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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혼들 위해 살고 지고-주관준 일대기(3)



    중국인 교회와의 우정

주로 그런 개인전도로 설립된 서주의 한인 교회가 착실히 성장할 동안, 이웃의 중국인 교회들과도 사귀었다. 서주엔 당시 네 군데의 중국인 교회가 있어, 관준네 한인 교회까지 모두 다섯 교회였다. 그는 아직 목사 안수도 못 받은 전도사였지만 중국인 목사들로부터 대등한 대우를 받았고, 모두들 장로교회여서 교리적으로도 서로 통했고, 피차 아무 갈등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서주 남관교회의 대정기 목사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나란히 함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해, 은혜롭고 보기에 좋았다. 할아버지 목사가 설교를 하는 날이면, 아버지나 손자 목사가 축도를 했다. 대 목사는 말발이 약해 설교가 "신통찮아" 보여도 장로들과의 사이 등 대인관계가 원만했다. 그 교회의 왕 장로는 대 목사를 늘 앞장서서 추켜 주며 옹호하곤 했다.


중국인 목회자들이 주 전도사 네를 찾아 오면, 김금순 사모가 불고기 등 한식을 정성껏 요리하여 접대했고, 반대로 중국인 목사 가정을 방문하면 중식으로 대접 받았다. 어느 때는 예닐곱 목사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어도, 금순은 아무 불평 않고 정성껏 요리를 해서 맘껏 드시라고 내 놓았다.

식사 후 중국인 목사들은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금순의 한국 요리 솜씨와 한인 교회의 열성을 칭찬하고, 도와 줄 것이 없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금순은 비록 갓 배운 중국어가 서툴러도 관준의 말에 순순히 따라 주면서 중국인 교회와의 교류를 함께 즐겼다.

양측 목회자들은 만날 때마다 애찬과 함께 유쾌하게 담소하고 관심사를 나누면서 친교했다.
한-중 강단교류도 했다. 중국 목회자가 한인 교회 강단에 서면 으레 관준이 한국어로 통역을 했고, 관준이 중국인 교회로 가면 직접 중국어로 설교했다. 5 교회가 공동집회를 갖기도 하면서, 여러 해를 더불어 아기자기하게 지냈다.
  

   신학교와 전쟁과 고아원

서주교회 사역을 하던 1941년, 관준은 산동성 등현에 있는 중국인들의 화북신학교에 입학해 비로소 정식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즈음의 삶은 평탄치 못한 데다 아내가 몸이 약해, 입학 두 달 만에 첫 딸을 잃었고, 졸업할 무렵엔 첫 아들을 잃었다. 교장과 교수들, 학우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무엇보다 성령님께 위로 받고 평화를 얻었다. 그런데 이 슬프고 아픈 경험은 얼마 후 귀한 특수사역의 밑거름이 된 듯 싶다.

재학 시절, 세계 2차 대전의 일부인 소위 '대동아(大東亞) 전쟁' 곧 태평양 전쟁이 터졌다. 중-일, 미-일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중국 전역의 미국인들을 위협해 전쟁포로수용소에 집결시켜 가며 횡포를 부렸다.

화북신학교 설립자인 헤스 선교사(당시 83세) 내외, 미국인 신학교수 7~8명 및 가족들, 그곳 '등현고아원'을 돌보던 도리 여사 등도 모두 본국으로 축출됐다. 일본 관료들은 그 후에도 신학교에 자주 찾아와 귀찮은 질문들을 하곤 했는데,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관준이 장 교장을 도와 통역을 도맡아 했다.    

앞서 언급한 등현고아원이 주인을 잃고 결국 신학교 교장에게 그 책임이 넘어 오자, 장 교장은 뭐든지에 '척척 비서' 격인 관준을 불렀다.

    "주 군, 아무래도 자네 밖엔 고아원을 맡아 직접 일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으이. 자네가 맡아 해 주면, 윗 경영은 내가 함세."라고 부탁했다.

관준이 목회도 해야 하니 그럼 3년간만 하겠다고 하자, 신학교 교수회가 학업 상의 온갖 특혜를 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관준은 주일날은 한인 교회를 이끌고, 평일은 신학생으로, 그리고 부부가 함께 고아들을 돌보는 일인다역을 시작했다.

등현고아원은 운영정책 상 여아들만 수용할 수 있는 여자고아원이었다. 이왕 맡았으니 원아들을 친 딸자식처럼 신앙으로 성숙하기까지 잘 돌보기로 하나님 앞에 굳게 다짐한 관준은, 우선 화북/화중 지역의 북경/청해/남경 등지를 순회하면서 원아들과 최근 추가된 전쟁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며 모금활동을 펼쳤다. 또 조선족 교회가 있는 북경/청도/천진/서주/개봉 등의 한인 성도들에게 헌금과 기부를 호소했다.

그래서 원아들의 초/중고등학교 생활에 필요한 의복까지 마련해 입혀 주고,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했다. 아이들은 관준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면서 기꺼이 따랐다.
비록 경영난을 자주 겪긴 했으나, 어린 딸들의 심령이 무럭무럭 신앙으로 자라가는 모습은 주님만이 주신 큰 은혜의 비밀로 여겨졌다.


     하늘 선물 수박 파티

무더운 여름 날, 한 아이가 바깥 나들이를 하고 와서는 "아버지, 거리에 나갔더니 이런 게 많아요!"라고 두 손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거리에 내다 놓고 파는 수박을 보고도 차마 먹고 싶다는 말은 못하고 슬며시 달아나는 그 뒷 모습에 관준은 가슴이 저려 왔다.

더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저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영국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를 평소 하나의 롤모델로 삼아 온 그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너희들에게 수박을 사 주고 싶어도 지금 수중엔 돈이 없구나.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자."
  
아이들은 수박을 먹고 싶은 열망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큰 아이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어린 것들은 그 자리에 그냥 남아 두리번거렸다. "너희들은 안 나가냐?" 물으니까, "하나님이 수박을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고 나가야죠" 하더니, 수박을 어디엔가 숨겨 놓으셨을 것이라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 관준은 다시 주님께 매달렸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꼭 수박을 주십시오!"

자신도 무더위를 견디다 못해 냉수욕을 한 관준은 옷을 갈아 입고 거리로 나서는데, 웬 노인이 고아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관준에게 반갑다는 얼굴로 "이 무더운 여름날, 고아들이 얼마나 고생하겠소? 자, 아이들에게 수박이라도 사 먹이시오." 하고 서너 번 신신당부까지 하며 15원을 건넸다.

기도 응답이 너무도 신속한 데 내심 놀라면서 그 자리에서 노인을 진심으로 축복한 다음, 인근 가게의 수박 값을 물으니 120 파운드에 23 원이었다. 얼마를 더 걷다가 수박만 파는 손수레 행상을 만났는데, 같은 양에 18 원을 불렀다. 갖고 있던 15 원을 일단 지불한 다음 수박을 받아 들고 고아원에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저울에다 정확하게 120 파운드를 달아 잘라낸 뒤 나머지를 돌려 주러 나갔다.
그러나 그 행상은 "저도 고아원 출신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드립니다."라며 웃는 게 아닌가. 참으로 하나님은 일찍부터 고아들을 돌보는 분이셨다(시편 10:14).

관준 부부는 다시 한 번 자상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와 눈물 속에 아이들과 신나는 수박 파티를 벌였다. 원아들 120 명을 포함한 온 식구들이 각각 평균 한 파운드씩 배불리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부인할 수 없는 고아들의 아버지-하나님의 존재와 사랑, 기도의 응답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셈이었다.


    연애편지 단속

한 번은, 어느 원아의 연애 편지가 발견됐다. 바깥 남자를 상대로 쓴 열렬하고 애틋한 내용이었다. 한 식구나 전혀 다름 없이 지내면서 원생들의 신앙과 학업, 삶을 전적으로 돌봐 왔다고 생각한 관준으로서는 뜻밖이고 적잖은 충격이었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탓인지 원아들은 일찍부터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여자들이어서 조숙했다. 여러 아이들이 그럴 가능성이 있고 이런 기회에 그냥 방치해 두어선 안될 성 싶어, 아이들의 비밀 열쇠로 각 방과 장롱마다 뒤지기 시작하자, 아니나다를까 상상 밖에 많은 연애 편지들이 한 아름 쏟아져 나왔다.

관준은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비상 집결시켰다. 일급 비밀을 들켜 오조조한 모습으로 꿇어 앉은 아이들을 내려다 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너희들은 이 아버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너희를 공부시키면서 함께 생활하는데도, 이럴 수가 있겠니? 이런 행실을 계속할 테냐, 말 테냐?...대답을 하거라!"

아이들은 두 번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꿈 많고 그리움이 많은 사춘기여선지 이후에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관준은 해당 원생들을 다시 불렀다.

    "이건 너희들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다."

관준은 아이들 대신 자신의 흰 양복 바지 종아리를 걷어 붙이고, 회초리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매섭고 아렸다. 겹쳐지는 매질 자국은 금방 피가 맺히더니, 곧 핏방울이 주위로 튀면서 낭자했다. 곁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그의 다리를 끌어 안으며 울음을 터뜨리자, 얼떨결에 그녀를 쳐 넘어뜨렸다. 당시 금순의 몸은 눈에 띄게 약해져 있던 터였다.

이 광경에 놀란 당사자 아이들도 달려들어 관준의 다리를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울음바다가 됐다. 아이들은 잘못했다며 울부짖었지만, 관준은 "아냐, 다 내 잘못이야. 너희들을 제대로 못 가르쳐 이렇게 된 거야!"라고 울먹였다.

이웃 동네의 장 교장 내외와 교감 부인 등이 누구에겐가 급보를 듣고 달려와 관준 부부와 아이들을 말리고 다독이면서, "한국인이 중국인 고아원 일까지 떠 맡아 여태 잘 해 왔는데, 이게 웬 일이람?" 하면서 뒷 수습을 했다.

그 후 원내 연애 편지는 자취를 감췄고, 모두들 별 탈 없이 평화로웠다.


    잃었다 되찾은 식량기금

원아들의 먹거리가 떨어지면, 최소한 석 달 분의 모금을 해야 했다. 관준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 천진과 북경 등지로 모금여행을 다녔는데, 꼭 석 달 분 기금인 14만원이 마련됐다. 고아원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아울러 신발 밑창감도 구했다. 당시 중국인 평민들은 거개가 신발 바닥에 가죽을 대어 신고 다녔다. 그러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던 고아원은 대신 볕에 말려 바닥에 겹겹이 대어 기워 쓸 헌옷을 한국인 성도들에게서 기증 받았다.

모금이 끝나 등현 행 기차편으로 돌아오는데, 일본 헌병이 올라 승객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관준은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태연히 가방을 열어 보였다. 성경찬송가 책, 신문지로 싼 돈뭉치 등을 본 헌병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곁에 있는 두툼한 배낭도 보자고 했다. 그러나 헌옷만 잔뜩 담긴 속을 본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서 도로 담아 넣으시오" 하고 자리를 떴다.

무사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 관준은 덕주 역을 벗어나 얼마간 걸으며 들고 있던 짐을 점검하려던 순간 아찔했다. 가장 중요한 돈 꾸러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검색 때 꺼낸 짐을 도로 집어 넣으면서 신문지에 싼 돈은 곁에다 그냥 두고 잊은 채 내린 것이었다.
속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120 명 아이들의 석 달 양식 값인데, 여기서 잃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개인 일로만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여, 도와 주시옵소서!"

계속 탄원하며, 허둥지둥 덕주 역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기차 시간까지는 30분 여유가 있어 역 구내를 돌며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한 쪽 구석에서 뭔가 툭 하고 발에 채였다. 겉 보기엔 흙덩어리인 듯 한데, 흙이 떨어져 나간 틈새로 신문지 같은 것이 비져 나와 보였다. 냉큼 주저 앉으며 흙을 털어 내 보니, 바로 찾고 있던 돈뭉치가 아닌가! 
 
벅찬 감격과 눈물로 주님께 감사하면서 가방에 얼른 돈뭉치를 넣어 두었다가, 다시 등현으로 가는 차를 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몰래 세어 보니 단 한 장도 모자라지 않는 14만원 그대로였다.

분명히 기찻간에 있어야 할 돈 뭉치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실이다.


    믿음의 모험

가을철이 다 되어 다시 고아원 식량이 거의 동 날 무렵이었다. 모든 걱정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 온 관준 부부는 기도 밖에는 달리 할 게 없었다. 관준은 혼자 원장실에서 떼를 쓰다시피 간구했다. 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는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모험을 내걸었다.

    "주님, 석 달 분 양식이 당장 해결돼야 합니다. 내일 아침 누구든지 여기 처음 찾아오는 손님이 양식 값을 맡을 사람인 줄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청소를 하고 나자 누군가 고아원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간밤의 기도를 떠올리며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살펴 보니, 행색이 좀 초라해 뵈는 시골교회 목회자였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들어 오라고 반갑게 맞아 들여, 아내에게 조반을 정성껏 대접하게 했다. 알고 보니 방문객은 지방의 12개 개척교회를 두루 섬기는 순회목사였다. 식사 후 그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교인 과부가 남긴 딸을 고아원에서 맡아 달라는 부탁을 꺼냈다.
기꺼이 응락한 관준은 곧 이어, "저도 목사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고 정색을 하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어제 제가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고아원을 찾는 첫 손님이 누구이든 우리들의 석 달 분 양식을 대어 줄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목사님이십니다."

그 손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니, 일개 농촌 교회 목사에 불과한 저더러 이 고아원의 3개월 분 식량을 대라뇨? 제겐 그런 양식이 없어요!"라고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관준은 부드럽게 그를 달래며 말했다.

    "목사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성급하게 생각하실 게 아니라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제가 자전거를 타고 목사님이 돌보시는 12개 교회를 돌면서 삼일(수요) 저녁 예배 설교를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성도들에게 직접 원아들을 위한 청을 올리겠습니다."

그 순목(巡牧)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그런 청이라면 들어 줄 수 있노라고 쾌히 승락했다.

그 결과, 12개 농촌 개척교회들로부터 고아원 식구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밀/보리/옥수수/좁쌀 등을 약속 받았다. 1 개 교회에서 평균 10 명 분 양식을 맡아 준 셈이었다. 어떤 교회는 밀 20여 자루와 다른 물자도 지원해 주마고 자원했다. 그러나 12 교회를 다 돌고도 당초 예산에 포함된 고구마 3,000 근이 모자랐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구마가 주식의 하나였다.

아무튼 순회 설교를 모두 끝낸 관준은 자전거에 올라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고, 채 미달된 양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은 그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비적(匪賊)인 줄만 알았던 상대방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신앙인이어서 서로 반가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형제에게 12개 농촌교회들을 순회 방문하면서 설교한 내력을 들려 주자, 그는 "원장님, 걱정 마시오! 고구마는 내가 해결해 드리리다"라고 선뜻 자청하고 나섰다. 유일한 미해결 품목인 고구마를 제공할 성도는 하나님이 따로 준비시켜 두신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한 모든 것을 알뜰하게 챙겨 주셨다. 실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주관준의 하나님이시기도 했다. 물론 등현고아원 원아들 모두와 12 교회의 하나님이셨다.
모든 약속의 말씀을 어김 없이 지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은 미리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답게, 빌립보서 4:19-20 말씀대로 성취하셨다.

12 교회 성도들이 작정한 곡식들은 손수레로 고아원에 속속 도착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고구마 3천근 약속도 물론 이행됐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관준 내외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당초 고아원을 방문해 준 그 순목의 넓은 배려를 비롯한 12 교회 성도들의 두터운 온정과 정성, 약속을 지켜 준 신의에 감사/감격해 마지 않았다.

믿음이 일궈 내고 하나님이 응해 주신 모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