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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불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김삼


어제는 초파일이어서 불교계에서는 온통 축하 분위기였습니다. 기독교계를 본뜨는 건지 거창한 규모의 음악회 행사도 하고, 불승들은 때는 이 때다며 모든 언론을 설법으로 누비고 있었습니다. 매년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되어 갑니다. 

해마다 상투적으로 그래왔듯 정계에서는 어김 없이 정당마다 '불심 잡기' 내지 불자들의 표심 잡기에 여념이 없었고, 기독교인이라는 한국 대통령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누리에 퍼지길 바란다는 식의 정치아부성 미담(?) 내지 덕담(?)을 했다는군요. 그만큼 불교세가 커서이겠지요.

 


정작 중요한 것은 불교에 구원이 있느냐는 문제일 터입니다. 수 년 전, 기독교계의 한 명사는 어느 불교 관련 장소에서 특강인가를 하면서, 불교에도 나름의 구원이 있다, 그래서 자신은 불자인 동생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뒤늦게 기독교 언론에 문제로 회자되자, 자기 교인들에겐 오리발 내밀기 식의 다른 해명을 했답니다. 


불교에 구원이 있냐는 문제는 오래전 성철 '큰스님'의 고백으로 일단 결판 났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계와 주변에서 온통 존경을 받던 그 분이 싸탄을 찬양하는 찬가를 올렸기 때문이지요.(참고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G7Yc&articleno=7062290#ajax_history_home


그는 또 임종 당시 지옥 찬가를 읊기도 했습니다. 

    

성철은 1987년 4월 초파일에 일부 언론 지상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생각 악한생각 미운마음 고운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처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하게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 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결국 불교계와 정치계, 그리고 기타 사람들의 존중을 한 몸에 받던 성철 큰스님은 싸탄 마귀 숭배자였습니다. 헉~! 어째 이런 일이..?



성경에 의하면, 싸탄 마귀는 인류 타락 이후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고 저주 받은 대상입니다. 그후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따라 지옥 갈 대상을 고르는 도구로 쓰이고 있지요. 예수 크리스토님 안에서 택함 받아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싸탄을 따르지 않습니다. 


불교계엔 말과 이론뿐인 '윤회설'이라는 게 있지만,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힌두교와 불교에 공통된 윤회설이 혹여 진리라면, 힌두교도나 불도는 하루살이도 죽이지 말아야 하며, 고기는 절대 먹어선 안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순된 행위들을 하면서도 진리 연 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지난 겨울, 전철역에서 한 불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플랱폼에 오른 순간,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는데, 평소 흔히 보던 불승이었지만 그날 따라 이상하게도 내 속에 "오늘 네가 저 사람과 대화하게 될 것이다"라는 음성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마자 그가 대뜸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급행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아, 아직 오지 않았는데요."라고 답하면서 아까 그 음성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 불승은 성큼성클 걸어 저만큼 플랱폼 맨 끝 쪽에 가더니, 법복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도 몰래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열차가 오기 전, 그 음성에 순종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정중히 인삿말을 하면서 아까 그 음성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미소로 반색하면서 큰 소리로 "아, 인연이 있으면 다 그리 되는 법이죠!"라면서 불자 하나를 얻은 듯 싱글거리며 불도에 대해 이런저런 간접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열차가 와서 우리는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일단 내가 목사라는 새 정보를 알렸더니, 그는 한 순간 놀라워 하며 기독교에 대한 덕담을 잠시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중히 가로막고 내 말을 전했습니다. 

   "저도 불교에 관심이 없지 않았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믿습니다. 공자도 모하멭도 소크라테스도 석가도 다 죽었고, 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예수 크리스토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만은 비었습니다. 몸이 되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그분처럼 되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아, 그렇지요. 기독교는 부활을 가르치지요."라며 몇 마디를 더했습니다. 내 목적지가 다가올 무렵, 그는 자신이 버클리 공대를 졸업한 뒤-이번엔 내가 놀랐습니다-세상이 무상해서 중이 되어 해발 700m 지점의 한 암자에서 지내왔다며, 뒤늦게 자신을 찾지 말라 달라, 와도 못 만날 것이다고 귀띔을 했습니다. 


불교에 혹여 구원이 있다면, 성철 같은 분이 싸탄 숭배 노래, '지옥찬가' 따위나 읊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갈 길이 없고, 구원이 없기에, 싸탄과의 파트너슆 내지 동맹이나 추구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불교엔 진정 하나님도 없고, 메시아님 같은 구원자도 없으며, 따라서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없으면 지옥찬가 따위나 부를 수 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과 진리, 생명이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소."


사도 파울은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