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막 16:9-20] 이 부분은 성경 아니다? [2]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순교자 폴뤼카르프의 제자 이레니우스와 순교자 유스티누스 등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맑 16:9-20을 지지했다.  

성경 아니다? [2]
- 마르코스복음서 '긴맺음'의 연대 순 지지 증언들

[ 이 글은 시리즈 첫 회를 보셔야 제대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군데군데 작은 숫자에 마우스를 대시면 각주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각주는 본문 맨 아래에도 나타납니다. ]

일찍부터 마르코스복음서(=한글성경의 '마가복음'. 이하 '맑'으로 표기)의 '긴맺음' 즉 16:9-20이 포함된 성경 사본들의 역사적 진정성을 시사해 주는 많은 기록과 증언들이 있다[각주:1].

다음은 5세기까지 9-20절의 존재를 지지 또는 간접 지지한 사람들과 문서를 연대 순으로 요약한 것이다. 물론 이 사람/문서들이 모두 철저히 성경 진리에 제대로 서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맑 16:9-20에 관련된 사안만 다루기로 한다. 
 

2세기(서기 100년대)

히에라폴리스[각주:2] 교계의 감독[각주:3]이었던 파피아스는 서기 110년 요셒 유스투스 즉 '바르사빠스'(행전 1:23 참조)에 관한 글을 썼다. 
바르사빠스가 독극물[각주:4]을 마시라는 강압을 받고 마셨으나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그(파피아스)가 파울의 경우처럼[각주:5] 맑 16:18을 염두에 뒀거나 바르사빠스와 함께 간접 입증한 셈이 된다. 파피아스는 또 마르코스가 페트로의 가르침을 일부라도 전혀 생략하지 않고 기록했다고 썼다.
맑16:18은 초기부터 전통교회의 많은 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됐었음이 엿뵌다. 그래서 더더구나 16:9-20의 '긴맺음'을 부정하려 했던 것. 그러나 우리와 성정이 같으면서 사도였던 파울이 성령의 권능으로 입증해 보였다. 즉 성령의 권능으로써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저스틴', 100?-165년)는 그의 '제1변증서'(제45장)에서 맑 16:20을 상기시키며 이 구절 원문의 낱말 '판타쿠'를 두 번 썼다. 그는 이 변증서 전체에 걸쳐 공관복음[각주:6]을 활용했다.

신약외경의 하나인 '에피스툴라 아포스톨로룸'(사도들 서신서, AD 150년 이전)의 구조는 엮은이가 맑 16:9-20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독일 신약학자 만프레드 호언슈가 분석했다.

유스티누스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이레니우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아씨리아의) 타티안은 4복음서의 내용을 단일화한 그의 '디아테싸론'(172년)에다 맑 16:9-20을 내포시켰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추정돼온 순교자 폴뤼카르프의 제자 이레니우스는 '대이단변증'(180년) 제3권 10:5-6에서 맑 16:19을 인용하면서 마르코스복음서의 뒷부분이라고 명증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각주:7]의 (현재까지 발견된) 문서들은 맑 16:9-20도, 마태복음 28장에서도 언급한 바가 없다.
그는 파피아스가 강조했지만 의혹시 돼온, (마르코스와 연관돼 있고 9-20절과 연계된) '페트로의 가르침'을 매우 높이 평가한 듯 보인다. 따라서 클레멘트는 맑 16:9-20의 존재를 몰랐다기 보다 의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후대의 카씨오도루스(6세기 인물)에 따르면, 클레멘트는 마르코스가 "'마르코스복음서'로 불리는 것 전체"를 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클레멘트는 맑 16:9-20을 인정했든 안했든 간에 마르코스가 썼음을 간접 지지한 셈이다[각주:8].
저술가/변증가였던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그의 '스코르피아체'[각주:9](212년경) 제15장에서 맑 16:18과 거의 비슷한 어구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테르툴리아누스 역시 9-20절 회의론자들의 방패막이로 가끔 쓰인다.

역시 이레니우스의 제자로 일각에서 추정돼온 로마의 저술가/순교자 히폴뤼투스(약170-236년경)는 그의 '사도전승'(230년경) 32:1에서 성만찬 참여의 긍정적 효과를 표현하면서 맑 16:18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217년경(?)에 쓰여진 '(사도) 아따이의 교리서'[각주:10]는 맑 16:15을 인용했다.

파퓌루스[각주:11] 사본인 'p45'(제45번)은 가장 최초의 마르코스복음서 사본이다. 심하게 손상돼 맑 16장 본문 부분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래리 허테이도 박사[각주:12]는 p45의 103개 부분을 비교한 결과 '워싱턴 사본'(Codex W)[각주:13]과의 연결성을 발견했다.

오리게네스(오리겐)는 맑 16:9-20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래서 '긴맺음' 회의론의 '간판 마담' 격으로 내세워지곤 한다. 그의 '대 켈수스 반박' VII:17, 필로칼리아 제5장 등에서 맑 16:17,20을 논급한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다.

고어체 라틴어 사본 '코덱스 모나켄시스'와 기타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3세기 중엽의 것들로 맑 16:9-20을 뒷받침 한다.

티바리우스의 빈켄티우스(258년경)는 제2차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맑 16:15-18을 대충 인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작자미상인 '데 레밮티스마테'[각주:14](258년경)에 맑 16:14이 사용됐다. 일각에서는 카르타고 감독 퀴프리아누스(258년 별세)를 저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퀴프리아누스는 '긴맺음'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4세기

'클라로몬타누스 사본'[각주:15]의 티투스 서(한글 '디도서') 뒤에서 발견되는 목록[각주:16]엔 각 권서(券書)의 줄(行, 한 줄 당 16 철자)수가 기재돼 있다. 마르코스 복음서는 1,600줄이며 따라서 16:9-20이 포함됐다는 추산이 가능하다[각주:17]

반 (反)기독교 인사 포르퓌리(270년경)와 그 제자 히에로클레스(305년경)가 기독교 반박 용으로 맑 16:18을 인용한 바 있다. 훗날 마카리우스 마그네스가 그의 '아포크리티쿠스'('응답'[각주:18]. 약400년)에서 포르퓌리/히에로클레스에게 반박했다.

앞서 첫 회에서 비쳤듯, '짦은맺음'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취급돼 온 바티칸 사본의 필사자(325년 이전)는 다른 사본을 참고하면서 맑 16:8 이후에 공백을 남겨 두었으며 이 여백은 9-20절의 길이에 맞다. 

'마리누스'란 인물(290-340년)은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각주:19](290-340년)에게 마르코스복음서와 마태복음서를 조화시킬 방법을 물으면서 맑 16:9의 진정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마리누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란 학설도 있다.

유세비우스는 '짧은맺음'의 대표적 변증가의 한 사람으로 부각돼 왔다. 더구나 교회사가였기에 더 힘을 받는다. 그는 '아드 마리눔'[각주:20]에서 마태복음 28:1과 맑 16:9 사이의 표면상 모순점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한 기독교 변증가를 그리면서, '정확한' 사본들과 '거의 대다수' 사본들이 마르코스복음서를 16:8로 "끝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맑 16:9이 어떻게 28:1과 조화될 수 있냐도 설명하는 자체 모순도 보였다. 그는 16:9을 인용함으로써 9-20이 포함된 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을 자증한 셈이다.

바티칸 사본처럼 '짧은맺음'을 한 최초기 사본인 시나이 사본(약350년경)의 필사자는 맑 14:54로부터 루카복음서 1:56까지를 기록한 '대안 지면'(replacement pages)에다 맑 16:8 뒤에 독특하게 강조된 장식 문양을 삽입, 그 뒤에 추가본문이 있는 사본들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마세아 감독/주교 아스테리우스(380-390년)를 '긴맺음'의 확실한 증인이었음을 연합성서공회(UBS)판 신약 원문 성경에서 인용됐다.

페르시아의 아씨리아인 아프라핱[각주:21](약270-345년)은 그의 '제1논증' 17에서 맑 16:17,18 두 절을, '논증' 20에서 16:20을 각각 인용했다.

고트 족(Goths) 주교/선교사/성경번역가인 울필라(310-383년경)가 고트어(Gothic)로 번역한 '고트 성경'[각주:22](350년경)의 마르코스복음서는 '긴맺음'을 하고 있다. 울필라는 341년 안티옼 주교로 선임된 것으로 알려진다.

포이티에 주교, 천주교 박사인 힐라리우스(300-368년경)는 침묵함으로써 긴맺음을 간접 지지했다.

'큐어턴[각주:23] 쉬리아어[각주:24] 사본'들(350년 이전)과 에짚트 콮팈어로 된 보하이맄[각주:25] 역본들(350년 이전)은 '긴맺음'을 지지하고 있다.

시리아의 에프렘(370년경)은 '디아테싸론'을 인용, 맑 16:15a를 자신의 찬송가에 사용했다.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스칼리아 아포스톨로룸. 300년 이전)에서 영향 받은 '사도들의 관례'(380년)도 '긴맺음'을 지지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는 라틴어 성경 '불가타' 복음서 개정판(384년)에 맑 16:9-20을 포함시켰다. 그는 복음서 서론, 그리고 마르켈라에게 보낸 서신에서 개정판을 위한 고대 그리스어 사본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이기도 한 밀라노 감독 암브로시우스(374-397년)는 맑 16:9-20을 반복 인용했다.

기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약347–407년경)의 '성구모음'(360년 이전)은 부활절/승천기념절 등 주요절기에 사용된 본문에서 '긴맺음'을 활용했다. 그는 또 훗날 코린토A(=고전)서 강해 제14강 제2부(코A 4:19을 다룸)에서 맑 16:20을, 제38강 제5부(코A 15:5 해당)에서 맑 16:9을 각각 인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50년여 교리학교 교장을 지낸 '맹인 디뒤무스'(약313–398년경)의 저작물로 추정돼 온 '데 트리니타테'(성삼위일체론, 390년) II:12에서 맑 16:15,16이 인용됐다.    


5세기

세 번째로 중시되는 초기사본(코덱스)인 '알렉산드리아사본'(400년)은 긴맺음을 했다. 

살라미스의 에피파네스(400년)는 긴맺음을 지원한 경우라고 홀트[각주:26]가 지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은 그의 '(4)공관복음서'에서 맑 16:12 주석에다 그리스어 사본을 인용했다. 

마카리우스 마그네스는 '아포크리티쿠스'(405년)에서 맑 16:18을 인용, 은유적 해석을 시도했다.

히에로니무스(제롬)는, 이교도 여사제 출신으로 성경을 열심히 묵상한 갈리아 지방의 헤디비아(또는 에디비아) 여인에게 보낸 편지-'아드 헤디비암'(407년)에서 '마리누스에게'의 내용을 대충 요약했다. 그는 또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대응'(417년)에서 맑 16:14을 인용, (훗날 '프리어 문구'로 불린) 문제 부분의 위치와 함께 이 문구가 든 그리스어 사본들에 관해 언급했다.   

앞에서도 비쳤듯, 주요 4복음서 사본들(코덱스)의 하나인 '워싱턴 사본'(400-425년경)에 ('프리어 문구'와 함께) 맑 16:9-20이 포함됐다.

쉬리아어(아람어)로부터 일차 번역된 뒤 그리스어 사본들에 맞게 철저히 개정된
'아르메니아 역본'(430년경)들을 옮기면서, 역자들은 맑 16:9-20을 어떻게 다줄 지에 관해 엇갈린 것으로 추정된다.

표준 쉬리아어 역본인 '페쉬타'는 맑 16:9-20을 포함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구모음'(430년전)은 당대 북부 아프리카에서 맑 16:9-20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부분을 반복 인용한 바 있다(400년경).

광야교부의 한 명인 신학자 요아누스[각주:27] 카씨아누스는 그의 '성육신에 관하여' 제VII권(430년)에서 맑 16:18을 언급한 듯 하며, 같은 권 제20장에서는 16:17을 사용했다.

필맆 시데테스는 요셒 바르사빠스가 독액을 마신 뒤 무해했다는 파피아스의 증언을 재진술(430년), 맑 16:18을 상기시킨다.

알렉산드리아 정교회 (고대) 교황 퀴릴(378-444년경)은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비판, 퇴위시키면서 네스토리우스가 인용한 16:20을 재인용했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제자로 알려진 마르쿠스 에레미타는 맑 16:9-20을 지지했다(430년).

아일란드의 '성' 패트맄[각주:28](약390–460년)은 맑 16:15-16을 인용했다(450년경).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 '아퀴테인의 프로스페르'(390-약455년)는 '만국의 부름' II:10에서 맑 16:15을 인용했다(450년경).

로마 주교 대(大) 레오는 서신120 '퀴루스의 테오도레에게'에서 맑 16:16을 사용했다(453년경).

칼뱅의 동역자 베자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기증한 '베자 사본'(400년? 500년?)엔 맑 16:9-20이 포함돼 있다. [각주:29]
 
아르메니아 주교였던 '골브의 에즈닠'은 그의 '종파들에 대응함'의 '하나님께'(데 데오. 450년경)에서 맑 16:18을 사용했다.

라벤나 주교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약380–450년경)는 맑 16:12을 사용한 것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카테나 아우레아'에 기록돼 있다.


이상에서 보듯, '긴맺음' 지지 증거는 압도적으로 많으며..'짧은맺음'을 지지/변증하는 듯 보이는 자료들도 실상은 '긴맺음'을 의식했거나 무시했거나 침묵했음을 알 수 있다. 

 

  1. '긴맺음'의 반대인 '짧은맺음'은 맑 16:9-20절 부분의 진정성을 의심해 삭제해 버린 사본 필사 방식을 가리킴. [본문으로]
  2. 현 터키의 파무칼레. 시리아의 히에라폴리스와는 다름. [본문으로]
  3. 참고: 천주교 측에서는 '주교'라고 불림. 천주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에 의해 카톨맄 제도 교회와 교권이 제대로 형성/성립되기도 훨씬 전인 1, 2세기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까지 마치 천주교 제도에 묶인 듯 아류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래서 필자는, 대체로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지역 교계 지도자들을 '감독', 천주교회가 승세한 그 이후 시대의 지도자들을 '주교'로 따로 구분해 부르련다. [본문으로]
  4. 필맆 시데테스의 훗날 주장에 따르면 뱀의 독액. [본문으로]
  5. 행전 28:3-5 참조 [본문으로]
  6. 서로 내용이 비슷한 마태, 마르코스, 루카스 등 3개 복음 또는 더 나아가 요한복음까지 4개 복음을 서로 조화시킨 저술물. [본문으로]
  7. 로마의 클레멘트와는 다름. [본문으로]
  8. 클레멘트는 '짦은맺음' 지지자들의 필수적인 방패막이의 하나가 돼 왔다. [본문으로]
  9. '전갈 독' 해독제로 전갈은 이단을 상징. [본문으로]
  10. 아따이는 주님이 파견하신 70사도들 중 한 명으로 훗날 에데싸에서 선교사역을 한 것으로 추정. [본문으로]
  11. 갈대 줄기를 찧어 만든 종이 위에 쓴 성경 사본. 종이를 가리키는 영어 '페이퍼'와 같은 어원이다. [본문으로]
  12. 스코틀란드의 에딘버러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본문으로]
  13. 4 복음서만인 '워싱턴 사본'은 미국의 철도기술자/수집가/박애가인 찰스 랭 프리어가 에짚트에서 발견한 5세기 성경사본. 그의 이름을 따 '프리어 복음서'라고도 불린다. 이 사본엔 맑 16:9-20 부분이 포함됐다. 단, 14-15절 사이에 딴 구절('프리어 문구'-Freer Logion-로 불린다)이 삽입/대체됐다. 현재 스밑소니안 박물관 부속관인 프리어 하우스에 소장돼 있다. 본문 나중에 다시 언급된다. [본문으로]
  14. 즉 '재세례논쟁'. [본문으로]
  15. 스위스의 칼뱅파 개혁가 테오도르 베자가 발견한 코덱스. [본문으로]
  16. '클라로몬타누스 목록'이라고 불린다. [본문으로]
  17. 커솦 레이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다. [본문으로]
  18. 원명 '그리스인들에 대한 독생자의 응답', [본문으로]
  19. 교회역사가. 이름의 딴 발음: 에우제비우스, [본문으로]
  20. Ad Marinum 곧 "마리누스에게 답함"이란 뜻. [본문으로]
  21. 그리스어로는 '아프라아테스'. 기독교 저술가로, 변증가/수사/수도원장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22. 역시 코덱스 사본이다. [본문으로]
  23. 영국학자 윌리엄 큐어턴 박사의 이름을 땀. [본문으로]
  24. Syriac 즉 아람어(Aramaic). [본문으로]
  25. 북부 방언 [본문으로]
  26. 성경번역가. '짧은맺음' 지지자. [본문으로]
  27. =요하네스 [본문으로]
  28. 아일란드 곧 에이레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초기중세의 선교사. 고대 현지어로는 '나옴 패드레익'으로 불렸다. 훗날 '팔라디우스'와 동명이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즉 '패트맄'은 2명이었다는 학설이 상당히 먹혀 들었다. [본문으로]
  29. 초기 필사자의 것은 맑 16:15 중반까지 남아 있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