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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

아브라함의 복은 유대계만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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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복은 유대계만의 것?

요즘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가 일각에서 활개치고 있다. 한국 오순절계/보수계 사람들 다수도 참여해 왔다. 기독교 시온주의의 배후엔 복잡하고 다양한 세력들이 있기에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보수주의를 표방한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퍼부어 준 것 못지 않게 이스라엘에 퍼부어 주며 지원해 왔고 '성지순례'도 적극 장려한다. 그들의 포인트는 물론 장/단점이 있다. 또 잘 몰라서 그럴 여지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잘못 한 가지는 유대계만이 하나님의 참 복을 받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발상이다.

신약시대/성령시대/교회시대/복음시대인 지금도 오직 유대계/이스라엘만 '선민'이라는 생각은 참되지 않다. 실상 유대계는 성경 대로의 메시아를 믿지도 않는다. 예나 이제나 예수 크리스토를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핏줄이기에 아브라함 후손으로서 받는 복은 자기네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아브라함의 핏줄이기에 유대계만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야 한다면, 이슈마엘을 통해 아브라함의 핏줄을 나눠 받은 아랍계 무슬림들도 아브라함의 복을 누려야 한다! 그럼 결국 지구촌에서 유대계/아랍계만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민족이라는 얘기가 돼 버린다.

그러면 기독교 시온주의는 자연스럽게 편파성 이즘이 되고 만다. 정직하게라면 '기독교 시온주의'뿐 아니라 '기독교 메카주의'도 생겨 나야 옳지 않나? 단지 아브라함의 정통 후손만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가? 

오해 말라. 필자는 신 나치 같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필자는 성경주의자이며, 가여운 유대계 영혼들을 사랑한다.
하지만..우리가 아는 대로 [성경에 따르면] 이슬람교도 철저히 잘못된 종파다. 유대교나 회교나 진리에서 거리가 멀다.

알고 나면, 유대교 경전인 구약 성경만으로도 참 메시아는 예수 크리스토라는 것이 넉넉히 입증된다. 구약 대언자의 모든 예언을 예수님의 성취 내용과 대조/비교해 보라-그런 결론이 나나, 안 나나.

아브라함의 복은 만민의 것!

지금도 유대인들은 온 세계 민족들 중 자기네가 유일한 선민이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은 자기네 것만이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천만에..그들의 유일한 경전인 구약성경부터가 그렇게 돼 있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불러 주시면서 아브라함 혈통 뿐 아니라 분명히 "땅의 모든 족속"이 그 복의 대상이라고 하셨다. 한 두 번도 아니고 거듭거듭 그렇게 되뇌신다(창세기 12:3b, 18:18b, 22:18, 26:4b).

뿐만 아니라 구약의 이 기록들은 신약성경과 완전 매치(match)되고 조화된다(갈라티아 3:6~14, 롬4장 등 성구들 참조)! 사도 파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정통 유대교인이었고 샤울 왕가의 가문인 베냐민 족이지만 (파울의 본래 이름도 '샤울')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명언했다.  
단, '만민'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조건 없이 자동으로 세상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값싼 복이 아니다. 조건이 있다.
예수 크리스토를 주님, 유.일.한. 구세주로 믿어야만 한다.

[유일한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 까닭: 구세주가 두 명 이상일 리가 없잖은가. 만약 석가모니도 구주다, 공자/장자/노자도 구주다, 마이트레야(미륵)도 구주다..이렇게 되면 진짜 구주가 없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이름만의 크리스천들이 있기에 하는 소리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자체가 유대인의 주장을 지지해 주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유대인들이 현재처럼 예수 크리스토 아닌 다른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그 '메시아'도 과연 위의 창세기 예언대로 만민을 위한 '메시아'일까, 아니면 유대계만을 위한 '메시아'일까, 아니면 만민을 위한 '메시아'로 위장하고도 실상은 유대계의 이익을 추구해 주는 '메시아'일까..?

신약의 행전과 서신서 기록을 보면, 예수 크리스토를 참 메시아로 받아 들인 일부 극소수 유대인들이 시작한 초기 교회를 통해 유대인들 뿐 아닌 이방인들도 성령의 은총을 받고 복을 누리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그들을 혐오하고 기독교를 '가짜', '이단'이라고 단죄했다. 자기네 유대교만 정통이라는 것.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인들 대신 이방인들을 놀랍게 복 주신 까닭 한 가지는 유대인들이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로서 거부했기 때문. 제 복을 제 발로 차 버린 격이다.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아브라함의 복이 온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아브라함의 복이 오지 않거나 (유대계인 경우) 극히 일부만 온다. 유대계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유대계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받은 바 복이 많건만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기에 마귀 싸탄의 지배를 받아 그 아깝고 엄청난 재물을 아낌없이 세상 왕국에 퍼붓고 있다. 하늘 왕국 아닌 세상 왕국에 속했기에 결국 마귀를 섬기고 있다. 하늘 왕국에 속하는 길은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믿는 길 밖엔 달리 없다.

주권주의

앞서 언급한 기독교 시온주의의 배후엔 주권주의(dominion theology)가 개재돼 있다. '주권주의'란 쉽게 말하면, 예수님 재림 전에 지구촌에다 하나님 왕국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하자는 사상이다. 카톨맄 신학의 대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개혁가 장 칼뱅을 거쳐 네덜란드의 정치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로 이어져 온 주권주의는 미국에서는 칼뱅주의자 루서스 잔 러쉬두니를 통해 크게 꽃폈다. 러쉬두니는 '기독교 재건(또는 재편)주의'란 이름으로 주권주의를 포장해 미 정계의 우파/보수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순진한 칼뱅주의자들이 한 가지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실은..주권주의라는 것은 알고 보면 하나님 왕국을 위한 게 아니라 싸탄의 세상 왕국을 위한 것이라는 점.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기에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된다고 믿고 있지만, 세상은 현재 엄연히 마귀 싸탄이 다스리고 있다. 필자의 졸견이 아니라 성경의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참조: 뤀 4:6, 요한서신A 4:4, 5:19, 요복 8:23, 12:31, 14:30, 코린토B 4:4, 엪2:2, 6:12)!

그렇다면 더 모순된 것은, 칼뱅은 카톨맄 교회나 다름 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제네바 '신정 통치'를 펼쳐 나갔다는 사실. 즉 이단자라고 해서 카톨맄처럼 세르베토를 화형시켜 가면서까지 '신정'이라는 걸 강행해 나아간 칼뱅의 제네바 '신정 통치' 자체가 자신이 강조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역행했다는 점이다. 이런 역사적 진실을 후기 칼뱅주의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실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지구촌주의(글로벌리즘)는 아우구스티누스/칼뱅/카이퍼/러쉬두니를 신봉하든 말든 실제로 주권주의를 실행하고 있다. 그 점에서 바티칸 지상 신정 황국을 이룬 카톨맄과도 일맥상통한다. 성경에 따르면 분명히 세상과 구별돼야 할 성도들까지 싸탄 왕국인 세상에 깊이 관여된 사실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소치다.

이 주권주의 운동에 공개리/암암리에 가담해 온 단체들이 무수히 많다. 겉으로 버젓한 간판을 내 건 단체로부터 비밀집단까지. 예컨대 지금 소위 '신사도운동', 중보기도운동, 대언자학교 운동 등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의 '사도', '대언가', '장군'으로 활약하는 은사주의의 대부 격인 피터 왜그너, 신디 제이콥스, 맄 조이너..등 명사들, 또 그들과 직간접 연계된 사람들이 주권주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돕고 있다.

더구나 의문성 집단인 '말타기사단' 회원이자 그 단체의 미국 기사단장(기사임명권 보유)인 자칭 대언가 맄 조이너 등은 중세 기사도 정신, '아터 왕과 원탁기사들'의 전설 따위를 매우매우 강조하는데..이 모두가 기독교 진리보다는 주권주의에 더 관련이 있다. 맄 조이너 등을 무턱대고 대단한 모범 대언가인 양 여기는 한국 K교회 등 교계 일각에 우려의 시선을 갖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도대체 무슨 복인가

그건 그렇고..그럼 아브라함의 복은 한 마디로 뭔가? 아브라함이 누리던 모든 복을 뜻한다! 아브라함 부부와 이짜크 등 그 후손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신앙 열정 뿐 아니라 물적으로도 풍요로웠고 몸도 건강/장수했다. 요즘 말로 소위 전인적/통전적인 복이다.
그렇다면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도 응당 그래야 한다! 아브라함의 복에서 한 가지 또는 몇 가지를 빼 버린 복은 통전적인 '아브라함의 복'이 아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아브라함의 복에서 이것저것을 뺀 나머지 영적인 복만 달랑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교계 인사들이 많아서다. 날로 더 늘어 간다. 일부 십일조 반대자들과도 맥락을 나눈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런 사람들에게 해 주고픈 말이 있다. "이제 좀 살 만 하니까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거지가 아니니 아브라함의 풍요의 복은 불필요하다"는 말인가? 과거 한국 교계가 가난할 때는 애타게 주님께 간구하며 살더니 좀 살림이 펴지니까 그 복은 빼고 영적인 복만 누리겠다는 것인가.
주변에 약국과 병원이 줄줄이 널렸으니 아브라함의 복의 일부로서 오는 치유와 건강도 필요없다는 얘긴가. 그럼 모든 의약을 다 사용해도 안 낫는 사람들, 의약을 이용할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들만 예수를 믿고 아브라함의 복을 누려야 하는가. 가난해 보질 못하고 아파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는가.

다시 묻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와 영적인 저주만 깨뜨리셨는가, 아니면 모든 저주를 다 깨버리셨는가. 주님이 박살내 버리신 저주의 범주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것인가?

예수님과 이름이 똑 같은(!) 지도자 예슈아(본명 호세아 였으나 모쉐가 바꿔줬다) 장군은 이스라엘의 광야2세대를 카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어 간 얼마 후, 하나님의 대명과 모쉐의 유언에 따라 백성을 두 무리로 나눠 그리짐(그리심) 산 앞에서 복의 선언을, 에발 산 앞에서 저주의 선언을 했다(신명기 27:12~26절, 28장~30장 참조).

'그리짐 선언'에 따른 복들은 한 마디로 영/혼/육에 도움되는 온갖 좋은 혜택과 은총이다. 영적/정신적/육적/물적인 형통과 번영, 치유와 건강, 장수 등 한 마디로 모든 잘됨이다. 이 그리짐 선언 내용은 야베즈의 기도와도 직결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복이다!
 
이와는 반대로, '에발 선언'에 따른 저주들은 영/혼/육에 마이너스가 되는 온갖 저주와 그 증상들-질병/가난/단명/공포/재앙/피지배/억압/학대..등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다. 엄연히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에발 선언'에 수록된 모든 저주 항목들을 예수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상에서 영영 깨 버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되찾아 주셨다(갈 3:13). 할렐루야!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만민이 누리는 아브라함의 복은 뭔가? 그리짐 선언의 모든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안 믿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자신만 안 믿을 뿐더러 공공연히 나서서 [아브라함의 복 빼기 몇몇 = 나머지] 공식을 성경계시와 대등한 진리인 양 정당한 양 주위에 뿌리고 있다. 반 십일조론을 비롯, 반 형통론, 반 번영론, 반 현대은사론(본명 '중단론'), 반 현대이적론..한 마디로 반대와 '안티'는 거의 다 건전하다(?)고 착각하는 사상과 사상가들이 그렇다.

만약 말이다..그런 주장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랑(!) 영적인 저주만 깨고 딱(!) 영적인 복만 회복하셨다면..아브라함의 복이라고 할 게 뭔가? 아브라함의 믿음 뿐인가? 그럼 유대계는 뭔가? 그들이 대대로 받아 온 복은 "아브라함의 복 아닌 아브라함의 복"인가?

물론 십자가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어 구원을 얻게 된 것 만큼도 우리로서는 엄청난 은총이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뤘다!"고 선언하실 때 죄 문제만 해결하시고 영의 구원만 해결하신 것인가? 그것이 과연 모든 저주를 다 깨뜨린 것인가?
주님은 왜 생시에 병을 고쳐 주시면서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소"라고 번번히 말씀하셨나? 왜 마태는 이사야 53장의 메시아 대언을 인용, 질병과 구원을 직결시켰나(마태 8:16,17)? 루카는 왜 주님이 성령의 기름부음 받으신 것을 전인적/통전적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라고 기록했나(뤀 4:16~21)?
     
요즘 교계에서 이른 바 '기복주의'와 성공주의, 번영주의, 형통주의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일리도 있다. 한국 대형교회의 부패상을 볼 때 이런 규탄에 옳은 포인트가 없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게 잘못인가? 성공을 비는 게 잘못인가? 번영을 비는 게 잘못인가? 형통을 비는 게 잘못인가?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그럼 멜키쩨뎈의 축복은 뭐가 되나(창 14:19)? 이짜크의 축복 예언은 어떻게 되나(창 27:27~29). 야콥의 서원은 뭔가(28:20~22)? 야베즈의 기도(연대기A=역대상 4:10)는 뭔가. 멜키쩨뎈/이짜크/야콥/야베즈..등 믿음의 선조인 구약인들이 모두 기복주의자들인가. 

구약인들은 다르다고..? 그럼 요한서신C(요삼) 2절은 뭔가. 그건 아브라함의 복이 아니라 가이우스(그앞 1절 참조)에게만 해당하는 복인가?

만약 그들 논리대로 하나님께 이런저런 복을 구하는 교회의 '기복주의'가 규탄 받아야 한다면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도 마땅히 규탄받아야 마땅하다! 아니 아브라함에게 그런 온갖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도 규탄돼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반 기복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믿는 그대들이 현재 누리는 것들은 복인가, 아닌가. 그대들 자신의 노력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그대들의 노력은 태초에 인류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고 재차 복 주신(창 1:27,28, 9:1) 결과는 아닌가? 하나님이 돈 벌 슬기와 권능을 주시는가, 안 주시는가(신명기 8:17,18).
복을 잘못 구하는 형태의 신앙이 교회 안에 스몄을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행위가 모두 '기복주의'라면, 그런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반 기복주의이고 옳은 것이라면,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아무 복도 기대하지 말아야 옳다! "만 복의 근원 하나님"이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아브라함 복 누리기 방법

우리를 당혹시키는 것이 남아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영 왕창 박살 내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에발 선언' 항목인 율법의 저주와 그 증상들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가난하고 병을 앓고 일찍 죽고 재난을 당하고 겁과 두려움이 많은 등등 사실 상의 저주를 겪고 있다.
왜 그럴까? 주님의 죽으심도 강력한 율법의 저주 앞에선 맥을 못 춘다는 뜻인가?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이 헛말, 거짓말이라는 뜻인가?

첫째로, 십자가에서 신자들의 과거의 죄가 모두 사해져도 여전히 우리에겐 현재 짓는 죄악들이 있다. 모든 죄는 결과가 따른다.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같은 것이 생기지 않게 죄를 범치 마오"라고 하신다. 죄를 지으면 재발한다는 뜻이다.
낙태를 하면 결과가 온다. 죄의식과 두려움이 오고 심지어 자살기도까지 한다.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낙태한 사람들은 철저히 회개해야 옳다. 

둘째로, 예수께서 저주를 완전 박살 내신 사실을 모르거나 그 효력을 적용하지 않아서다. 저주 박살의 결과로서의 효력은 내가 나의 믿음, 나의 의지, 예수 이름과 나의 말씀 선언으로 적용해야 옳다.

독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입술을 주셨다고 생각하나? 단지 좋은 모양으로선가? 밥 먹고 키스하라고만 내신 것인가? 입술과 혀를 내신 중요한 이유는 믿음의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고백! 믿음의 선언! 

사람의 혀와 입술엔 무서운 권능이 있다. 말에는 복과 저주의 권세가 있다. 역사는 주로 말로 이뤄진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세상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사도 야코보는 혀와 입술의 이 놀라운 권능을 그림처럼 묘사하기도 했다(야코보서 3장 참조). 우리는 혀와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살아 간다(다음 구절들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잠언 12:14, 13:2, 18:20). 매일 우리가 하는 말에 우리의 삶이 좌우된다!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하면 자녀가 복을 받게 돼 있다. 자녀에게 저주를 하면 그 저주대로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남편과 아내를 축복하면 서로 잘 되게 돼 있다. 동료 교우를 축복하고 사역자들을 축복하고 이웃을 축복하면 그들의 복이 될 뿐더러 나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한 가지 잊지 말 사실은 아브라함의 복 선언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필수적이라는 것. 우리가 입술로 축복하고 믿음의 선언을 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이 이름은 전능한 이름이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구하면 뭐든지(whatever) 다 된다. 필자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약속이다(요복 14:13,14, 15:16, 16:23,24,26).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로고스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선언할 때 흐레마로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혀와 입으로 믿음의 선언, 고백을 할 뿐더러 찬미의 제사도 드린다. 뿐만 아니라 방언을 한다. 방언은 입술로써 하는 신자의 중요한 일상 활동의 하나이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의 복을 얻는 지름길이다.  

영적 건강과 은총, 권능과 성령의 은사들, 평화는 물론, 성공과 번영, 형통, 치유와 건강, 장수 등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게 없다. 모두 주님의 뜻이다.

독자들이여. 필자는 독자들을 축복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독자 모두에게 넘치길! 독자들도 본 티엘티와 필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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