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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저런 글

위선의 양파껍질

왠지 그냥 쓰고 싶어 씁니다. 두서 없고 흐름도 없고 목표도 토핔도 없는 글이 될지도 모릅니다. 공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씁니다. 객관성이 강조되는 검증의식보다는 사적/주관적인 냄새가 농후한 자의식이 강할 때 일부러 글을 피해 왔습니다만.."결국 이 블로그는 당신의 블로그가 아니냐"고 던진 누군가의 말에 용기(?)인지 의욕인지를 얻어서 씁니다. 지금이 자의식이 강한 때인지 어쩐지는 글을 써 봐야 알겠습니다.

봄철에 첫 미소를 피우는 꽃들로부터 순결해 뵈는 흰눈까지 모든 계절을 사랑하는 저이지만..이 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런 암시도 띄우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동지가 지난 지가 꽤 오랜데도 아침은 여전히 새벽처럼 어둡고, 뜨고 난 해도 희뿌엽니다. 별로 춥지도 않건만, 허전한 빈 구석을 메우기나 하듯 목도리를 두르고 여미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늘 주님으로써 가득 차 있지 못한 약점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오늘 새벽기도는 나도 모를 말로 일관했습니다. 물론 방언 자체가 나도 모를 말이긴 하지만.
기도 중에 나는 글로써 (완벽자가 아닌) 완벽주의자인가를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글발이 어떤지는 몰라도 저는 말발은 약합니다. 주체(주책?) 없이 막 흘리기도 합니다. 소위 '영빨'이 대단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명사가 많은 사회 내지 교계에서 명사가 되긴 더구나 싫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알리기에 전념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 간혹 물끄러미 바라 보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을 알리긴 알려야 하는 때와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저는, 독자들의 일부가 생각하듯 그렇게, 오로지 비평을 위해 태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글이 무슨 변명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로 일관하기 위해 쓰는 글도 아닙니다. 아무튼 가없이 약하고 추한 자신을 돌아 보게 됩니다. 글로써 대화를 하다 보면, 순수가 한층 아쉽고 그리워지곤 합니다. 나 자신 그렇게 순수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세월을 지내오면서 보니, 결국 참된 순수란 인간의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속에 일말의 순수란 게 있다면 말씀이 담길 때 그렇습니다. 나의 위선과 추잡함과 간악함도 크리스토의 보혈과 말씀으로만 정화될 뿐입니다.

의식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지없이 더러운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고상하거나 깨끗하다고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나 현실과 상황이 나를 배신해 버리곤 합니다.
이럴 때 말씀의 빛을 받아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 보면, 실상을 알게 됩니다.

눈총이 내부지향적이기보다 외부지향적일 때 사람은 교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내부지향성이 마냥 좋은 건 아닙니다. 지나치게 자의식적, 자아비판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의 껍질을 벗는 것이 참된 도덕성의 관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미워하신 것이 위선입니다. 나 자신 그 분 앞에 발가벗고 설 때, 정말 똥감태기 위선자입니다. 구린내가 진동하다 보니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리에 충실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맘까지 진리를 버려선 안되겠지요.

지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부류의 하나가 프리메이슨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 행세로부터 모든 것을 잘 연출해 냅니다. 비밀과 의리에 충실하느라 그 연출 행위를 죽음까지 지탱하고 몰고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의 참된 거듭남을 모릅니다. 예수 크리스토의 유일절대성을 절대 인정하질 않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프리메이슨들과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자신이 프리메이슨 의혹을 끈질기게 받아 온 빌리 그래엄을 '거듭난 사람'으로 보는 독자들은 그의 수십년간의 대 언론 어록들을 보면 놀라 자빠질지 모릅니다.
요전날 사석에서 만난 교계의 한 저명 인사는 저의 말을 듣고 "빌리 그래엄이???!!!!"하고 놀라 크게 외쳤습니다.

지난 여러 해 빌리 그래엄의 어록을 검증해 본 결론은 적어도 성경에 따르면, 그는 거듭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전도대회 설교와 대 언론 어록을 비교해 보면, 그는 철저하고 지독한 사상 최악의 위선자의 한 명입니다! 그의 대 언론 어록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님을 자증해 줍니다. 그래엄은 프리메이슨 청소년단인 '드몰레이'를 적극 찬하하고 장려한 사람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등의 검증 없이 그를 철저히 믿어주는 사람들의 간과 쓸개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곤 합니다. 덮어주고 가려주는 미디어의 권능 탓인가요.

오늘날 미국 교계는 그래엄의 뒤를 이어 명사로 활개치는 사람들이 하고 많습니다.
참담하고도 흥미로운 것은 한국 교계는 서양 선교사의 복음을 받아선지 해외 교계 명사들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임해 주고 그 모든 책과 사상들을 넙죽넙죽 생각 없이 받아 자신다는 것입니다.
발트와 불트만과 그 진보적 후예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학인들처럼, 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사상을 쌍수를 들고 맞아 주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필칭 복음주의를 내세운 많은 교계 명사들은 철저한 위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복음주의'란, 숨은 어젠다와 목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 성경진리를 높이려는 의도가 아니란 것을. 그들이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듯 보여도 실상은 피라믿 꼭대기-관석(冠石)으로 묘사되는 신세계질서와 세계통합이라는 이상(理想)의 노예에 불과하단 것을.

믿기 어려운 것들, 아니 믿기를 거부해온 것들이 사실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검증도 그런 것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평소의 방심과 안심/안일과 무검증, 무대책이 끓는 가마 속 개구리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란 격언을 믿는 게 좋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모든 영을 예외 없이 검증해 보라고 말합니다.

빌리 그래엄이라고 해서, 기타 교계 명사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끝없이 믿어 주는 한국 교계의 어리석음(예!)을 볼 때 답답한 맘,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위선에 대한 시인은 말씀 진리 앞 투명성이어야지, 귀에 들리고 눈에 나타난 그럴 듯한 모습이어선 안됩니다.

두서 없는 글이지만..
되돌아 와 거울 앞에 서 봅니다.
자기중심성, 지나친 자의식도 위험하고 해롭지만
타인중심성, 명사중심성도 더 해롭습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돌아보는 것과 타인을 명사라고 해서 무조건 믿어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크리스토를 바라보고
그 진리에 단연코 충실하여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고
그 안경으로 남을 검증해 봐야 합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더라도 말입니다.

과대포장된 위선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가려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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