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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막 11:22-25] 불필요한 성구들?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하나님을 믿으오!
내가 참으로 그대들에게 말하는데,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해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고 말하고 마음 속에 아무 의심 없이 말한 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이뤄질 것이오.
그러므로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오. 그대들이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받은 줄로 믿으오. 그럼, 그대로 이뤄질 테니."
(마르코스복음서/맑 11:22-25 사역)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책을 읽고 휴대하고 사용할 뿐더러 성구를 줄줄 외우기도 합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정성 들여 베껴 써서 복사본을 만드는 필사작업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씀 사랑' 현실의 뚜껑을 열어 보면, 실상 안팎이 많이 다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거의 '감상'만 할 뿐 실제로는 안 믿기 때문이지요. 솔직한 현실 아닐까요?

내가 살아 오면서 읽고 듣고 되뇌고 쓰고 해 온 수많은 성구들이 실제로는 내 삶과 별 상관 없는, '인연'도 없이 지내 온 부분들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 많을 터입니다.
어찌 보면, 그런 성구들은 내 삶에 덜 중요한 것 같고 불필요해 보이고, 특히 현실감이 적어 보여 나의 실생활에서 걸러내어지곤 하지요.

필자의 과거 경험과 추억에서도, 성경의 문학적/윤리적/도덕적으로 쉬워 보이고 만만해 뵈는 말씀들은 흔히 자신 있게 인용하거나 거론하면서도, 왠지 내 삶이나 주변 현실과 거리감이 있고 괴리돼 보이는 성구들은 눈으로 읽기만 할 뿐 생각에서 걸러 내곤 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 "떨떠름한" 성구들은 성경에 매우 많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이성과 지성, 선입견과 이론과 신학과 학식 등으로 성경 구절들을 걸러 내곤 합니다. 나의 머리 속엔 그런 여과기, 필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부분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마다 부담스러워지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 의혹스러워지곤 합니다. 현실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탓이죠.

오늘 이 메시지를 다루게 된 한 동기가 있습니다.
이곳과 더불어 아멘넽에 올려 놓은 저의 칼럼 아래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 칼럼에서 저는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한 폐결핵 말기 환자가 믿음으로 병이 나아 활기찬 생활을 하는데, 그를 위해 도움기도를 한 사람이 그의 완쾌를 축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한 것입니다. 다 좋은데 다만 엑스레이를 찍지 마라는 것, 그리고 혹 찍더라도 사진을 보지 말고, 혹 보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 하지 마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된 모습은 한 번이라도 보고 살아야 하지 않냐"고들 하도 권하자, 마지 못해서 "그래 그럼, 딱 한 번만이야" 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의문의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엑스레이 사진을 건넸습니다. 그는 사진을 들여다 보자마자 자기 눈을 의심하더니 그만 까무러치고 맙니다. 그 사진엔 자기 허파가 둘 다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화는 실화였습니다. 그 댓글 내용은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는 평소 우리의 이성에 이해되는 한도 안에서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이죠. 우리의 이성은 우리의 참 존재요 실존인 영보다는 육쪽으로 으레 기울어지고 치우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표하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 속으로 걸러내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 말씀이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 구체적으로 이 말씀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감히 일지를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어라"고 전제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해 냉큼 뽑혀서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마음에 아무 의심이 없이 말한 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이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또는 내 삶 속에서 그대로 적용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첩첩산중과 같은 복잡하고 긴 단계를 거쳐야만 할 것 같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인간이니까요.
아마도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주님의 말씀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을 지도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아니 나는..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이 산을 향해 뽑혀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령할 수 있는지요? 말로 그런 시도를 하기 앞서 머리 속으로 그런 생각이나 할 수 있으며..그 전에 그런 발상의 꼬투리라도 가질 수 있는지요?
오히려 내 머리 속으로 거부감이 오고 회의감이 오고 의심이 오지 않으면 다행스러운 상황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요.
바로 전 날 주님은 한 무화과나무 쪽으로 걸어가서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그 나무를 향해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고 선언하십니다.

당시 주님의 이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들음으로만 끝나선 안 되기 때문이죠. 말과 행동으로 실행하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엔 행동이 결부되며, 행동으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선언 결과가 이튿날 어떻게 됐습니까?
아침에 그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다가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 끝까지 말라 버린 것을 봤습니다. 페트로가 무화과나무를 가리키며 "라삐(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셨던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늘 본문 말씀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어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아멘으로 받아야 할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언급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분의 존재를 믿는다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존재-신존재-즉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단계는 믿음의 높은 단계가 아니라, 기독교교리의 기초이고 초보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히브리서 6장 앞 부분을 보면, 젖먹이가 젖을 먹듯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초보 단계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신앙들입니다.

갓 거듭난 사람이 일차적으로 믿어야 할 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조차 못 믿는다면 나의 믿음은 악령들보다 못한 초라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사악한 악령들조차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두려워 떨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죠.

바꿔 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조차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이란 것은 허울 좋은 종교신앙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도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 분이 계신다는 것과 그 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이 보상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많은 한글 번역 성경들이 여기서 원문의 '미스타포도테스'라는 낱말을 '상 주시는 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실은 일꾼이 마땅히 받을 대가를 갚아 주시는 고용주라는 뜻이 더 강하고 걸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이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믿음 없이 기쁘시게 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부족하고 외람되나마 간증을 하나 하렵니다.

    지난 2002년 가을..저는 며칠 간격으로 두 번 똑 같은 등대의 꿈을 꾸었고 그 꿈의 뜻을 곰곰히 곱씹어 보곤 했습니다. 저는 서둘러 교회개척을 할 생각을 했고 실제로 교회당 계약을 진행했고 창립예배까지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쩐 영문인지 불과 한 달만에 교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저의 판단 착오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지요.

저는 낙심하여 하나님께 매일 울부짖으며 매달렸습니다. 그 등대 꿈의 의미는 무엇이며 주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삶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인지, 아니면 현재와 같은 언론사역인지를 확실히 알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 뒤 제겐 이상스럽게도 그동안 해 오던 언론 사역 쪽으로 더욱 광역적인 문이 열렸습니다. 여기저기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밖에도 두 큰 단체의 언론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다른 도시의 한 유명 매거진 사에서 제게 지사장을 맡아 달라는 위임을 해 왔습니다. 제가 수락한 얼마 후 그 대표자는 제게 새 오피스를 책임지고 열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장 알맞은 오피스 자리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고 며칠 만에 그럴싸 한 건물의 한 방을 발견했습니다. 여러 모로 편리한 자리였지요. 저는 일단 대표자에게 알린 뒤 그 오피스 자리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수아가 예리코 시를 일곱 바퀴 돌 듯 돌며 방언으로 찬양과 기도를 했습니다. 오피스 자리 인근의 경찰서 밖에서 휴식하던 한 경찰관은 빙빙 도는 저를 이상스럽게 보는 눈치였지만 저는 미소로 반응했습니다. 

저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 주 후 오피스 임대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유대계였는데 서로 다른 8개 회사에서 이 자리를 신청해 왔다고 귀띔하면서 다른 회사들이 한결 같이 조건이 더 좋았는데도 이상하게도 제가 낙착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지요.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대표자에게 결과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후 본사의 경제 사정 등 내부 사정으로 회사 판도에 우여곡절이 생겼습니다만 구체적인 것은 제가 알 바 아니었고, 제가 다만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실은 당시 하나님께서 분명히 제 믿음을 보시고 제 간구를 들으시고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오피스 자리를 얻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확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소!"
    "네 믿음대로 되어라"고.
    "그대 믿음이 크오!"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영원한 진리이고 약속입니다.
천지는 변해도 그 분의 약속은 변함 없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믿고 안 믿고, 실천하고 안 하고는 우리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우리 머리 속의 필터로 하나님의 그런 약속들을 걸러내고 여과시킵니다. 날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 '교인생활'이라는 미명(?) 아래 포장된 적당한 종교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존 이상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비평해 온 프리메이슨들조차도 그들 나름의 '지고의 위대한 우주건축가'를 믿는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야 어떻든,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우리의 보상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가를 주시는 분 말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대하고 읽는 성구들은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인지요?
과연 우리 삶 속에 긴요하고 꼭 써 먹어야 하는 말씀, 그래서 믿음을 섞어 삶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말씀인지요?
아니면 그다지 '불필요'한 말씀에 불과한지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성구를 활용하는 것을 하나의 "도깨비 방망"이 식 주문으로 생각합니다. 번영주의/형통주의/성공주의/기복주의라고 온갖 유식한 용어를 써 가고 손가락질을 하며 "예수를 왜 그런 식으로 미신처럼 믿냐"고 힐난하곤 합니다. 

물론 잘못된 번영주의/형통주의/성공주의/기복주의도 없진 않겠지요. 오늘날 교회 타락상의 일부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런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 자신이 얼마나 성경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지 자연스럽게 의혹스러어집니다.
결국 그들에겐 오늘 본문 같은 말씀은 별로 불필요한, 사실상 별 의미 없는 말씀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뒷 부분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오. 그러면 그대로 이뤄질 것이오."

여기 주님 말씀에서 과거/현재/미래-3 시제의 조화가 있습니다. 즉 이미 이뤄졌다고 과거형이 된 것으로 현재에 믿으면,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는 3시제의 조화입니다. 이것을 저는 '믿음/행동/성취의 3시제'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한다는 말씀은 단지 엎드리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입으로 직접 대상을 명령하는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불가능의 산, 두려움의 산, 의심과 회의 불신의 산, 질병의 산아, 뽑혀서 바다에 풍덩 빠져라! 는 내용의 확고하고 과감한 선언이 포함됩니다. 믿되 끝까지,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믿고 선언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선언하고 명령할 때 우리의 입술엔 놀라운 권세와 권능이 작동하게 됩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입술과 혀의 권능과 권세를 말합니다.
주님이 몸소 말씀하신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할 때 마귀도 물러가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명할 때 그들은 굴복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을 믿고 그 분의 약속대로 믿는 우리에게도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사도 파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권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 분을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십니다.
단 육신의 욕심과 썩을 명예만을 위한 것은 구해선 안되겠지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거두기 위한 소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엔 신유도 포함됩니다.
풍요도 포함됩니다.
은사도 포함됩니다.
성경 말씀이 약속해 놓은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믿음에 따르는 입술의 고백과 행동의 실천이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안 믿는다면 주요 성구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성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그런 열매 없는 삶이 쌓이고 점철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별 의미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들은 커다랗고 수많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마치 40년간 온갖 이적을 직접 몸소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을 불신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 1세들 처럼.


티엘티 모든 독자들은
말씀대로 믿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열매를 맺어
그 분께 영광 돌리게 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