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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요일 2:15-17] 세상은 미워하고, 영혼은 사랑하고


 

세상은 미워하고, 영혼은 사랑하고
-몇 가지 패러독스

바탕본문: 요한1서 2'15-17

김삼


오늘 저는, 티엘티 독자들은 물론, 어느 특정 교회 회중과 함께 같은 메시지를 나눕니다. 저를 강단에 초청해 준 그 교회 담임목사는 제가 최근 한 권의 시집을 통해 처음 알게 되고 존경하게 된 시인입니다.


위에 제시된 이 바탕본문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어찌 보면, 미워하라는 말과도 실상 같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누군가는 "아니 세상을 왜 미워해? 염세주의인가, 혐오사상인가? 세상은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아야지."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서(눅 14'26)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는 물론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소."라고 하신 표현을 되새겨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부모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일부러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역설적 내지 간접적으로 그들을 미워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즉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주님보다 이들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세상은 그들보다 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존재입니다! 바탕본문과 바로 전의 성구에 따르면, 우리가 미워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합니까..?
세상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자, 이렇게 볼 때, 본문은 몇 가지 커다란 역설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역설에 해당하는 영어 패러독스는 어원상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또는 '자체모순'이란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바탕본문을 기록한 동일인물인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요새 흔한 말로 '뭐야?!' 하기가 쉽지요. 아니 똑 같은 기자가 한 쪽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해 놓고, 다른 쪽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떡하라는 말인가요?! 모순..스러워 뵈지 않나요?

더구나 본 서신서와 복음서, 요한계시록 등을 기록한 요한은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사랑의 사도라면 마땅히 "세상과 거기 있는 것들을 사랑하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일찍이 12명의 남자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실 때 그 가운데서 가장 어린 요한을 유난히 사랑하신 뜻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를 통해 계시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에서였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때때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적곤 합니다. 즉 주님에게 남달리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암시죠. 그래서 여타 제자들과 달리 순교하지도 않고 유배를 가거나 하여 남달리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했습니다. 

사실 요한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기도 했지요. 얼마나 정다운 모습입니까? 이것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던 유대인의 관습 때문에 더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페트로(베드로)는 누가 과연 주님을 팔고 배신할 것인지 살짝 여쭤 보라고 주문하기도 했지요.

요한은 또,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지시대로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셔서 평생 봉양하기도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런 요한은 사랑을 가장 강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늙어서 부축을 받아 들것에 실려 교회당에 나오면서도 "여러분, 내 자녀들, 서로 사랑하오"라고 따스하게 권면했답니다 .

이처럼 사랑으로 넘친 사도가 세상과 거기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니까, 좀 의아스러울 수 있지요.


이뿐 아니라, 또 다른 모순 내지 역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실 때 아름답고도 완벽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한국 강토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얼마나 오밀조밀하고 정답습니까?
한국인 자신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한국 땅은 그저 작고 좁게만 보이고, 미국 같은 나라의 광활한 땅과 거창한 산과 계곡, 호수 등을 봐야 시원해 뵌다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 같은 나라가 세계 그 어디에도 없지요. 이 작은 한반도 땅에 가도가도 산과 들과 강과 바다 등 없는 게 없으니, 이름 그대로 금수강산입니다. 더구나 이 땅에서 나는 세계적인 명품 토산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우처럼 맛있는 소고기가 없지요. 고려인삼처럼 약효가 좋은 인삼이 없죠. 한국 사과, 복숭아, 수박처럼 맛있는 게 없습니다. 시원하고 달콤한 참외는 또 어떤가요? 한국땅에서 자라야 제 맛이 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금번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기증해 주었다는 '시베리아-백두산 호랑이'가 한국에 왔다는데, 우리나라 토종 호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얼굴의 눈자위 무늬가 이렇게 무섭고 당당하게 생긴 범이 다른 나라엔 없습니다.

자, 이처럼 아름답고 완벽하게 하나님은 각 나라는 물론 온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왜 그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 뿐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류도 지으셨습니다. 그 분의 형상과 모습대로 손수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분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런 인류가 사는 이 세상을 이제 와서 사랑하지 말라니, 모순이 아닌가요?

더욱히 하나님은 세상을 끔찍히 사랑하셔서, 그 세상 사람들이 죄에 빠지자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한 민족을 택하셨고, 그 민족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셔서 구원하시고 온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외아들까지 보내 주신 그 세상을 왜 사랑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모순된 역설 아닙니까?

 

첫째로,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 사랑이 사라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예 우리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따라 해 봅시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내 속에 없다."
무서운 말씀 아닌가요?

그렇다고 세상과 아버지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랑과 아버지 사랑을 함께 keep/유지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아가페에서는 두 가지 사랑이 파생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둘째로는 그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에 응하여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랑.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지요.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아가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할 길이 없습니다.

자고로,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기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사랑 받은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바로 아가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 아버지 사랑이 우리 속에서 사라지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사랑할 수나 있습니까! 그야말로 절망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세상을 사랑할 것인지, 아버지를 사랑할 것인지 우리는 양단 간에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고 거기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단적인 예로, 돈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돈 사랑이 세상 사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돈을 좋.아.할 수는 있겠지요. 아마도 돈 싫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터입니다. 당장 돈 한 푼 없이는 살기도 어려우니까요.

그러나 돈을 너무 좋아하다하다 그것을 사랑하는 단계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돈님! 돈님! 하면서 돈만 따라다니다 보면, 자기가 돌아버려 '돈 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돈 사랑, 금 사랑은 마침내 나를 미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복과 풍요로 지난 20세기에 세계적인 교세를 이루고 떨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풍요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없습니다! 복과 풍요는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로 구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더 나아가 받은 바 복과 풍요는 잘 써야 합니다. 잘 쓰지 못하면서 풍요만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게 잘못된 형태의 성공주의/번영주의/풍요주의/기복주의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지, 돈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니까요.

돈을 사랑함이 곧 세상을 사랑함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돈은 세상에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또,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우리는 위로부터 났으므로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거듭 주님 당신이나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5'19,, 17'14,16).
우리가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지요. 크리스천은 거듭난 순간부터 이미 세상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미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 하나가 Make no mistake about it! 바로 이 점에서 혼동이 없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나요?
이 세상은 마귀가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은 마귀의 뜻대로 계획대로 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싸탄의 메이트릭스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4:30, 16:8, 16:11 등에서 주님은 거듭거듭 마귀가 세상 임금이요 세상의 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파울(바울)도 공중의 권세 잡은 이가 세상을 주관한다고 경고합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온 세상 천하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내게 절하면 이것을 네게 주겠다고 할 때, 주님은 그게 아냐, 세상은 내 것이야 라고 부인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신데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말씀=로고스이셨는데, 왜 세상이 주님의 것이 아니고 마귀 세상입니까?
본래 이 세상의 신은 아담/하와였습니다. 아담 하와가 온 세상을 청지기로서 맡아 지키고 다스리도록 하나님은 주권을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범죄함으로써 사실상 마귀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그 이후로 마귀는 합법적인 세상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 위의 절대자인 주권자는 물론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뜻하시면 마귀를 조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기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을 지배하도록 놔 두시고 허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해요.

따라서 우리는 마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세상이 온통 마귀 세상이다 보니 본문 16절에 보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등이 모두 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의 좋은 것들 가운데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 세상에서 왔다고 해서 우리가 부부 사이에 성욕이 없다고 하면 곤란하죠. 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부지간의 사랑과 자녀 출산으로 대를 잇기 위해 성욕이 있어야 합니다. 또 목숨을 부지하려면 먹고 살아야 하니까, 식욕도 있어야 하고 수면 욕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잘못된 형태의 모든 육욕과 정욕은 마귀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사는 실내에 작은 개미떼들이 동거하고 있습니다.
방 구석마다 개미떼들이 득시글하면서 먹잇감마다 달려드는데, 좀처럼 사라져 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캔 복숭아에 담긴 주스를 작고 투명한 용기에다 담아 상에 올려 놨더니, 얼마 되지 않아 개미떼들이 새까맣게 달려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개미군단은 멋 모르고 이 달착지근한 향내가 나는 맛있는 복숭아 주스를 향해 몰려 옵니다. 그런데 그 끈끈한 주스가 몸에 묻어 젖어 버리자, 비틀거리면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헤맵니다. 꼭 술취한 것만 같습니다. 이때 사람인 저는 '바이오킬' 즉 스위스 제스몬드사가 개발한 인간과 자연을 생각하는 선진국형 저독성 무취의 살충제를 뿌립니다. 
그랬더니 수만 마리의 개미가 소리 없이 죽어 갑니다. 그 밤은 '개미군단 대학살의 날'이었습니다.  개미는 이로운 곤충이라지만, 집안의 이 개미떼는 인간환경을 괴롭히는 해충에 불과합니다. 

이 개미떼의 모습은 흡사 무엇과 같습니까?
바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좋아뵈는 것들을 탐하는 모습이 달콤한 주스에 달려드는 이 개미떼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아뵈지만, 또는 일시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것에 탐닉하게 되면, 끈끈이처럼 몸과 맘에 찰삭 달라 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결국 비틀거리다가 죽음과 멸망으로 내리닫게 됩니다.


우리는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세상은 장차 망하기 떄문이죠. 본문 17절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마귀가 다스리는 이 세상은 장망성 곧 장차 망할 곳입니다. 언젠가 이곳은 소돔/고모라처럼 불과 유황으로 심판 받게 돼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 아무도 모르죠.

한국에선 오늘이 5월 22일입니다만, 어제 5월 21일은 미국의 시한부 종말론 이단자 해럴드 캠핑이 말하는 지상종말의 날이었지요. 그런데 깨보니 온 세계가 멸망은커녕 여전히 멀쩡합니다.  캠핑은 어제 하루 동안 인류의 3분의1이 죽는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는데 사실은 미친 사람이죠. 1990년대에도 같은 예언을 했지만 다 허탕쳤습니다.
그 교도들은 캠핑을 따라서 다들 하늘나라로 '캠핑' 간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망한 게 아니라 캠핑과 자기네가 망했고 이제 남은 것은 환멸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언젠가 망하게 돼 있습니다. 멸망의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을 내다 보며 더욱 더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죠.

 


이제 결론으로 다가갑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우리는 영원히 남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버지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사도는 말해 줍니다.

아버지 뜻이 뭣인가요? 성경 전체에 아버지의 뜻이 가득 담겨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라면 바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코린토B서(고후) 6'14-17을 보면, 사도 파울은 비신자와 신자가 멍에를 함께 멜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의와 불법, 빛과 어둠, 크리스토(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서로 조화되거나 일치될 수 없고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과 전혀 사귀지 않고 완전히 속세를 떠나 살라는 말이 아니죠! 그런 염세주의, 일방적인 탈속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려면 세상을 아예 떠나야죠.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과 그 분의 자녀로서 세상의 더러운 것,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성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의 온갖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도록 율법으로 엄히 지정해 놓으셨던 것을 봅니다. 왜 그랬나요? 그들은 하나님이 빼고 가려 뽑으신 택하신 백성, 선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흠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온전히 보존되게끔 애쓰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인간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세상을 미워하라고 해서 곧 세상의 영혼들까지 우리가 버리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그처럼 사랑하신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잃어진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신가족-곧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이웃사랑을 첫 계명이라고, 서로 사랑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성도들끼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이웃사랑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부모나 부부나 자녀나 남녀의 구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형제들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형제 사랑 뿐입니다.

그러므로 앞날에 그곳 시민으로 살아 가려면, 이곳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잃어진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건져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결국 온 성경 말씀 전체가 이 사명에 집중돼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맙시다.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성별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구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성도를 사랑합시다.
마치 내 몸처럼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