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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이적과 표징의 의미성 (요한복음묵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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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읽기힌트 : 김삼의 글은..성경 인명/지명/권명을 비롯한 모든 외래어를 그 나라 언어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추구합니다. 혹 한글식 표기법이 생경스럽더라도 이 점을 미리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2:23-25


유월절 기간 동안 주님은 예루샬렘에 머물러 계셨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초자연 사역을 보고 놀라워 마지 않으며 주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주님은 그 몸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기자 사도 요한은 여기서 특유의 해설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도처에서 이런 해설들이 발견되지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을 몸소 아시기 때문이고 또 몸소 사람들 속에 있는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런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공중의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고 들의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사람의 아들")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은 이처럼 사람의 속과 생각을 세세히 알고 계셨을까요?
아마도 독자는 선뜻,
    "아, 그야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하지 않나?"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은 분명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은 주님이 땅에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사역하셨다고 말해 줍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있고 은사가 작용했기에 주님의 사역은 가능했다는 것입니다(루카복음서 4:18~19, 행전 10:38).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서 무엇을 "비우고" 오셨는지를 숙고해 봐야 합니다(필리포 2:7).

주님께는 성령의 모든 권능과 9 은사가 골고루 나타났습니다(코린토 12:4~11).
[성령의 9 은사는 교회시대에 사도 파울을 통해 구체적이고도 체계 잡힌 계시로 밝혀졌지만, 내용을 보면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존재했고 활용돼 온 권능입니다. 다만 방언과 방언 통역만 신약시대(성령시대/교회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에만 속할 뿐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적과 표징들의 의미성은 뭘까요?

많은 신자들이 오늘날 이적과 표징의 필요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적과 표징을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발상에서지요. 이적과 표징을 찾는 사람들을 주님이 물리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계시의 점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적과 표징을 부정하려 드는 무리가 있습니다. 또 성경 계시가 있으므로 더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성경은 이적과 표징의 필요성을 부정할까요?
이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동전의 양면성을 보지 못한 소이입니다. 한 면만 보고 다른 한 면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 번 그런 발상의 이면을 구체적으로 되뜯어 봅시다.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인 코라진/벹새다/카페르나움 등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노하셨습니다(마 11:20-24). 즉 주님이 권능과 이적을 행하신 까닭은 그들이 믿고 회개하기를 촉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은 이적과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철학적 슬기를 구했다면, 유대인들은 흔히 신적인 표징을 구했지요(코린토A 1:22). 그들이 흔히 예수님께 이적과 표징을 구했을 때, 주님은 요나의 표징 밖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시거나 또는 본문 바로 앞에서처럼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일으키리라는 식으로 답변하십니다. 또 표징을 보길 열망하는 헤롣 왕(안티파스) 앞에서는 아무런 답변조차 하지 않으십니다(뤀 23:8). 

유대인들은 믿기 위해 표적을 바라고 구하면서도, 일단 표적을 보고 나면 잠시 믿든지 아예 믿길 거부하기가 일쑤였습니다(요복 2:18, 4:48, 12:37). 벹새다 광야에서도 보리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장정 5천명과 그 가족들을 먹이는 엄청난 이적을 행하셨건만 예수님을 진정 믿고 따르기보다는 그런 표적에만 계속 안주하길 바랐습니다(요복 6:2-13). 일하지 않고도 그냥 편하게 앉아 배불리 먹는 나라를 이뤄 주실 정치적 통치자로 모시길 원했던 것이지요(6:14~66). 
그런 사람들은 맨 끝에 주님을 배신하고 그분 대신 바라바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은 이적과 표징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셨을까요?  
또 그 현재성 내지 현실성을 부인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만약 그렇다면-주님이 이적과 표징의 의미성과 중요성을 부정하셨다면, 왜 주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성령님이 내리시는 날 제자들이 모두 권능을 받을 것을 예언하시면서 맑 16:17,18의 징표들이 믿는 사람들(신자)에게 따르리라고 약속하십니까?

그리고 왜 그 약속이 초기교회에서 맨날 이뤄졌습니까?
왜 사도 페트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 앉은 하반신 불구자에게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면 될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자진해서 이적을 행합니까(행전 3:6-10)?

그리고도 왜 초기교회는 걸핏하면/뻔질나게 이적을 간구했고 실제로 행했고 계속 끊이지 않았습니까(행 2:43, 4:30, 6:8, 8:6-8, 13b, 9:32-34, 36-40, 14:8-10, 20:10-12, 28:3-6, 8,9)? 이적과 표징의 의미성이 점차 약화됐다면, 왜 모든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한결같이 권능과 이적, 표징 등을 강조합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계속 나타내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적과 표징은 하나님 그분의 직접적인 사역입니다.
구약에서 이적과 권능의 표출은 하나님의 '손'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권능의 표출로써 입증하시길 원하십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그(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자 주님도 함께 일하시어 그에 따르는 표징들로써 말씀을 확증하셨다(맑 16:20 사역).

  "..그것(구원)은 먼저 주님을 통하여 말하여졌고 그분에게서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표징과 놀라운 일들과 여러 가지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눠주신 성령님의 선물들로 증언하셨습니다."(히브리 2:3b, 4)

위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표징/기사/이적/은사들이 하나님의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이런 초자연적 사역들을 감히 경홀히 대할 수나 있나요?!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다만 이런 초자연 사역들을 자기 이름과 영예를 위해 악용하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올바로 표출되는 이적까지도 부정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이적과 표징 후에는 부정적인 열매도 있었지만 오히려 긍정적인 열매가 더 많습니다.
편하게, 본 복음서와 기타에서 몇몇 예를 들지요.

요복 1:11, 4:53, 9:35~38, 11:45, 12:11..

그런데 표적의 목적은 뭘까요?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적히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다.
다만 이것들이 기록된 것은 그대가 예수님은 크리스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복 20:30,31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