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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정.결혼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neuhaus/뉴하우스)


아내가 남편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음식, 물 그리고 공기와  같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들 못지않게 필수적인 또 다른 내적인 욕구와 바램을 여자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소통하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필요로 하고 필사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여자를 간절하게 만드는 이 정체불명의 필요는 여자가 남편에게 공격적인 불평불만을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에 남자는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 오면 애완견한테 소리를 지르거나 고양이를 발로 차는 식으로 억누른 자신의 초조감과 삭히지 못한 감정을 표현한다. 개와 고양이는 이런 대우를 억울하나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남자들의 행동을 아내들은 애완동물 대신 남편에게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예로, 아내는 남편이 TV를 많이 본다는 것을 트집 삼아 “당신은 TV를 너무 많아 봐!” 또는 “TV 좀 그만 봐!”라는 식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편이 TV보는 것을 상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이 아내는 TV와 경쟁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항상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삶을 양과 길이로 측정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뇌에서는 실제로 자신이 TV를 너무 많이 시청하는지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의 뇌는 얼마만큼이 정확하게 '너무 많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 끝에, 대신 적절한 양의 TV를 시청한다고 합리화하고 만다. 그리고는 당연히 아내의 불평을 무시해 버린다.
남편의 이런 행동은 아내의 화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아내가 “당신은 집안 일에 너무 모르쇠야!”라고 불평을 한다. 역시 정확하게 측정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뇌는 ‘너무 모르쇠’한다는 질타가 정확히 얼마만큼인지를 측정하고 자신은 충분히 가사를 돕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아내의 이런 불평을 일축하고 만다. 아내는 더 속상해 할 수밖에 없다.

아내들이 주로 쓰는 또 다른 방법은 “당신은 아내를 사랑해?”라며 다그치기다. 남편은 “응, 사랑해. 근데 나 리모컨 좀 줘.”라고 대답한다. 이쯤이면 감정이 고조되는 아내는 “당신은 왜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어?”라며 공격한다.

“관심이 있지 왜 없어?”라고 대답하는 남편의 머릿속에서는 왜 자기 아내가 불합리적이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나 마실 것 좀 갖다 줘”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좌절감에 빠진 불만스러운 남녀는 좋은 저녁 시간이 갖기가 어렵다. 아내는 아내대로 화가 나있고 남편은 아내의 비논리적인 감정과 행동이 관계를 단절시킨다고 믿게 된다. 결국은 아내는,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얻을 희망이 점점 희박해지고, 또 점점 더 고립돼 간다.

실제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기를 원한다. 남편의 마음 속으로 사랑하지 않고 돌보기를 원하지 않으면, 같이 있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는 한결 같이, 집에 들어 오고, 월급을 가져 오고, 아내와 아이들을 눈에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집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관심의 대상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는 아내의 질책은, 남편에게는 모욕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남편들은 대부분 아내가 지나치게 비난을 할 때 자제력을 잃는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남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내들도 자신이 남편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음을 시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고통스러워 한다. 동시에 아내는 내면의 고통이 너무 커서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다 보니, 남편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명확히 소통하지 못한다.

아내는 사랑을 받고 싶다고 불평불만 하지만, 실은 사랑이 이유가 아니다. 이미 자신의 가족과 자녀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은 그녀 자신도 잘 아는 사실이다. 

또 아내는 남편이 돌보아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불평하는 진짜 이유는 아니다. 남편은 이미 가족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나. 아내 자신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관심을 더 가져 달라고 말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관심을 더 가져 달라는’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얼마만큼의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고 , 얼마만큼이 충분하다는 것인가? 

관심 또한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염원하는 것, 즉 모든 여성이 갈망하는 것은 그저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선택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선택 받고 싶은 여성/아내의 욕구가 훨씬 압도적이라고 한다. 


‘여자는 왜 결혼을 하기를 원하는가?’를 현실적인 측면에서 먼저 생각해 보자. 

현실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결혼은 여자에게는 무척 불리한 조건이다. 

아이를 낳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일부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없어지고, 대신 남편의 성을 따른다. 출가외인으로 취급 당하고, 식구와의 단절도 겪는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가정을 꾸려 나가고, 요즘 같이 평등주의를 부르짖는 시대도 대부분의 가사 일은 여자의 몫이다. 그뿐인가. 현대는 여자는 일해서 부수입까지 벌어야 하는 시대다. 

자신을 무조건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일관성 없는 사랑을 하는 남자에게로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래라고 치면 손해나는 거래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결혼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부모가 줄 수 없는 것을 남자가 주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오직 남자만이 여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남자만이 여자가 유일무이한 특별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준다.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할 때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세상의 많은 여자들 중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선택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결혼식 날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자는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그녀의 수많은 친구들이 기뻐해 주는 동시에 부러워 하는 이유다.

성경은 아담에게 적절한 그 어느 창조물도 있지 않았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 이브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데리고 오시기까지는 아담에게 적합한 상대가 없었다. 이것을 아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어느 피조물도 여자와의 만남이나 여자와 연합하는 것 같은 관심을 그에게서 끌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은 이브를 보고서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고 고백한다. 모든 창조물들 중 이브야 말로 아담이 같이 하고 싶은 상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한 여자를 선택하여서 한 몸을 이루고 생애를 같이하는 아내로 삼는 이 선택은 남자로 하여금 부모를 떠나게까지 만든다. 대단한 헌신이자 희생이 따르는 결단이자 선택이다.

여자가 남자의 바로 이런 마음을 알 때, 즉 남자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자신과 같이 하기를 원하는 것을 알 때, 여자의 깊은 내적 욕망은 채워지는 것이다.

여자의 이런 내적 욕망을 아는 남자는 여자가 바라는 것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으로 충분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택함을 받아야 한다. 여자는 선택 받기를 원한다. 모든 남편은 아내를 먼저 선택하여야 한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불평불만 하는 아내는 남편이 TV를 많이 보든지, 비디오 게임을 많이 하든지, 일을 너무 많이 하든지 실제로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런 모든 것 대신 자신을 택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아내가 자신의 최우위임을 자주 규칙적으로 보여 주고 실천하는 남편은 무척 행복한 아내를 갖게 된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토로하는 불평불만 하는 것과는 달리 24시간 7일 내내 남편의 관심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남편의 관심사와 취미에도 실은 관심이 없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규칙적으로 의도적으로 아내를 선택하는 것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자신이 즐기는 쇼를 보는 대신 아내에게 “이거 그만 보고 우리 산책 갑시다.”라든가, 집에 일거리를 가져와 컴퓨터에 매달리는 대신 “컴퓨터 끄고 당신 얘기 좀 들어 봅시다.”라고 말해 보자.

골프 약속이나 낚시  약속을 취소하고 “친구들과 골프 하러 갈려고 했는데, 취소하고 집에서 당신 좀 대신 도우려고 해.”라고 말해 보자.

아내를 택하는 행위는 아내에게 사랑과 헌신을 재확인시키는 행동이다. 아내를 먼저 택하는 행동을 규칙적으로 보여주면 아내의 반응은 극적인 차이를 보일 것이다.

아내를 택하는 노력을 계속 보여주면, 오히려 아내는 남편을 밖으로 밀어내고 남편이 좋아하고 즐기는 활동을 하게끔 하게 마련이다.

반드시 남편은 “이것 대신 아내를, 저것 대신 아내를 택한다는 것을, 자신의 친구들 대신 아내를 택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직접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루를 끝낼 무렵에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돕는 것은, 곧 아내를 택한 사실이 얼마나 잘한 일임을 그녀에게 보여 주게 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여 결혼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는 것을 전제한다.
단지 결혼식을 올리는 것만으로 아내 선택, 부모로부터의 떠남의 형식에만 머물고, 실제 생활에서는 택하지도 떠나지도 않은 남편의 행동에서, 많은 아내는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자신을 먼저 선택해 줄 것을 필사적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우선순위인 것을 알고, 남편이 언제고 아내를 택하는 것을 아는 아내는 비로소 욕구가 채워지고 안정감을 느낀다. 가족을 돌보는 헌신과 희생이 공허하지 않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할 위협을 느끼지 않기에 그렇다. 행복한 아내는 곧 남편과 온 가족의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There’s no place like home.”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듯, 행복과 만족을 찾기 위해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도 내 가정만 한 곳은 없다.

행복해 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둔 남편은 천국 다음으로 천국 같은 세상에서 산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