

그런 것이 어린이 같은 마음입니다. 요즘은 어린이들도 너무 일찍 세상의 나쁜 영향을 받아
닳고 닳은 마음들이기가 십상이지만, 본래 어린이들의 마음은 어른보다는 순진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특징들이 있지요. 
주님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갖고 그분의 계시와 말씀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의심 없이, 불신을 버리고, 긴가민가하는 생각을 접어 두고, 있는 대로의 말씀을 100% 믿고 따르라는 겁니다.
행동에 옮기라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자꾸 의심하고, 요리조리 따져 보고,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하다 보면
마치 바람에 밀린 바닷물결처럼 돼 버립니다.

사도 야코보는 계속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뭘 아예 얻을 생각조차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내라는 것이죠. 세상의 흔한 신자들 과반수가 그런 식입니다.

주님도 그러셨지요: 도대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을 보겠냐고.
오죽하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이 그랬지요.
주님이 아무리 애써서 복음을 가르치고 진리와 생명의 길, 잘 되고 살 수 있는 올바른 교훈을 전해 줘도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거절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물 위로 걸어 가시는 이적을 보이셨더니
페트로가 부러웠는지.. "주님! 저도 주님 따라 물 위로 걷겠습니다." 합니다.
주님이 기특하게 보시고 "오냐, 걸어 오너라!"고 하시자, 페트로는 배에서 성큼 일어나 갈릴리 수면 위로
대뜸..발을 내디딥니다. 이럴 수가..발이 물 위에 수면 위에 짚입니다.

그리고는 한 발 두 발 걸어갑니다. 첨벙첨벙이 아니라 사뿐사뿐 물 위로 걷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때까지 여전히 물 위에 서 계신 주님 쪽으로 걸어갑니다.

"세상에~, 아니 저럴 수가!" 모든 제자들이 입을 딱 벌린 채, 눈이 뒤집힌 채 침을 삼키며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 봅니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물 위로 걸어 가던 페트로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 봤습니다.
물결이 높이 일렁입니다.  그러자 가슴도 두근거립니다.

갑자기 페트로는 바닷물 속에 쑥! 들어가 버립니다. 억~! 페트로가 비명을 올립니다.
몸무게 때문에 물 속 깊이 쑤욱 내려갑니다. 어푸어푸 합니다. 숨이 차고 물을 막 들이키게 됩니다.

"아고, 주님! 저를 좀 살려 주세요! 붙잡아 건져 주세요!"

주님이 얼른 물 위로 걸어 다가 오셔서 냉큼 그를 붙잡아 끄집어 내 주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 왜 의심했는가?"

여러분. 페트로가 왜 그랬나요? 왜 잘 걷다가 호수 물에 도로 빠졌습니까?
의심해서. 의심했기에. 그래서 페트로는 믿음 앞에는 의심이 곧 병이란 사실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믿음이 제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했지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의 약속 앞에 우리는 신실하게 우리의 온 존재를 바쳐야 합니다.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100% 믿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이치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믿으면 되는 겁니다.

아빠가 받아 주겠다고 지붕 위에서 뛰어 내리라면 뛰어 내리면 되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성경이 방언을 약속하고 은사를 약속했으면 믿음으로 받아 들이면 됩니다.
이러구저러구 자시고 할 게 없습니다. 그냥 믿으면 이뤄집니다.

방언을 하라고 했으면 방언하면 될 거 아닙니까? 방언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를 받는 지름길입니다.
교회가 성경대로 제대로 굴러 가려면 교인마다 각 자 은사를 받아야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누구나 거듭나 구원받고 성령침례를 받아 방언을 해야 은사도 찾아서 발견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관문인 방언부터 반대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은사를 찾거나 활용할 길이 없지요.

방언의 약속조차 의심한다면..이런 사람은 아예 주님께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냥 그런 대로 종교생활 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약속은 모두가 '예'요, '아멘'입니다! 세상 없어도, 딴 건 몰라도  
성경의 약속은 다 예스요, 노가 아닙니다. 성경말씀 앞에서는 무조건 예스여야 합니다!

요리조리 따져서 골라 믿거나  이것저것 의심하려면 '믿음 생활'이 아니지요. 신앙생활이 아니지요.
신앙이 뭐고 믿음이 뭡니까? 의심과 따짐이 기본바탕이라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이지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게 따져가며, 잔머리 굴려 가며 믿고들 있습니다.

그런 식의 삶은 두 마음의 삶입니다. 언제나 두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두 길을 갈 수 없는데도 '가자미 눈'처럼 양쪽 길을 보며 양쪽 길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입니다. 한 길이 아니고.
마음에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진이 나도 자칫 가랑이가 찢어지기 쉽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교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믿습디까? 회교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받아 들입니까? 천만예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약속을 다 믿습니까? 방언은 어떻던가요..?
교인들이 현대에도 방언이 있고방언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받아 들입니까?
믿고들 있습니까? 우리 교인들이 과연 그렇습디까? 

성경에 약속된 성령의 은사가 실제로 존재하며, 지금도 유효하다고들 믿습니까?

성경은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입에는 써도 일단 뱃 속에 들어가면 달디 단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받아들이긴 어려워도 일단 받아들이면, 내게 유익한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되 어린이처럼 믿어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 온 동네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비가 내리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의 한 교회는 하나님께 비를 간구하려고 산 위에 올라갑니다. 이를 테면 일종의 기우제랄까요.

그날도 쨍쨍 햇볕이 사정 없이 내려쬡니다. 모든 교인들이 땀을 흘리며 올라 갑니다.
그런데 한 소녀는 손에 우산을 들고 갑니다. 교인들이 깔깔 웃습니다.

   "야, 너 해가 쨍쨍한데 왜 우산을 갖고 왔냐?"

여러분. 교인들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구할 것이라면, 100%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아빠를 굳게 믿는 어린이처럼, 비가 올 걸 믿고 우산을 들고 가는 소녀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해야 합니다. 절대 순종입니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몽땅, 모두 절대 진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100%!


모든 티엘티 독자들이
이런 믿음을 갖게 되길
축복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