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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General Topic

TLT 서로나눔 성경공부 2 [영/혼/육이 함께 하는 말씀묵상]

 

영/혼/육이 함께 하는 말씀묵상

[우리 댓글 동지들이 거의 모두들 나타나 열심히 댓글들을 올리고 계십니다. 키레네님과 또 램프님까지.
간밤 늦은 시각에 참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간증거리인데..거기에 관해 들풀님의 간증을 따로 듣기로 하죠. 간증은 단순한 댓글보다는 되도록 제게 주시면 제가 약간 다듬어 정식 글로 올리렵니다. 모름지기 모두들 주님 안에서 호기심을 갖고 기대하시라^^..]

저는 간밤의 그 좋은 일 후에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주마등 같이(네, 정말 주마등 같이) 머리 속에 그 꿈들이 지나갔는데 기분 좋은 일들이 앞으로 계속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삶 속에 기분 나쁠 일이 전혀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 댓글 공동체를 무척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옵니다! 오 영광, 할렐루야~! ]

어제 얘기 계속인데..제가 바로 어제 쓴 글엔 필독(쓰며 읽기) 파워보다 음독(소리내어 읽기) 파워가 더 세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입증하는 사건이 바로 어제밤 늦은 시각에 벌어졌습니다. 크..! 오 영원히 할렐루야~! 들풀님 간증을 듣기로 하고. 그래서 20세기 후반~1세기에 하나님은 죄악 세상의 총아인 컴퓨터를 통해서도 신비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컴퓨터의 한 기능인 채팅을 통해서도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구 공산권이나 특히 북한 등에선 소리 내어 성경말씀을 고백하기란 목숨을 바깥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으로 중얼거리는 고백도 고백은 고백입니다. 저는 방언기도를 '입속', '머리 속' 또는 타자로도 하곤 하는데 그게 전혀 효과가 없진 않더군요^^. 이 역시 들풀님의 간증 속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 관상이 아니고. 성경의 묵상은 언제나 말씀 묵상입니다. 저는 엘리야가 비구름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일곱 번 몸을 접고 기도할 때 매 번 말씀을 묵상했다고 생각합니다(왕들A 18:44).

말씀 묵상과 고백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의 내용을 하기 앞서 방법론을 중시하는 까닭은..성경연구의 방법론이 잘못되면 공부를 헛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블 '스터디' 즉 공부와 연구만으로 끝날 게 아니라..내 삶에 그대로 실천 적용하여 결과까지 나타날 수 있는 실천적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의 QT(=Quiet Time)같은 것은 입보다 눈 중심의, 다소 수동적/동양적/소극적 묵상이었습니다. QT가 유익하긴 하지만..]

그러려면 성경을
1. 읽고 듣고
2. 묵상하고(음미/읊조림)
3. 고백/선언하고(예수의 이름으로)
4. 삶 속에서 실천하고
5.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눈/귀/입/마음과 영 등의 모든 감관과 감각을 총동원한 총력적/입체적 성경 활용법입니다!
물론 이 모두가 서로 연결돼 혼연일체/일심동체입니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가 없죠.
(코만 빼 놓고..음, 저는 코마저도 성경공부에 써 먹을 방법이 없을까 연구 중입니다. ㅋㅋ. 그냥 놔두기 아깝잖아요..가령 성경연구 도중 성경의 향기/냄새를 맡는다든지 크크 그러다가 자칫 이단될라나 ㅎㅎ)

음..저는 말씀 고백/선언을 통하여 많은 득을 봐 왔는데..80년대 후반에 말씀 선언의 권능을 깨닫고 말씀에다 뭐든지 긍정적인 생각들을 담아 고백하노라면 때가 차면 그대로 이뤄지곤 했습니다. 우리는 노먼 빈슨 필(프메 SR 33단) 유의 뉴에이지 긍정철학은 단연코 배격하지만..하나님의 말씀에 늘 긍정적이어야 하는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가장 지름길 하나는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과 기도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기도가 예사롭지 않고 계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시 23편 1절 주(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를
주님은 나 김삼의 목자, 나 김삼은 아무 부족함도 없다네

식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해야죠.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히 11:6a)

또 연대기A(역대상) 4:9,10에 나타난 야베즈의 기도를 이렇게 내 것으로 '패러디'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김삼은 크리스토 안에서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입니다!
주님은 나 김삼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어
나 김삼의 영역을 넓히시고
주님 손으로 나 김삼을 도우셔서
나 김삼이 환난과 아픔, 근심, 죄악과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아멘

ㅋㅎㅎ. 이 기도가 혹시 님께는..'주문' 같아 꺼려집니까? 그럼 말씀도 님께 꺼려지는 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모든 성경말씀이 한낱 '주문'처럼 느껴지고 맙니다. 안 그런가요? 그럼 생명의 삶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게 되죠. 그래서 요즘 안티가 많아지는 겁니다. 다 싸탄 수하의 적대세력이죠. 자신도 모르게 마귀 부하 노릇을 하는 셈이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는..믿음으로 하면 응답됩니다, 할렐루야!

그밖에도 위와 같은 기도에 자신을 대입할 만한 기도가 참 많습니다. [지금 기도에 관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말씀 선포를 공부하는 겁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에페소/필리포/콜로세 서 등에 나오는 사도 파울의 기도입니다.

자..에페소 1:16~19에 나 자신을 한 번 대입해 볼까요?

나 김삼이 기도할 때, 기억하며 김삼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크리스토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한글개역의 '정신'은 일대 오역!)을 나 김삼에게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나 김삼의 마음 눈을 밝히시어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요로움이 무엇이며
그분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나 김삼으로 알게 하시길 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아멘.

너무 이기적인 기도로 느껴지십니까? 그럼 [나 김삼] 대신 [아무개]로 남을 대입하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합니다.
이런 대입식(=대학입학식 아님^^) 기도를 적용할 수 있는 사도 파울의 파워풀한 기도는:

엪 3:14~19
필 1:9~11
콜 1:9~12

등에도 있습니다. 적절히 활용하시도록~.

즉 야베즈/파울 등이 계시로 받은 기도를 현재의 내가 고백/선언함으로써 삶 속에 그 효과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지름길입니다. 도덕적 교훈만 실천 대상이 아니라.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