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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책 '하나되는 기쁨'에 대하여



얼마 전 잠잠해지나 했던 책, '하나되는 기쁨' 이슈가 최근 관련 법정 투쟁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또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될 모양입니다. 이 참에 잠시 이 이슈를 다뤄볼까 합니다. 
 
책 '하나 되는 기쁨'의 이슈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첫째로, 이 책의 주된 바탕인, 구약 정경의 하나인 '노래들의노래'(아가서) 본문에 대한, 책 저자의 문자적/상징적/성적 해석이 개재됩니다. 즉 성경신학, 성경해석학, 정경관 등이 얽혀 있습니다. 

둘째로, 부부생활의 기초의 하나인 남/녀 성문제와 가정 사역, 성윤리 등이 개재됩니다. 따라서 미성년자들에겐 특히 민감한 이슈입니다. 

셋째로, 책 홍보/보급 과정에서 이단/사이비 이슈가 나오면서 찬반의 극렬한 대립을 보여 왔습니다. 여러 교계단체나 주요인사, 개인, 특히 기독교 언론들이 찬/반 양쪽에 서 있습니다. 


저자 양승훈 교수(필명 최희열 씨)의 의도는 좋았으나, 접근에 있어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한국교회 같은 유교적 성향이 강한 교계에서 이런 시도는 무리이고 시기상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되는 기쁨'은 제목도 좋고, 부부를 위한 성경적인 개념이며 책 판매시 처음부터 '잠금장치'를 하여 성인부부만 대상독자로 삼는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부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사랑보다 성애가 더 중시되고 거기 더 치중할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부의 하나됨과 기쁨이 성에만 있지는 않고, 오히려 아가페 사랑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신중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또 성에 대한 관심보다 신앙의지가 더 굳지 못할 경우, 이로 인한 불륜적 욕구가 전보다 더 발생할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되는 기쁨' 자체보다 그를 위한 철저한 성경적 방패막이의 필요성이 더 대두됩니다. 그런 점이 가정사역자들이 유이할 점이고 바로잡아야 할 향방입니다. 

양 교수가 예컨대 노래서에서 소위 '오럴섹스'('구강성교' 내지 성기 대 혀끝 애무)의 암시 등을 무리하게 도출하려고 한 것은 최근 웹의 미국교계 성향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웹엔 노래서를 성적으로 해석한 영문 글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것은 아직도 교계의 성도덕관념상으로 해결되지 않는 초민감 문제성 이슈의 하나입니다. 즉 크리스천 부부가 이것을 정상적인 성희의 일부로 삼을 수 있느냐는 이슈입니다. 
일부 구출(악령구축) 사역자들은 오럴섹스 중독증의 '악령'들을 구축하는 사례도 없지 않습니다. 이 악령들의 축출 징후의 특징 하나는 혀 날름대기입니다. 물론 부부 사이의 성희/애무의 일부로서의 수음도 중독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체장애인 부부의 경우, 정상적인 애무나 성교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극난한 사례도 없지 않습니다. 부부 단둘만의 행위를 누가 간섭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부부 사이에도 절도와 절제가 있습니다. 


둘째로, 본서의 실제 저술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를 적극 홍보해온 정동섭 교수는 성생활 분야가 너무 피폐하고 황량한 신자 현실 목도 등 자신이 확신하는 바의 가정사역에 대한 소신 때문에, 가끔 생각 없이 쉽게 접근하고 발언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정 교수는 과거 구원파 출신으로 정상 교계로 되돌아왔고, 이단비판 사역에 상당기간 관여해 오다 최근 전향적으로 현재까지 가정(화해)사역을 주로 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정교수를 포함한 이단비평가들을 강력 비난해 온 사이비/이단 세력과 일부 언론 등 이단옹호세력들이 이 책의 비판측 배후에 있습니다. 


우선, 몇 가지 확실시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가정사역은 필요하며, 특히 부부의 기초생활로서 성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불화/갈등/별거/이혼 등 수많은 부부 문제가 성과 연루됩니다. 

크리스천을 위한 성경적/신앙적인 건전한 '성생활 도우미' 도서는 희귀하며..아직도 필요한 실정입니다. 신자들 대다수는 성도덕관이 희박한 세속자료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는 거 그동안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특별한 형태로 주신 남녀의 성은 부부만을 위한 신성하고 고귀한 선물이며, 후대잇기의 기본틀이므로, 남용돼서도 안되지만 신자 부부가 평생 행복을 누리는 데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바탕요소의 하나입니다. 결코 천주교식으로 율법/금욕주의적으로 금기시하거나 지나치게 방만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평균수명은 길어지고 갈수록 고령화돼 가는 지구촌 사회입니다. 따라서 고령이라고 해서 성을 무시할 수 없으며 건강한 남녀는 누구나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평생 성을 즐길 수 있어야 바람직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도록 성과 출산을 즐기며 산 사람입니다. 

이런 신성한 부부의 성을 나날이 어뷰즈하고 난잡하게 만드는 현대 풍속도 문제이지만, 이중적/율법적/금욕주의적 또는 위선적 태도로 성을 혐오시하거나 독신주의나 (신체장애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성생활을 회피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참고 전도서.분방 금지). 

특히 오늘날처럼 LGTS 즉 남/여별 동성애, (성전환 등을 통한) 변성애, (이성애/동성애를 겸한 )이중성애가 점차 '정상화', '합법화' 돼가고 따라서 정상적인 후대잇기가 극축소화돼가는 이상(異常)사회 속에서 성경적인 부부관/성생활관은 절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성생활을 포함한 부부생활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하십니다(예: 신명기 24'5, 코린토A=고전 7'1-5,8-9). 어차피 성생활은 출산/대잇기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가 가장 문제시되는 이유 하나는 바로 하나님이 내신 창조원리에 따른 자녀출산/대잇기에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파울의 교훈을 독신주의로 크게 오해한 초기 교부들 다수를 포함한 일부 천주교/카톨릭교의 사제독신주의, 금욕주의자들의 성혐오적 태도와 아전인수격 성경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 사제들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즐긴 것을 볼 때 천주교의 사제독신제도는 구약종교만도 못한 이교적 관례입니다! [독신 사제의 상징물인 '로만 칼러'를 모방하는 일부 신교 목회자들의 관행은 더 웃기는 얘기입니다.] 

아무튼..그래서 이를 돕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전문성을 띤 가정생활과 가정돕기사역, 부부의 온전한 성생활의 필요성은 절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돕기와 도우미로 끝나야지, 특정 개인부부의 '침실 속 상황' 등 민감한 개별적 상황에 깊이 관여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이 매우 섬세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정돕기 사역의 성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자칫 "맨날 성을 즐기세요" 식으로 나아간다면 "성이 삶의 모든 것"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반대로 성에 관한 기초상식 부족으로 자녀출산 외에 아무 의미성을 찾지 못하는 크리스천 부부들의 문제점도 매우 중대하고 심각합니다. 극도로 세속화된 영상문화, 전자문화, '벗기기' 위주의 패션문화 등의 영향으로 날로 감각화돼가는 현대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아가페 사랑에 기초한 올바른 성경적 성관(性觀) 내지 성의식이 없이는 "아득"하거나 살얼음 같은 부부생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우 신중하고도 민감하게 회중 성인 구성원들 특히 부부의 건전하고 성경적인 성생활을 공개적 또는 부부들만을 위한 안전 중심의 특수환경적 선분 안에서 암시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 미혼성인남녀, 예비부부를 위한 마일드한 접근 연구도 필요하지요. 더 나아가 날로 성교육이 조기화돼가는 풍속도 속에서 미성년 신자들이 결혼까지 성적으로 바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성경적/교육적 배려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정동섭 교수 등의 가정사역은 성경적인 이상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 이슈와 대상(청중) 건에 있어 민감하기도 합니다. 
절대 필요한 것은 진리와 아가페의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크리스천의 성 이슈가 그리스 신화적 '에로스'의 원리에서 시작하면 그야말로 재앙일 수 있습니다.
성을 즐기지 못하는 신자부부가 너무 많다 해서 "무조건 즐겨라" 식 접근은 위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구약 노래들의노래서書(이하 '노래서')의 성경해석관에 대한 이슈입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유대경전의 하나로서, 고대에 유대인들의 유대교 회의인 '얌니아' 회의에서 정경으로 선정된 데 이어 구교, 그리고 신교까지 역사 과정을 거쳐 오늘날 신교의 29권 구약 정경 안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역시 구약인 에스테르(에스더)서와 함께 매우 민감한 권서의 하나이죠. 왜냐 하면 성경의 그 어떤 권서보다 남여의 이성적 사랑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다룬 데다 내용상 예호바(여호와/야웨)님/하나님/주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전혀 없고, 특히 신약성경에서 전혀 인용된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이 '인용'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간접적(?)/내적/해석적임] 물론 이 권서 말고도 인용되지 않은 권서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 권서는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노래서'는 (이해하기 쉽게 번역될 경우), 성숙한 어린이들을 포함한 사춘기 남녀들이나 일부 독신자들이 읽으면 다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노골적인 요소가 없지 않아서, 성경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 초기로부터 주로 광야신학적/수도원적/수사적/관상적 영성에 빠져서 (율법적) 독신주의/금욕주의/'청빈'주의에 침잠했던 초기-중세 이후까지의 카톨맄 교부/사제/수사들은 몸을 채찍으로 자해하는 등 되도록 성을 멀리하고 성욕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과정 속에서 '노래서'를 일방적인 풍유해석법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노래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크리스토님과 교회 사이의 사랑을 고도의 암유/은유로 기록한 성경으로만 취급되고 간주되어 온 실정입니다. 이 입장 대부분을 (본디 천주교 출신인) 개혁주의자들도 그대로 받아들였고, 비록 개혁가들이 결혼은 했더라도 심지어 부부 사이의 성욕과 성희 등을 여전히 악인 양 금기시하고 주로 출산을 위한 성생활만 강조하면서 행동/표면상 엄숙하고 '거룩'해 뵈고 단정하기만 한 부부생활을 오래도록 강조해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청교도주의 신앙 등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노래서'를 남녀의 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처럼 오직 거룩하게만 해석하는 오리게네스(+기타 '교부'들) 식 풍유해석에 치우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1. 결국 성경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성생활 도우미를 찾지 못한 신자들(특히 순진한 예비부부들)이 근본적으로 철저히 썩고 타락한 세속적 성 도우미 자료를 유일한 안내서/소스로 삼게 됨. 그동안도 그렇게 해온 상황이지만.
2. 특히 젊은 신자들에게 눈 가리고 아웅 식 거룩의식/위선주의를 자아낼 우려가 있음.
3. 노래서의 더욱 민감한 부분에서 성(聖)과 성(性) 의식의 도치/착각 현상 등의 혼동을 겪게 될 가능성이 있음. 
4. 교부식 풍유해석을 성경해석의 한 표준으로 삼게 될 수 있음.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해선 풍유해석을 경계하면서 이 권서는 풍유를 맘껏 허용하는 대(大)모순을 저지름. 
5. 성경을 남/여 신(神)들과 성이 개재된 신화로 착각할 위험성도 없지 않음. 

실제로, 사람을 신으로 여기려는 뉴에이지 사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신사도운동(NAR)은 본서를 크게 부각시키면서 마치 신자 한 명 한 명이 크리스토님과 '결혼'할 '신부'인 양 부각시킴. (신자 남성들의 성전환??)
그러나 성경에서 크리스토(어린양)님의 신랑됨과 새예루샬렘/교회의 신부됨은 고도로 영적인 상징일 뿐임. 결코 신자 한 명 한 명이 크리스토님의 아내가 되는 (회교식) 일부다처 내세가 아님! 내세에선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음(주님 말씀) '내세결혼관'은 오컬트와 비밀집단 영성의 영향을 깊이 받은 (새교회의 정신적 교주) 스베덴보리나 (스베덴보리와 이슬람교의 내세결혼에 영향을 받은) 몰몬교주 조셒 스밑 등의 사상임. 윌리엄 블래이크는 스베덴보리의 이런 사상에 감염된 시인/화가로 '내세결혼' 상상도를 그리기도 함. 


반대로, 노래서의 성적인 해석에 치중할 경우, 또다른 의미의 상징주의/풍유해석이 됩니다. 기존 풍유해석보다 좀 더 문자주의에 접근하게 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되는 기쁨'의 경우, 노래서의 부분부분을 낱낱이/일일이 성기 등 남녀 신체부위나 애무에 상징/적용할 구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어차피/아무래도 전통적인 정경의 일부로 내려온 성경 해석의 신성을 너무 쉽게 깨트릴 우려가 다분합니다. 그래서 노래서 자체도 그렇지만 그 해석은 더구나 '뜨거운 감자'라는 것입니다. 
이 뜨거운 감자를 자칫 잘못 다룰 때, 다치거나 델 수 있습니다. 양승훈 교수나 정동섭 교수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끝으로, '하나되는 기쁨'을 우려하거나 강력 비판해온 건전한 정상적 입장과, 또는 유감스러운 사이비/이단 및 옹호세력의 태도에 관해섭니다. 

전술했듯이 정상적인 비평 입장의 근거는 충분히 있습니다. 즉 신자성생활 가르침이나 가정사역이 좋긴 하지만, 무리수를 두어선 안된다는 검증적 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도 아니고 단지 가정사역을 위한 참고도서로 활용해온 홍보자에 불과한 정동섭 교수를 '음란교주' 운운하며 획일적으로 덤벼든 비판세력 배후에 숨은 이단 및 그 비호세력입니다. 그들은 '하나되는 기쁨'을 완전 문제/이단 도서로 찍어 제끼는 와중에 정동섭 교수를 마치 처음부터 저술에 관여한 양 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는 반대/비판 세력의 배후에 구원파가 "있다"고 감지/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뒷전에서 호박씨 까듯 성경을 함부로 해석해 왔으면서, 이런 호기(?)엔 성경을 가장 사랑하고 위하는 척 나서서 상대방을 짓밟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도나 생각, 태도는 크리스천답지 않습니다. 참 신자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신자나 교계 지도자라면 정 교수의 원수가 아닌 이상 그를 함부로 미리 단죄하기 앞서 먼저 그가 하는 말을 듣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성과 성은 완전 구분되는 양 말하면서 성을 강조하면 무조건 음란/이단으로 몰아가려는 획일주의적 태도가 여실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야말로, 섣부른 단죄를 지양한 주님의 태도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여성은 간음현장에서 잡혀와 합법적인 투석형을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 일촉즉발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돌을 집어 당장이라도 던지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과연 그들 자신은 다 무죄/투명한지 묻습니다. 
그들이 행동으로는 간음하지 않았을지언정 눈과 맘으로 간음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아마도 간음한 그 여성을 흘겨보며 가장 거룩한 척 씩씩대고 분노하는 그들 중 일부는 간음 현장에서 그대로 끌려나온 여인의 거의 벌거벗은 듯 흐트러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음심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열 길 물 속을 들여다 보면서도 누가 한 길도 안되는 사람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저 음란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쳐 죽이시오"는 말만 기다리던 율법주의자들. 그러나 뜻밖에 그들의 심장폐부를 찌르는 주님의 말을 듣고 다들 머쓱해져, 아무도 감히 돌을 들어 던질 생각을 못하고 하나씩 둘씩 돌을 놓으면서 자리를 떠나자, 주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대를 단죄하지 않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오."

유대인들보다 낫지만 주님보다 못한 우리는 지금 침 튀겨 가며 섣불리 남을 단죄하고 규탄하기에 앞서, 자신 돌아보기를 먼저 해야 할 처지입니다. 

양교수나 정교수에게 비판과 단죄의 투석형을 하기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의 말부터 충분히 들어주고 선도했어야 참 신자들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