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삶맛 에세이 - 미국 배심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국초기의 배심. 지루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신앙과 성경 얘기만 계속 하면 좀 빡빡해 하고 답답해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요. 그래서 새로 '삶맛' 코너를 마련합니다. 제목을 '사는 맛'으로 하렸더니 웬 걸, 탐색을 해 보니까 같은 이름을 붙인 곳이 40여 만 군데나 있어 '삶맛'으로 바꿉니다.

오늘 소재는 법원 배심원 선정 모임을 다녀 온 얘기.

1.
미국은 각 카운티 법원 별로 소배심(petit jury)을 위한 배심원(petit jurors)을 수시로 소집해 재판 심리에 배정하지요. 수많은 배심원 후보자들이 일종의 교육/훈련/심사를 거쳐 선정되는데 보통 며칠씩 걸리는 그 과정이 흥미롭다기 보다 퍽 지루합니다.

특히 한국인 1세들은 영어나 이해도가 부족한 탓에 배심원으로 선정되는 예가 드물지요. 또 영어를 잘 해서 뽑힌다고 해도 재판이 끝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몇 주간씩 참여해야 하니까 손해(?)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여러 시간 기다려야 하고 무엇보다 갑자기 생활의 리듬이 깨진다는 게 큰 흠이지요.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제가 사는 카운티(보로)에서는 개인당 6년에 1회쯤 소집돼 갑니다. 물론 법원엔 매일 수십 명씩 배심 후보들이 소집되어 있지요. 이들은 배심원 후보 설문 (juror qustionnaire) 등 관련서류 작성법부터 대표 판사의 간단한 소개와 인삿말이 있은 후 실사건 심리에 앞서 변호사들과의 단체 접견 형식의 심사 과정을 거칩니다.  

2.
지역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저의 소속 카운티의 경우, 배심 임무(jury duty) 참여 시기를 확인하는 우편통보를 확인하면 우편 또는 법원 웹사이트를 통해 배심원 번호를 받아, 소집 당일 출두하거나 '전화 대기자'로 할당되기도 합니다.
대기자는 소환서(jury summons)에 적힌 날짜 당일부터 배심 소집일을 배정받기 위해 매일 오후 법원으로 (무료)전화를 겁니다. 몇 번부터 몇 번까지가 내일 출두하시오 나머지는 기다리시오 식의 업데이트 녹음을 듣지요. 이 기간이 약 2~3일 걸립니다.

저는 다행히 비교적 일찍 받아 모든 것이 일찍 끝날 수 있었습니다. 6년 전인 지난 번엔 배심 선정 과정이 사흘이나 걸려 찜찜한 추억이 있었지요.

전체모임-오리엔테이션은 법정 경찰관이 이끄는데 주로 관련 개인 서류 양식 작성법입니다. 과거와 현저히 달라진 점은 절차가 간소화되고 넓은 강당 벽 여기저기 대형 텔리비전이 부착되어 시청할 수 있다는 것, 수 십 개의 컴퓨터가 설치돼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다는 점 등입니다.
모든 것이 첨단화돼 있는데 단, 컴퓨터는 법원용이어서 10분씩 주기적으로 자동 통제돼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번 달갑지 않고 지겹던 기억이 새로워 컴퓨터 앞에서 상당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류 작성이 끝나면 법정 배심원실에 들어가 실제 사건을 맡은 양측 변호사들을 통해 케이스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배심 '계몽/훈련'과 동시에 심사를 하게 됩니다.

저는 무작위추출 결과 첫 날 첫 줄 6명 후보들 중 1명으로 뽑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빨리 끝났고 다행히도(?) 심사엔 불합격됐습니다. 물론 제 의견은 유감없이 다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바라는 배심원 감이 아닌 모양이지요.
우리 팀 6명 중에서 '합격'된 3명의 한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웃음인지 울음인지 난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는 집을 여럿 보유했고 매일 바쁜 부동산업자였습니다.  

3.
우리에게 할당된 케이스는 종합병원에 입원했던 환자가 퇴원 당일 숨진 뒤 가족 각 자가 병원 상대로 낸 소송 건. 가족 담당 변호사, 병원/담당의사 측 변호인이 나와 소송 설명을 했지요. 

배심원 선정 과정은 케이스 설명을 통해 법 집행에 대한 개인의 태도, 동정심이나 개인의 선입견/감정 등을 되도록 절제하고 증거에 치중하는 기본 자세, 케이스 이해력/분석력 등이 파악되는 대로 변호사들이 선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측 변호사들의 설명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자신들의 이익을 적극 밀고 반영하는, 전혀 상이한 입장이기에 배심원들은 샌드위치 속처럼 양측 사이에 끼어 긴장하게 되고 자연히 압박감을 받게 됩니다.

변호사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는 "결국 판사가 아닌 여러분의 결정에 달렸습니다"란 얘깁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진짜 판사인지 어리벙벙해지지요. 심지어 대배심(grand jury)까지 진출한 배심원이 피고인 범죄자에게 추후 희생되는 사례도 없지 않아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는 임무이죠.

6명 또는 12명의 배심원으로 뽑히고 나면 최대한의 공정을 위해 비밀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선정된 배심원들은 재판 자체 외에는 외부로부터 어떤 정보나 소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원/피고, 변호사, 증인들과 일체 아무 대화를 나눌 수 없고 관련 뉴스나 기록을 읽어서도 안 됩니다. 심각한 재판이나 중범죄 케이스의 경우는 상당기간 연금과 비슷한 격리 상태로 지내기도 합니다. 

배심을 위한 법도 따로 있습니다. 배심원은 자기 견해를 명확하고 확신 있게 제시하도록 주문 받습니다. 또 뇌물이나 외부 압력 따위로 타협할 경우 중범죄에 해당합니다. 영국 같은 경우, 배심 관련법이 훨씬 더 엄격하지요. 

4.
배심에서 늘 강조되는 것이 공정/무사. 법과 법원을 상징하는 소위 '법의 여신'은 고대 에집트의 마아트 신에서 비롯됐습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타조 깃털을 가진 여신인데, 후세에 그리스에서는 '테미', 로마에서는 '유스티티아'가 됐습니다.
흔히 정의와 법을 뜻하는 낱말 'justice'는 유스티티아에서 왔지요. 눈을 가린 것은 공평 무사(無私)를, 한 손의 대칭 저울은 균형/공정을, 다른 한 손의 검은 법/정의 집행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슐로모(솔로몬)의 판례에서 보듯 유일한 참 정의의 신은 야웨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예수 크리스토가 공평과 정의의 왕이십니다(예렘 4:2, 9:7, 23:5, 33:15). 
  
배심제의 기원에 대해서..일설에 13세기 영국 존 왕이 대헌장(마그나카르타)를 채택할 당시 합법적 과정 없이 자유인이 수감될 수 없다는 규정을 놓고 '합법적 과정'을 연구한 결과로 생겨났다거나 12세기 헨리 2세의 '클러렌든 칙령'(1166년)에 따라 시작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11세기에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토지분쟁을 놓고 최다 토지를 보유한 최고 귀족인 공작 자신의 자기 재판을 할 수 없어 귀족들의 배심이 구성됐다는 설도 있지요.
또 고대 예수님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 공의회도 비슷한 기능을 했다는 설이 있고 아테네 사람들은 기원전 5세기에 비밀투표를 통한 일종의 대형 배심회의(201~401명)를 했다지요.  

미국은 초기부터 민사/형사 재판에 모두 배심을 활용했습니다.
재판 상의 형평과 판사의 막중한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 채택된 제도 같이 느껴집니다. 배심은 법원 규모에 따라 보통 6 또는 12명으로 구성되며 스코틀란드의 경우 15명입니다. 배심원들 사이에 의견 불일치로 평결이 불가능할 경우를 '헝 주어리'(hung jury)라고 부릅니다.  
 
미국에만 있는 대배심(grand jury)은 과거 소배심의 판결의 오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22명으로 구성된 배심이 심리/평결합니다. 기소장에 의한 기소배심은 12~23명으로 구성된 배심단이 비밀리에 평결하지요. 지원자가 검사 역을 하기도 하며 12명이상의 찬성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합니다.     
  
5.
아무튼 저는 법원으로 가기 앞서 먼저 하나님께, 말할 수 없이 교통이 번잡한 법원 부근에 적당한 주차 자리를 주실 것, 생활과 글 쓰는 일에 크게 방해 받지 않게 모든 것이 조기 종결 되도록 간구했습니다. 놀랍게도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이 모두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침에 막히기 쉬운 고속도로를 피하고 고속도로 곁길을 탔는데 비교적 빠른 시간에 도착했지만 주차자리를 찾는 데는 역시 상당시간이 걸렸습니다. 더구나 길마다 출근 길에 바쁜 차량들이 서로 쫓고 뒤쫓는 듯 해서 숨가쁠 정도였지요.

평소 알고 있던 교회 앞을 겨냥하고 가 봤더니 학교를 끼고 있어 오히려 더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택가의 어느 집 앞 코너에 딱 제 차가 설 만한 공간 하나가 있어서 무사히 주차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민사법원 입구의 금속탐지기를 통과하여 메인홀에 갔더니 아직 많은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법정 경관은 유머도 풍부한 사람이어서 과히 딱딱하지 않았습니다.

15세 이하 자녀를 둔 사람들, 전과자들 등 다양한 배심 임무 면제 케이스도 있지만, 실제 면제 대상자들은 주로 오피스와 배심실 안에서 결정됩니다. 평소 직장 일로 바쁜 사람들은 다양한 면제 청구를 해 보지만 잘 먹히지 않다가 의외로 변호사들과 몇 마디 대화로 해결되는 예도 보입니다.

한 목회자의 말을 들어 보니.. 목회자의 경우는 본인 양심에 따라 배심 임무를 피할 방법도 있다는 군요.

참..배심원들에겐 일당 20~40불 정도로 약간의 대가를 주지만, 그나마도 11명 이상의 회사/기관에 소속된 경우 회사 측에서 지불해야 하는 등 약간 복잡합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6년만에 한 번 씩 하는 배심. 여간만 뱃심(?)이 좋은 사람 아니면 참 하고 싶지 않은 의무입니다. 더욱이 이런저런 문제점과 부작용도 없지 않은 제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