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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

차가움과 따스함



김삼

초등학교 때, 그뤂 친구들과 백열등과 형광등-어느 쪽이 더 따스해 보이냐로 말다툼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단연코 백열등 쪽이었습니다만, 친구들은 한사코 형광등 쪽을 고집하더군요. 결국 우리끼리 판가름할 수가 없어 존경하는 그뤂 지도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빛 색깔은 현상일 뿐 어차피 두 가지가 다 따스하지 않냐시며, 각자의 느낌을 존중하자는 쪽으로 가름하셨습니다.  

굳이 동양의 '음양론'을 빌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것이 차가움과 따스함의 조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달은 따스해 뵈지만 정작 표피는 차갑고..해는 추운 겨울에도 늘 뜨겁습니다. 우리는 한 여름에도 차디찬 아이스크림을 즐기며 심지어 겨울에도 냉장고는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삶에서 차가움도 따스함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사람도 차가운 인상의 사람이 있고, 따스해 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후자가 더 점수를 얻고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자가 마냥 본질까지 철저히 차갑다거나,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이라곤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따스한 인상의 사람들로만 충만하란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잠깐 글 놀이 같은 것을 좀 하렵니다. 사람이 따스하다는 것은 결국 정을 의미합니다. 정이란 것에도 미운 정, 고운 정이 있다지요. 
한자 '정'(情) 자체가 "뜻 정" 자입니다. 글자의 구성을 보면, "마음 심"변과 "푸를 청"이 합해진 것입니다. 이 정자와 가장 비슷한 모양의 한자가 "맑을 청(淸)" 자로, "삼수 변" 곁에 역시 "푸를 청"이 붙어 있습니다. 물이 누렇지 않고 푸르러야 맑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푸르고 뜻이 곧다는 것이 결국 참 정(情)의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색감으로 볼 때, 푸른 것과 누른 것..어느 쪽이 더 차갑고 따스할까요?  


수십 년을 살면서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사귀어 겪고 부대끼며 지내봤지만, 그들 모두가 따스한 정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찬 것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늘 "뜻 정"자의 본질은 아니더군요. 혹 뜻이 바르지 않고 마음이 푸르지 않더라도 일단/우선/으레 따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신도 그럴 때가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정이란, 본디 한자의 뜻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시고 모델이시지만, 우리가 흔히 선호하는 그 '정'의 사람이라고 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차가울"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파리세인들을 향해 "독뱀 새끼들아!"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종교인들을 향해 그런 말을 감히 쓰기 어려울 터입니다. 

주님께서는 줄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환전상들을 후려치시고, 그들의 물건들과 상품들을 온통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분이 가득한 때라 해도, 여태 그런..만행(?)을 저지른 적이 없을 터입니다.   
   
누가 봐도 우리들이 주님보다 차갑다고 할 순 없을 터입니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그 분으로이시겠습니까?


그런데..우리 주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중대한 문제이죠.
왜 주님은 그 분께 나아오는 유다의 모든 환자들, 장애우들을 일일이 맞아 주시고 고쳐 주시고, 환대하셔서 따스한 사랑과 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명성에 어긋맞게, 이루 더 차가울 수 없이 그런 차가운 언행을 하셨냐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가 복잡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 물과 기름이 합할 수 없듯, 진리라는 것은 결코 비진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흔히, 비진리를 용납하는 정과 (나름) 사랑의 '진리'를 따로 말합니다. 물과 피를 섞듯 진리와 비진리를 조화시키려 듭니다. 하지만 그건 편리한 진리론이지, 바른 진리론은 아니지요. 
적어도 진리 문제에 있어, 우리는 차든지 따스하든지 어느 한 쪽이어야 합니다.  


현대심리학에서는, 자기 마음의 말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융화'(fusion)와 그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는 해리(解離/defusion)라는 것을 구분하여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질상의 마음은 배척할 수도, 분리시킬 수도 없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융화도 해리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어느 쪽도 진리가 아닙니다. 신학이라면 모를까, 심리학은 절대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심리학에 굴복할 수 없는 신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은 진리로써 다스리고 훈육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가 말해 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뭐래도 진리의 사람은 비진리와 타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타협 불가의 존재이셨습니다. 
비진리 앞에 단호 그 자체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그 분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죠. 

진리를 말하는 우리는 태도는 물론 되도록 따스해야겠지요. 늘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 터입니다. 
그러나 [情 = 心 + 靑]처럼, 따스함도 어디까지나 뜻이 곧아야 바른 따스함입니다. 
비진리에 대한 타협은 바른 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를 지키고자 할 때는, 차가운 인상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열정이 뜨거우면, 사랑이 진리와 나란히 함께 합니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 또는 진리를 지키려는 태도는 율법주의와는 다릅니다. 율법주의는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계율에 얽매어, 남도 얽매려 하는 태도가 곧 율법주의입니다. 노예들의 노예화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진리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참 사랑에도 노예가 됩니다. 

성전 상인들에게 채찍을 가한 주님 속에는 하나님의 성전 곧 진리를 향한 열정이 그 분을 삼킬 정도로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참된 따스함은 푸르른 진리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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