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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General Topic

사랑과 진리 - 사도 요한의 대 명제

 



김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진리시다. 예수 크리스토를 유일하고 참된 메시아/구주/중보(Mediator)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이름만 빌려 '사랑' 한다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면, 헨리 나웬, 테레사 수녀, 알베르트 슈바이처 등이 그렇다. 그러나 진리를 벗어난 사랑, 진리가 빠져 버린 사랑은 인간의 사랑, 궁극적으로 거짓 사랑이며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스톨게/필리아 차원 이상의 사랑은 아니다. 인본주의/휴머니즘 차원의 사랑일 뿐이다.

'우레의 아들'

다들 알다시피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다. 주님께 가장 사랑 받아 각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사랑의 계시를 받았다. 요한의 계시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 주님께 길이 영광!

요한은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고 따라서 열 두 제자들 중 자연스럽게 막내둥이'/귀염둥이/응석받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형 야코보랑 둘다 성미가 불 같은 사람이었다. 주님이 제자로 부르시던 날. 형제는 반평생 고기잡이로 함께 생계를 이어 온 아버지 제베대, 삯군들과 함께 그물을 깁고 있다가 다 내팽개치듯(?)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주님이 수난을 굳게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앞서 준비하시려고 메신저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셨는데 [고대 분열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예루살렘 아닌 그리짐(그리심) 산에서 경배해 온]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께 퇴짜를 놓았다.

주님은 이전에 이곳 쉬카 마을에서 여인을 통해 전도하신 바 있어 어느 정도는 유대인들인 주님 일행과 사마리아인들 간에 면식과 화목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찾아 갔을 것이다. 따라서 단지 이 이유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은 세상 표준으로 볼 때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다.
이를 보고 [뭬야? 아니 이것들이 엇따가 감히..정도로] 발칙하게 생각한 형제가 벌컥 나섰다. "주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것들을(?) 그냥] 몽땅 불살라 버릴까요?"
말하자면 옛적 소돔/고모라 멸망 사건 같은 저주의 재탕을 주문하고 나선 셈이다. 물론 스승께 단단히 꾸지람을 받았다.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이 역시 믿음과 만용이 오벌랲된 형제의 좌충우돌형 성격을 대변한다. 사실 우리도 이런 만용을 부릴 때가 없지 않다.

당시는 열 두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나가서 신유/악령축출/전도 등을 행한 뒤로 헤롣 왕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승승장구로 의기양양하던 때였다. 또 '오병이어', 주님 '변화사건' 이후였다. 특히 모쉐와 엘리야까지 나타난 주님의 변화 사건은 수제자들 셋이서 직접 목격한 바였다. 말하자면 트리오를 트리오가 뵌 것이다. 이로 미뤄 보건대 이 때쯤 형제의 배짱은 고조될 대로 한껏 고조됐을 법 하다.

어느 날은 형제가 엄마와 함께 다짜고짜 주님을 찾아와 말했다. "스승님. 우리가 스승님께 요청하는 건 뭐든지 다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얼마나 막무가내인가! 웃음보가 절로 터질 정도로. 뭐, 주님한데야 당신의 든든한 '빽'을 굳게 믿는 두 제자가 비록 철 없고 어이 없어도 마냥 귀엽게(?) 보였다고 치자. 하지만 함께 지내 온 곁의 동료 제자들 보기엔 정말 당랑거철 식 '왕싸가지'가 아닐 수 없었다!

주님이, 그래, 자네 둘이 뭘 바라나 하고 정답게 반문하시자 형제는 바로 요 때다 하고 하늘나라 '좌의정'/'우의정' 자리를 요구해 동료 제자들의 질투와 원망을 엄청 샀다. 과연 현재 둘이 하늘에서 두 정승 자리를 나눠 차지했는지는 [필자 눈엔 안 보여] 알 수 없지만 둘의 배포/배짱 하나는 끝내 준다 할 만하다.

이렇게 "막 가는" 두 형제에게 주님이 붙여주신 별명이 '보아네르게'(우레의 아들들). 복음서를 면밀히 살피면 주님은 늘 고차원의 유머를 즐기셨음을 알 수 있다. '우레의 아들들'은 덜렁대며 뚱딴지 같은 해프닝을 자주 벌이는 두 형제에게 매우 걸맞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명실공히 사랑의 사도였으니 과거와는 얼마나 극적인 대비랴! 그리고 트리오 중 야코보는 첫 순교자로서 사도들 중 맨 먼저 하늘나라로 앞서 떠났다 (행전 12:2).

사랑 받아 사랑 주기

자고로 사랑 받아 본 사람이 익히 사랑할 줄 안다. 주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모든 제자들 중에도 열 둘, 열 둘 중에서도 페트로/요한/야코보 트리오를 최측근으로 두셨고 셋 중에서도 요한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다. 물론 직제자들 외에도 라자로 가족 등을 각별히 사랑하셨다(요복 11:3). 까닭이 뭘까? 우리는 주님이 사랑의 대상을 차별했다고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고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각 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트로/안드레 형제, 야코보/요한 형제 등 두 집안은 본래 갈릴리의 동업자 어부였다. 그러므로 이 트리오는 기본적으로 오래 정든 한가족 같은 사람들이었고 주님은 셋의 각별한 우정을 높이 사셨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셋은 수 십 년 갈릴리 돌풍을 함께 겪은 거친 뱃사람인 때문인지 성격까지도 엇비슷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스승 예수와 막내 제자 요한의 사랑의 모습은 수난 전날 밤 유월절 기념만찬에서 더욱 극명히 떠 오른다. 제자가 스승의 가슴에 기댔다. 이 다정한 모습은 으레 찰스 웨즐리의 찬송시(441장)를 떠올려준다. 요한이 더구나 주님 품에 쉽게 기댈 수 있었음은 당대의 식사 관습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절반 누워서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 어느 때보다 주님과 가까이 있었고 수제자 페트로도 이를 익히 의식하고 있었다(요13:23~25). 훗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인 사도행전 앞 부분에서도 페트로/요한 두 사람이 한 이적 사건에 개입된 데서 더욱 그런 감이 잡힌다.

요한과 유다: 두 가지 반응-참과 거짓에의 귀의

주님 사랑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 품에 기대어 누운 나의 모습!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은 없을 터. 대조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이스카리옷 유다는 주님 품에 기대긴커녕 떡을 주시는 주님을 향해 '발꿈치'(상징적)를 들었고 거짓 키스까지 하더니 급기야 스승을 팔아 넘겼다(요복 13:18).
우리는 여기서, 똑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은 흡입하듯 통째로 받아 들인 반면, 유다는 주님의 사랑을 자기 목적에 이용할 대로 실컷 이용하다 마지막 기회까지도 제 발로 차 버렸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극한대립, 극명하고 처절한 대비를 절감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요한은 처음부터 진리에 거한 데 비해 유다는 계속 거짓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진짜 아비 싸탄은 거짓의 앞잡이다. 사도 파울은 "우리들 중에 아무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위해 죽지 않습니다"(롬14:7. 사역)라고 말한다. 요한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 유다는 자신이 아닌 싸탄을 위해 살다 갔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 전후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앞에 나름대로 반응할 기회를 얻는다. 전폭적 또는 부분적으로 응한다. 부분적으로 응하는 사람들은 곧 부분적으로는 거부한다는 얘기니 위험하다. 나웬/테레사/슈바이처/켈러처럼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싸탄을 위해 살았음을 늦게서야 발견하기 때문이다. 노먼 빈슨 필도 그랬고,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 등도 이와 엇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의아한 독자들은 아멘넷/뉴스파워 등에 실린 필자의 관련 글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유다처럼 예수와 싸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고 절묘한(?) 줄타기를 하다간 "제 갈 길"로, 즉 지옥의 아가리로 곧장 낙하하기 쉽다. [유다도 한때는 사도였음을 기억하라!] 진리는 삶의 '옵션'의 경계선을 예리하게 그어준다. 독자는 요한처럼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와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유다처럼 부분적으로 응하거나 거부하며 자기 목적에다 이리저리 이용할 기회를 엿보는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랑과 진리의 계시

요한은 가장 어린 자신이 스승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있음을 거의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복음서에서 늘 필자를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익명 표기한다. "주님께 사랑받는 자"로 늘 자임하고 의식하고 상기하기를 원했다. 그 사랑에 특별한 뜻이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엔 특별계시로써 더 깊이 깨달았다. 그는 십자가 아래서 주님께 마리아를 어머니로 의탁받는 은총도 누렸다. 그날부터 마리아는 그의 어머니였다. 주님은 요한의 변함 없고 꾸준한 사랑을 신뢰하셨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요한은 죽기까지 평생 사랑을 실천했다. "내 어린 자녀들!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오." 이것이 그가 늙어 들것에 뉘어 다니면서 평소 입버릇처럼 하던 인사였다. 그의 복음서와 세 편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얘기로 가득차 있다.

요한의 뜨겁고 불 같은 성미는 주님이 맡기신 진리 수호와 사랑의 증언 작업에 걸맞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복 8:32/한글개역). 이 말씀이 유독 요한복음에만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중요성을 띤다. 요한은 말씀/로고스이신 크리스토 그분이 바로 진리이심을 첫 장부터 웅변해왔다. [특히 요한에게 있어] 주님의 사랑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유월절 만찬은 특별한 의미성을 띤다. 공관복음서엔 없는 주님의 수난 전날 메시지와 위탁기도까지(요복 13~17) 전문이 수록돼 있다.

주님은 가장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신다. "그대들에게 새 계명을 주는데: 서로 사랑하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해 왔듯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오"라고.
주님은 아울러 계명 즉 말씀/진리를 지켜야 주님사랑이 완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명시하시면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미리 정식 소개하신다(요복 14:16~21). 진리의 영! 그 분이 성령이시다. "증언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시기 때문입니다."(요서A 5:7 NASB서 사역)
주님은 수난 전날 메시지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임을 재강조하시고 기도를 통해 진리로 자신과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17:17,19).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거룩하게 해 준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도 진리와 사랑을 오벌랲시켜 강조한다.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강조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사랑(명사 '아가페', 동사 '아가파오'와 파생어들)을 약40회, 진리를 약20회 언급했고 요한서신서 A에선 사랑을 무려 50여회, 진리를 6회, 서신서 B에선 사랑 5회, 진리 4회, 서신서 C에선 사랑 6회, 진리 4회로, 비율로 봐도 사랑과 진리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같은 표현 속에서 진리와 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병행시킨다.

요한은 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에 배치되는 세력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가 아닌 거짓 것들은 죄다 미혹의 영의 작용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은 서신서에서 여러 번 당대와 미래의 적크리스토들과 이단들을 경계했다.
그는 또 성도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에 행하는 모습을 보고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사랑과 함께 진리를 얼마나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서A 1:5~8)

우리가 그의 계명(말씀)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2:3~5)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21~2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4:6)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요서B 1:7~10)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1:1~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요서C 1:2~3)

바로 그 요한이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언합니다. 혹 어느 누구라도 이 말씀에 뭔가 더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이 책에 쓰인 재앙들을 더하실 것이며 또 누구라도 이 예언의 말씀에서 뭔가 빼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쓰인 생명책에서, 그리고 거룩한 도성에서 그의 몫을 빼 버리실 것입니다. (계 22:18,19. 사역).

그러니 거듭난 참 신자들은 진리에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진리는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