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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왜 바라봐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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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TLT 공동체 일원의 물음에 답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과 관련하여..]

도대체 바라본다는 게 뭐죠?
예수님의 삶의 자세를 바라본다는 건가요? 그 분의 사랑을?
저는 정말로 예수 크리스토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곁길로 나가지던 걸요. 바라보는 걸로, 어떻게 곁길로도 안 나가지고 흔들리지도 않게 되는 건지요.

바라보라, 바라보자..정말 많이 듣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심지어는 관상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가기는 딴 길로 가면? 바라보고 본받자 라는 의미라면 좀 더 구체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김삼 답변:
우선 해당 성구부터 살펴 보죠.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분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 때문에 부끄러움도 무시해 버리시고 십자가를 견디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 12:2 사역)

질문자님께서 '바라보자'만 붙잡고 늘어지시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 말씀 앞에.."우리에게는 이렇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열심히 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없애 버리고, 우리를 쉽게 옭아매는 죄를 벗어 버립시다."(쉬운성경)란 말씀이 있지요.

즉 (바로 앞 장인) 히브리서 11장-믿음의 박물관-에서 수많은 신앙 선인들의 순례적 여정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도 아울러 믿음 경주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달리기 하는 사람이 어딜 봐야 합니까? 앞을 봐야 합니까, 옆을 봐야 합니까?

제 개인 얘긴데..저는 본디 좀 약한 무릎을 타고 났습니다. 어릴 때 한 번 다치기도 했고. (그래서 욥4:4, 이사야 35:3, 히브리 12:12을 좋아하지요^^) 마라톤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느린 장거리 달리기나 조깅/워킹은 종종 하고 있습죠.

그런데 달리기/걷기를 하다 옆을 보면 잘 안됩디다. 금방 선 밖으로 벗어나기가 일쑤지요. 앞 사람과 부딪치기도 쉽고. (바닷가 산책로처럼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다가 biker나 롤러블레이더들에게 부딪칠 염려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 반드시/반듯이 앞을 바라보고 달려야 제대로 뛸 수 있습니다. 앞 쪽은 목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궁극적인 목표지점-예수님-을 늘 바라봐야지요. 할렐루야~!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 말씀이 떠오르곤 하지요. 나란히 서 있던 친구들이 주위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노라면 "야들아. 느그들 까재미 눈까리..하지 마라 캤제? 온나, 오늘 단체기합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볼거리/들을거리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칫 한 눈 팔다간 가자미가 되어 볼 장 못 볼 일들이 생기기 쉽죠. 마치 '순례자 여정'(Pilgrim's Progress 일명 천로역정)에서 장망성(장차망할'넘'의성)을 떠난 크리스천과 벗이 길가 장터에 한 눈 팔고 끼어 들었다가 한때나마 피 보는 것처럼.  

또, 그리스 신화 속의 3개 섬-시레눔 스코풀리-의 새 날개 달린 세 요녀들 세이레네(사이렌)가 황홀한 노래로 뱃사공들을 꾀어 난파시키던 것처럼 우리를 꼬시는 것들이 세상에 가득~한데 우리는 신앙 마라톤 선수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한 눈 팔지 말고 앞의 목적지-예수님만 바라봐야지요.

누군들 한 눈 팔고픈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영혼의 안전을 위협하는 싸탄의 덫/함정이 파여진 곳에다 한 눈을 팔아선 안되겠죠. 굳이 눈길을 팔겠다면 오직 예수 크리스토 한 분에게만 눈길을 팝시다.

에..그리고 또 한 가지, 꼭~ 하고픈 얘기가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우리 사랑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벌거벗고-거의 알몸으로 돌아가셨다는 거..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주님의 부끄러움이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상세한 묘사를 하지 않았지만, 이 기자는 완곡히 표현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먼저 프레토리움에서 사형수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가벗겨 거의 사형에 가까운 채찍형을 가했고, 그대로 (또는 대강 옷을 입힌 뒤) 성밖 처형장까지 거의 전라로 행진하게 만들었지요. 십자가 위에도 그대로 매달고. 이런저런 사기에서 입증됩니다. 예수님도 겉옷과 속옷 모두 뺏기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 분이 철저히 온갖 수욕과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바로 나를 위해! 우리 위해! 할렐루야~! 우리 위하여 온갖 부끄러움을 당하신 주님께 영원히 영광~!

그러니까 그런 어려움과 수치/수욕을 당하신 그 분을 통해 구원 받은 우리는 마땅히 믿음의 창시자/완성자이신 그 분만 바라봐야지요. 달리 누굴 바라보겠습니까? 출발점도 우리 믿음의 창시자와 함께, 종착점도 우리 믿음의 완성자와 함께.  

가끔 세상 유혹에 시달리다 잠시 가자미가 되어 한 눈 팔았더라도 얼른 다시 뉘우치고 눈을 돌려 우리의 최종 목표인 주님을 바라봐야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