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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벧후 1:3-9] 참 경건-성경이 말하는 영성






페트로B서(벧후) 1:3-9  

3 그 분(크리스토)은 신적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그 분을 앎에서 비롯됩니다. 
4 그것들-그 분의 영광과 덕-을 통하여 그 분은 우리에게 그 분의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신적 성품에의 참여자들이 되어, 탐욕으로 인한 
  세상에서의 부패를 피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5 바로 그래서, 여러분은 열심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다 덕, 덕에다 지식, 
6 지식에다 절제, 절제에다 인내, 인내에다 경건, 
7 경건에다 형제우애, 형제우애에다 사랑을 더하시오.
8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있고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를 아는 
   지식에 있어 게으르거나 열매 없는 사람들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는 사람은 눈이 멀어 멀리 내다 볼 수 없고 그의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이지요
   (사역) 




오늘날 사람들은 '영성'과 '영성훈련',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란 것을 자주 논하지요.
신자들과 기독교 뿐 아니라 세상 종교들과 비신자들까지도 그렇습니다. 뉴에이저들이 가장 자주 뇌까리는 토핔 한 가지가 '영성'입니다. 웹 사회에서도 가장 열기 띤 곳들의 하나가 영성 사이트랍니다. 

이 점은, 기독교인들과 뉴에이저들 아니 지구인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 같은 걸 느끼게 하는 군요.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영을 말하고 영혼을 말하니까, 영성도 자연히 말할 거 아니냐..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영성' 또는 영어 'spirituality'란 말 자체가 성경에 없어선지, 자꾸만 외래적인 것에 귀가 솔깃해져서 '영성' 두 글자가 붙는 것/곳이라면, 거기 뭔가 있지 않을까 하여 관심들을 갖곤 합니다. 

대신, 성경엔 경건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 영성이지요! 그런데 교인들은 가장 가까운 데-성경에서(!)와 성령님 안에(!)-서 영성을 찾지 않고 되도록 밖에서, 멀리서 색다른 것을 도입해 끌어 들이려고들 합니다. 피워선 안 된다고 성경이 경고하는데도 '딴 향불'을 피우려고들 합니다. 
- 여기 유혹이 있고..또한 자연히 위험이, 더 나아가 치명적인 위험도 따르게 되지요. 

영성 영성 영성을 입버릇처럼 자주 찾는 우리는 과연 성경의 경계선, 진리의 바운더리 안에 머물고 있는 건가요?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영성 즉 경건이 뭔지 그 개념을 올바로 파악하여 진리의 경계선 밖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페트로의 교훈은 참된 경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신적인 권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주셨다'는 말은 과거형 내지 과거분사인 동시에-그 결과로- 우리가 지금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재형/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와!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관한/속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셈이 아닌가요..그렇지요? 신자이면 누구나 이것들을 다 갖고 있을 테니 우리는 생명과 삶과 경건의 무한한 자원 내지 자산을 갖고 있습니다. 아멘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맹탕, 무턱대고 그냥은 아닙니다. 본문 3절은 아직 몇 가지 중요한 언질과 단서를 더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 분의 신적 권능으로써 이런 것들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경 번역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일부는 신적 권능을 주어로 하여 그 권능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옮기기도 했습니다. 

신적 권능이라..그게 뭡니까? 바로 성령님의 권능이지요! 성령님의 권능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참 경건, 참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단 말이지요. 따라서 세상엔 참된 영성이 있을 수 없으며, 교회 안이라도 성령의 권능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게 경건이고 영성입니다. 
Make no mistake about it.

주님께서는 최후 승천[각주:1] 직전, 행전 1:8 예언에서 분명히, "성령님이 그대들에게 임하시면 그대들이 권능을 받아.."라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이 단서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합니다: 한 가지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지상교회에 내리시면..이란 뜻, 다른 한 가지는 개인이 그 성령님을 모시면..이란 뜻. 그렇지요?
[ 여기서 말하는 지상교회란, 눈에 보이는 모든 제도 교회를 뜻함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사람들의 비가시적-눈에 보이지 않는- 모듬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어 권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위 본문 3절에 내포된 논리를 보면, 그런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또한 그 부르심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 부르심에 응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고..그래서 성령을 받아 모셨나요? 그 부르심을 독자는 지금 알고 느낍니까? 그렇다면..독자는 성령의 권능도 받고 경건과 생명에 관한/속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즉 하나님 아버지께 부름 받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우리는 성령님을 모셨고 그 권능을 받았으니, 생명과 삶, 경건의 모든 것, 거의 무한한 자원/자산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그걸로 끝입니까? 이젠 몽땅 다 보유했으니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이 모두 자동으로 차고 흘러 넘치나요? 아니죠.
 
생명이란 것은 곧 움직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반드시 움직임을 내포합니다. 
겉 보기엔 그냥 한 군데 가만히 있는 듯한 식물조차도 무생물 아닌 '생물'로 불리는 이유는..뭔가 안에서 움직이고 활동하기 때문이 아니던가요? 그야 말로 '정중동'이죠. 
씨가 심겨 싹이 돋고 뿌리가 내려져 열심히 영양과 수분과 햇빛을 빨아 들이고 받아들여 쑥쑥 자라야 하나의 식물다운 식물이 되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싱싱하다"고 표현하죠. 
존재의 가치와 표현은 싱싱함입니다. 썩어 가는 것들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도 썩어 가면 병원에서 도려내고 잘라내기 마련입니다.  

누구라도 뭐라도 움직여야 합니다. 엄마 뱃속의 아기도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열심히 자주 움직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탯줄로 영양을 죽죽 빨아 들입니다. 어느 정도 자라면 엄마가 깜짝깜짝 놀라게 발길질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음악감상도 하고요. 그래서 '태교'란 것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성경을 믿는 엄마의 참된 태교는 가치 있는 일이지요! 
아기가 태어나서도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나요? 배고프다고 기분 나쁘다고 밤낮 가리지 않고 앙앙 울어대고 보채고 뒤채고 젖을 빨고 똥오줌도 싸고 옹알이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소란스럽게 자라납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지요.   

'식물인간'이나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도 보기엔 죽은 사람과 방불하지만 그 영은 살아 있다고 합니다. 몸은 죽은 것 같고 의식은 없어도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를 죄다 듣고 이해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살아 있다는 이름과 모습 뿐, 늘 가만히 멈춘 채 자빠져 있어 움직이길 아예 거부하는 게으른 사람은 싱싱한 생명과는 아무래도..좀..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도 본문 8절에서 페트로는 그런 게으름을 언급하고 있지요. 

때때로 우리는 삶이 고달프고 피곤하여 그저 모든 것을 쉬고 멈추고 드러누워 마냥 잠만 자고 싶고 심지어 아무 것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 움직이기 싫더라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금식이라도 하고 영언(방언)이라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모든 것을 중단할 순 없습니다. 죽기 전엔.

우리는 죽지 않은 이상, 살아 있다는 이름과 겉 모습만으로 만족할 게 아니라 싱싱하고 생생하게 활동을 해야 합니다. 생동력과 발랄한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입원한 환자들도 누구나 늘, 나름의 체조나 운동을 하기를 의사들이 적극 권하지요. 지나치지 않게.

우리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이 살아 있으려면 말씀도 먹고 영언도 해서 자꾸만 움직여야 합니다. 늘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생물이나 사람이나 썩지를 않습니다(본문 4절 참조). 부패하고 썩는 것들은 움직이지 않아서 참 생명력이 모자라거나 아예 없는 탓입니다. 고인 물이 이내 썩어 가듯. 

우리가 세상에서 썩지 않으려면, 우리의 있는 생명력을 다 발산하며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펑퍼짐하게 눕거나 앉아서 마냥 편하고 쉽게만 살려고 하면 썩기 시작합니다. 
특히 속에 탐욕을 품을 때, 그렇지요. 

사람에겐 정상적인 욕구가..한 두 가지가 아니라 퍽 많습니다.  
삶의 의욕 내지 생존 욕구 외에도 너무나 본능적인 식욕, (특히 부부 사이의) 성욕, 수면욕, 소위 '귀소본능'과 그리움, 명예욕, 지적 욕구와 호기심, 탐구욕, 창작욕, 활동/노동 욕구, 발표욕, 통신욕, 사회/공동생활 욕구, 수집욕(재물욕).. 등 많지요. 구태여 '3대 욕구'로 압축하고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욕구가 절제 없이 방만하게 표출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걸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탐욕은 대상을 좇고 따르다 결국 섬기게 되고 노예가 돼 버리는,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탐욕 탓에 세상은 부패합니다. 그것은 놀고 먹되, 잘못된 방향, 잘못된 움직임이지요.  

그러나 위와 같은 욕구들이 절제 있게 발출될 때,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지요. 그런 경우, 탐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부패를 피하여 신적 성품에의 참여자가 돼야 한다고. 신적 성품은 뭘까요? 페트로가 본문에서도 비쳤지만 이것은 파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참여자'란 누굽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가만히 들어 앉아서 놀고 먹고 천장만 바라보며 자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뭔가를 보여 주기"라도 할 양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티엘티의 참여자란, 티엘티 블로그 초기화면만 켜 놓고 가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눈과 머리를 움직여 가며 뭔가를 읽고 느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댓글로써 자기 생각이나 견해를 쓰는 사람은 더 적극적인 참여자라 할 수 있겠지요^^. 

자, 다시 본문에서..그렇다면 어떻게, 뭘 해야 참여자입니까?
페트로는 말합니다: 

     "바로 그래서 여러분은 열심을 다하여.."

첫째로..우선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온 열성을 내야 합니다. 본문의 원문 자체가 그런 강세를 띠고 있습니다. 열성 없는 신자..죽은 신자이죠!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밍밍~하고 맹맹~한 신자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답답한 스타일입니다. 저도 때때로 그렇습니다만.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보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뭔가 해 내고 또 인정도 받습디다. 아무리 겉이 뛰어나고 잘 나고 머리가 똑똑해도 속에 열정 없는 사람..별 볼 일 없습니다. 별로 인정 받지 못하고 출세도 잘 못 합니다. 열정 어린 사람이 혹 자주 실수를 하고 사고를 낸다손 치더라도 그 열정 점수 땜에 약점이 커버되고 '땜빵'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꼭, '헐레벌떡', '빨리빨리' 스타일로 늘 나서거나 내세우길 잘 하고 방방 뛴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만 하면 좌충우돌하기 쉽지요. 빨리 달궈지면 얼른 식기도 하는 법입니다. 
열심이 있다면, 묵묵히, 꾸준히, 끈기 있게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열심이 있어야 자라고 성장하고 제 철에 열매도 제대로 맺습니다. 


자, 그 다음에 페트로가 뭘 말합니까?

     "믿음에 덕을.."

믿음에 덕을 어쩌란 겁니까? 더해야-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덕성/미덕에 해당하는 원어 '아레테'는 매우 폭 넓은 뜻을 갖고 있으며 선(善/goodness)과도 같습니다. 생각과 느낌과 언행, 자질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분야의 도덕적(moral)/윤리적(ethical) 탁월성을 가리킵니다.  
겉 모습은 아무리 좋아도 말씨와 행동거지가 영 이상하거나, 언행은 그럴 듯 해 뵈도 실제로는 속 생각이 비뚤어진 상태를 '미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덕성만 갖는다고 경건해집니까? 아니지요. 페트로는 더 나아가 지식을 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본문 이 부분에서 기자는 일종의 점층법을 쓰고 있습니다. 돌을 하나씩 차근차근 포개어 탑을 쌓아 올리듯 점점 높여 가면서 고조시켜 절정에 이르는 방식이지요. 
말하자면..

    탄탄한 믿음을 바닥 내지 바탕으로 삼아, 
    그 위에다 덕을 보태고..
    덕에다 지식을 보태라는 겁니다. 
    지식에다간 절제를 보태고
    절제에다 인내를
    인내에다 경건을
    경건에다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다 사랑!

이렇게 쌓으라는 겁니다. 순서가 없는, 막연한 축적공법이 아닙니다. 아무리 덕성 함양을 잘 하고 지식을 쌓아도 절제가 없으면, 지나칠 수 있지요. 절제만 갖고도 모자랍니다. 오래 기다리는 참을성-인내가 있어야지요. 인내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게 이뤄지진 않습니다. 경건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경건이라는 원어 '유세베이아'는 존경 특히 하나님께 대한 숭경심을 뜻합니다. 경건 즉 하나님께 대한 참 숭앙은 자연히 형제우애(필라델피아)를 낳게 마련입니다. 

형제우애만으로도 안 되지요. 아가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 바로 사도 파울이 말한 9가지 영적 열매들 중 첫 번째로 꼽은 것이지요[각주:2]. 이 사랑은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즉 아가페는 성령의 권능에 의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페트로가 말한 이 신적 성품은 파울의 영적 열매들이랑 대동소이합니다. 
본문 8절도 열매를 말하지요-이런 신적 성품 함양의 노력이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열매 맺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영성, 영성, 영성을 외치고 읊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살펴 보십시오. 그들에게 성령님의 권능에 의한 이런 신적 성품의 열매가 나타납니까? 

하나, 물어 봅시다:  행전 1:8에서..주님께서는 성령님이 내리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성령님이 오신 날, 제자들이 모두 영언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영언은 권능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첫 표징인 셈이지요.
그런데 영언도 안 하고 권능에 의한 신적 성품이 나타납니까? 신자는 누구나 영언을 하게 돼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모르거나 믿음이 없거나 무시해서 안 할 뿐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습니다-성경대로 안 했습니다. 알고 보니 안 하고 있었습니다. "못" 한 게 아니라. 제 논리가 잘못됐나요? 만약 잘못됐다면 지적해 주세요.

오늘날 영성, 영성, 영성을 떠드는 많은 사람들은 소위 '관상기도'란 것을 강조합니다. 어떤 분은 관상기도를 "최고/지고의 기도방식"이라고도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그건 헛소리지요. 성령께서 지정하신 영적 기도는 영언이지, 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알기, 크리스토 알기에 게으르지 않는 길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이런 신적 성품의 참여자가 되는 길 뿐입니다! 
게으르게 앉아 관상이나 하고 '떠오름' 영성이나 즐기고 '목적' 타령이나 하고 미로명상이나 하고 '크리스천요가' 따위나 하고 타 종교 및 뉴에이저들과 어울려 춤추고 해롱해롱(?) 하는 사람들이 신적 성품의 참여자가 아닙니다. 
아울러 그런 사람들은 참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몸소 쓰신 자기 말씀에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진리에서 벗어난 것들은 성령님의 것일 수 없습니다. 

자, 그런 사람들을 향해 페트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는 사람은 눈이 멀어 멀리 내다 볼 수 없고 그의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이지요."

오늘날 유난히 영성을 찾는 사람들은 과연 눈먼 자들이 아닌지, 멀리 참 진리를 내다 볼 수 없는 영적 근시안이 아닌지, 자신을 구속하신 구속자의 유일하고 고귀한 희생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자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 성령의 권능으로 
신적 성품의 참여자가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1. 필자의 글 '예수 승천은 딱 한 번?' 참조. [본문으로]
  2. 갈라티아 5:22,2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