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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엡 5:18] 성령충만이..뭐라고요(1)?


성령충만이..뭐라고요?

-독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참고 성구 

   (포도주) 술에 취하지 마시오. 거기 방탕이 있으니, 오히려 성령으로 채워지시오. 

    (에페소서 5'18 사역).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아 성령님이 언변을 주신 대로 다른 종류의 언어(곧 영언/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행전 2'4 사역)



신자들-특히 교회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성경이 말하는대로, 있는 그대로,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해 보자고.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고.

정직하게 성경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자고.


교회에서 가장 애용되는 말 하나가 '성령충만'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다수 신자들은 성령충만을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해 왔다. 특히 지도자들은 그러하며, 신학자들은 말할 나위 없이 그렇다. 그런데 과연 성경도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을까?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성령충만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충만을 형상화한 성구는 시 23:5c이다. 

직역해 보면..

  "나의 잔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쓰여진 '라바'(채우다)라는 동사의 여성/명사 수동형인 '레바야'를 (학자)게세니우스는 '가득 채워짐'(is well-filled)으로 해석했다. 바로 이것이 충만의 본질이다! 


[ 대다수 역본들이 채택한 동사 '흘러넘친다'(overflows, runs over)는 용어는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필자는 본다. 5절에서 시인은 분명히, 자신이 초대한 손님에게 정찬을 대접하듯 주체(목자)가 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손님의 잔에 줄줄 흘러넘치게 (포도주를) 붓지 않는다. 일종의 부주의나 낭비, 심지어 무례와도 같기 때문이다. 또한 "잔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주어와 술어의 모순이다. 잔에 든 내용물이 흘러넘치는 것이지, 잔이 아니다. 그리고 역자들은 흔히 바로 앞 부분인 "님은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 바르십니다"에다 곧 이어 연계시키는 성향이 있는데, 기름을 부으면 흐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더구나 '넘쳐흐른다'를 쓰기 쉽다. 그러나 기름이 흐르는 것과 잔이 가득한 것과는 각각 별개의 주어, 작용과 모습,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내적으로 연계된 것은 물론이다.) 이래서 게세니우스처럼 어느 모로 보나 "나의 잔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가 더 정확하고 타당하다고 본다. ] 


그리스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에서의 (성령)충만은 채워짐 즉 동사의 수동태적 상태를 뜻한다. 이 충만은 잔이 내용물로 채워지듯, 어떤 계기, 어떤 특정한 때에 어떤 동작을 통하여 어떤 외부적 요소로써 내부에 채워짐/채워졌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네 사고방식의 '충만'은 동사보다는 형용사적 의미가 강하다. 외부에서 채워지기보다 오히려 내부에서 자생적 요소로 이미 가득한 상태라는 의미를 더 시사한다. 

여기서 혼동이 오곤 한다. 흔히들 자력구원이 아닌 타력구원이라고 맞는 말을 하는데, 성령충만도 그렇다. 자력충만 아닌 타력충만이다! 그렇다고 성령충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아무 것도 없다거나 절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령충만은 나의 외부에서 나의 내부로 진입하여 채우심이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인위적이 아니라 신위적이고 천부적이다. 


성령충만은 인격 충만 또는 미덕이나 덕성의 충만이 아니다. 어떤 고상한 정서나 표현의 충만도 아니다. 사랑 충만도 성령충만은 아니다. 참된 아가페 사랑은 성령충만의 결과의 일부로 오지만, 그것 자체가 곧 성령충만과 동일하다는 등식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 봉사 사역 등 행실이 각별히 선하거나 얼굴이 환히 빛나거나 미소가 넘치거나 혈색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성령충만하다고 할 수 없다! 또 행실이 바르고 점잖다고 해도 또 심지어 성령대로 행한다고 해서 곧 성령충만하다고 할 수 없다. 흔히 리더슆에서 말하는 소위 '커리즈머'(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서 성령충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은사(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충만의 결과이다. 


흔히 많은 어른 신자들이 언뜻 어린이는 성령 충만될 수 없는 것처럼 인식하곤 한다. 어떤 성숙한 인격을 가상하기에, 어린이는 아무래도 그런 단계일 수 없다고 은연 중 생각하는 탓이다. 이 역시 큰 오해요 착각이다. 

어린 침례/세례 요한은 비록 성령님의 내주(內住: 안에 거하심)는 아직 겪지 않았지만(..에 근거하여 요한만 예외로 성령님의 내주를 받았다는 것은 '나름' 학설일 뿐임) 성령의 기름부음을 가득 받았다. 성령 충만과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침례 요한의 성령충만은 구약적 양태이기 때문에  신약적인 성령충만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나중 설명하려 한다. 



성경적 성령충만은 영언(방언) 동반


성령충만은 오로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성령충만이어야 한다! 단언컨대,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그냥 단순히 성령으로 채워짐을 가리키며, 이것은 (사도)행전 곳곳에서 보듯, 반드시 영언을 동반한다(신약 성경 속 교회 인사들이 성령충만할 때 기도는 예외없이 영언 기도/노래가 동반됐다고 봐야 한다). 

또 첫 충만은 절대로 영언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성령님의 패턴이고 또한 영언은 더 나은 언약의 일부이다! 첫 교회 사람들이 성령 채우심을 받으면서 모두들 영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후대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할 터. 

그런데 이에 관해 그동안 왜 신학적인 잡음들이 많았을까..? 성령충만을, 초자연적 개념보다 좀 더 자연스런 자연적 개념, 특수개념보다 보편타당한 일반적 개념 곧 손쉽고 편리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머물린 채 자리잡아왔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행전의 여러 지역 교회의 결신/전도 관련 기록에서 영언을 "하지 않은" 예도 있다고들 주장한다. 그것으로 성령침례시 영언의 필수 동반을 (보편타당성이 '없다'고)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초기 교인들과 현대 교인들을 차별화하여, 현대 교인들의 영언의 진정성을 부정하거나 '마귀의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결국 자기나 남들이 영언을 하지 않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단적으로 사마리아 교회의 사례를 들자. 학자들은 사마리아 교인들이 믿을 때, 영언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본문을 섣불리 본 탓이다. 

본문을 눈여겨 보면, 마술사 시몬은 남들이 성령을 받아모심으로써 뭔가 흥미로운 것(영언!)을 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다. 분명히 성령침례의 결과로 남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발생되게 하는 능력을 돈으로 사겠다고 나서서 페트로의 거룩한 분노를 유발한 것이다.



현대교회에 거의 결여된 영적/초자연적 역사


오늘날 대다수 교회 예배를 보자. 거기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는가? 전혀 없다고도 하기 어렵지만, 딱히 있다고 하기도 어정쩡하다. 궤변이라고? 

초기교회 예배와 비교해 보면, 알 게 아닌가.

초기교회 예배엔 이런 콘텐츠가 있었다: 



   찬송시

   가르침

   계시

   영언

   영언해석(통역)

   봉헌(연보/헌금/십일조)

   기타 교회를 통한 사역: 신유/구호



여기서 찬송시는 주로 영언노래로 화답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성도끼리 영적인 노래로 화답하라는 교훈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영언 노래는 '가사' 같은 요소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초기교회의 경배는 영적/초자연적 요소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늘 성령충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어떤가? 그런 요소는 거의 100% 없다! 오늘날의 경배는 거의 100%가 인위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초기교회와는 정반대다. 


왜 이렇게 진화됐을까? 영언과 통역 등 영적/초자연적 요소는 어글리하고 부담스런 요소로 전락해 버렸거나 소위 종식론/중단론이라는 강력한 신학 이론에 의하여 완전 배제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 형태가 지난 몇 세기 동안 당대/현대 교회에는 더 시의적절 내지 걸맞다는 암묵적 컨센서스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의식적/예전적 예배로 자리잡혔다. 오늘날 신학 가운데는 '예배학'이란 것이 고도로 발달해 있고, 경배와 찬양 운동도 '바디워슆'까지로 진화돼 온 반면, 초기교회의 초자연적 요소를 회복하자는 운동이나 흐름은 거의 오순절교계에 국한돼 있다시피 해 왔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의 성향들은 초기교회처럼 순수하기보다 숱한 잘못들이 없지 않으며, 많은 교단들 교파들에 의해 거의 '이단'시 되어 왔다. 

거기에다 요즘 오순절 흐름에 편승한 '신사도운동'이라는 괴이한 왜곡된 파장이 더군다나 초기교회 회복 흐름을 뒤틀어 놓고 있으니, 사탄의 궤계는 간특하기 이를 데 없다.   

이래서 초기교회의 순수한 영적 요소를 회복할 길은 거의 풀뿌리운동 밖엔 없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 한번 상식적/논리적으로 따져 보자.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자는 영과 진리로 경배할 것이라는 말씀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써 성취되었는데, 성령강림 이후 초기교회에 자리잡은 그 영적인 경배가 오늘날의 모습과 같다는 말인가? 

결코 같지 않다! 그러므로 현대 예배에다 '영과 진리로써 하는 영적 경배'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적용하는 버릇을 우리는 삼가야 바람직하다. 분명히 그런 경배는 바로 초기교회의 모습이었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패턴을 본받을 때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필자가 틀렸는가?  


오늘날 현대 경배를 보면, 성경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보다 "하나님은 여기서는 정신이시니"라고가 되어 있다고 봐야 더 적합할 것 같다. 거의 모든 것이 혼적/육적 차원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복음을 듣고 거듭나고 삶이 변화되는 가장 기초적인 역사만은 많은 교회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거면 다가 아닌가?"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두 가지 성령충만


성령충만은 구약 시대에도 있었다. 예를 들면, 모쉐와 같은 사람이 그랬다. 또한 신약 직전 시대에 해당하는 침례 요한의 경우 태중에서 이미 성령충만했고, 그의 탄생 주변에서, 아버지 자카리야, 어머니 엘리쉐바(=엘리사벹) 등이 역시 성령충만했다. 아울러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성령충만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구약시대의 성령충만이고 일시적/기능적 충만이지, 성령의 내주는 아니었다. 만약 구약인들의 성령충만 역시 내주를 전제로 한다면, 문제가 다발적으로 생긴다. 이에 대해 여기선 언급을 생략한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구약인들의 성령충만은 신약시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지만, 신약시대에 비하면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1. 성령님의 내주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고,  

2. (더 나은 언약의 일부인) 영언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독자는 성경대로의 성령충만의 개념을 지녀야 옳다는 것, 그러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것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 성경대로의 성령충만은 자연히 영언을 동반하는 것 등을 이해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