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 글 저런 글

중국 영혼들 위해 살고 지고 (2)


중국 영혼들 위해 살고 지고-
주관준 목사의 권능적 삶 (2)



  뜻 밖의 명절 만찬

마산 농업실수학교 교장 윤인구 목사의 부인은 일본 도쿄의 동지사 대학교 출신인 당대의 엘리트였다. 장점도 많았지만, 성품이 깐깐하고 인색한 편이어서 신학생과 다름 없는 기숙사생들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
명절 때면, 전체 30명의 학생들 중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 귀가하고, 기숙사생들만 남아 그들끼리 지내지만, 처지를 살펴 주거나 돌봐 주는 성도가 없어 때로는 처량했다. 음력 설날 저녁, 관준은 평소 은근히 쌓여 온 불만을 동료 기숙사생들 앞에 슬슬 털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들 멀리서 와서 객지의 기숙사에서 지내는데도, 이런 명절날마저 아무 좋은 일이 없으니, 도무지 사는 보람이 없다..."

학우들의 얼굴을 둘러 보며 일종의 분위기 선동 내지 공감대 형성을 해 가던 참인데, 느닷없이 뒤에서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관준이, 이제 그만 하세요!"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바로 교장 부인이었다.

관준의 '선동' 덕분에 그 날 밤 기숙사생 전원이 교장 댁으로부터 푸짐한 만찬을 대접 받을 수 있었다. [ 주 목사는 그 후 학교에서 '정직한 사람' 또는 '밉살스런 사람'으로 도장 찍혀 지냈다고 훗날 술회했다. ]


    순교자 주기철의 마산 문창교회에서
 
농업실수학교 시절, 관준은 주일날이면 인근의 문창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당시 이 교회담임목회자는 훗날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가 된 주기철 목사였다. 실수학교 학생에 불과한 관준은 교회에서 별 말도 없었고 주기철과 대화할 기회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에서 감화를 받곤 했다. 

관준의 눈에 비친 주기철의 인상은 매우 강직하다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일본에 부흥집회를 다녀 오더니, "일본은 곧 망합니다!"는 말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몸은 좀 허약해 보인다는 평을 듣는, 이른 바 외유내강 형이었다.

이 교회 당회 서기였던 주영신 장로는 관준을 윤인구 목사의 제자 겸 전도사로 소개해,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얼마 후, 주 장로가 관준을 따로 만나, 삼일예배(수요기도회)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을 해 왔다. 이 때는, 마산 교계에 분열이 생겨 주기철이 노회에 수습을 요청했었다가 결국 자신이 마산을 떠난 지 약 1년 됐을 때였다. 주기철은 부산 초량교회를 시무하다 마산을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로 갔다. [ 관준과 주 목사, 주 장로-세 사람이 다 같은 주 씨였지만, 서로 인척 관계는 아니었다. ]

관준은 삼일예배 설교를 위해 3개 대지(大旨)를 잡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세 가지를 흘리고 쏟으셨는데, 첫째로 피땀을 흘리셨고, 둘째로는 눈물을, 셋째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예배엔, 관준이 설교자로 초청 받은 소식을 안 실수학교 동료 학생 30명이 모두 문창교회로 와서, 교우들과 함께 설교를 들었다. 당시는 여느 한국 교회들처럼 삼일예배도 주일예배나 다름 없이 자리가 가득 메워지곤 했다. 예배가 끝나 학교로 돌아온 학우들은 관준의 설교를 호평해 주었다.
 
동료 기숙사생들은 주일이면, 그 날 다녀온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서로 재미있게 나누며, 어떻게 하면 앞날에 목회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지 유익한 토론을 하곤 했다. 관준은 그전에도 신마산 월영교회에서 개척 전도사로 2년간 섬기기도 했다. 이 마산 학창 시절은 관준의 청년기에 여러 모로 깊은 의미를 더 해 주었다.


   중국에서의 첫 개척 사역

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한 관준은 만주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교회 봉사를 하고 있었다. 나이 24세 무렵이었다. 어느 날, 서탑교회 성경학교 교사이자 총회 희년전도회 총무였던 전재선 목사로부터 관준을 자신이 있는 교회에 와서 일하도록 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관준의 부모는 아들을 모름지기 개척 전도자로 파견해 달라고 전 목사에게 되레 간청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결국 관준은 만주 한국인교회의 전도기관인 희년전도회 소속 전도사로 정식 파견을 받아, 1938년 3월, 단독으로 통화성(현 길림성) 휘남현 신양촌 소전에 사는 한국인을 주 대상으로, 교회개척에 나섰다. 그 곳엔 한인 100여 세대가 있었다.
첫 예배는 주부 2명, 첩살이를 하는 3명 등 여성교우 5명과 함께였다. (당시는 일부일처제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교회가 빨리 발전해 120명 정도가 모이게 되자, 어느 중국인 사옥을 예배당으로 구입했다. 


   '맥주세례' 사건과 영하의 기도 체험

휘남현 교회개척 초기에, 관준은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무렵 중국은 사회주의자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동네 개척교회가 날로 성장해 가자, 그들은 기독교 세력에 모종의 위협감을 느꼈는지, 전도사 살해 음모설까지 나돌다가 "예수쟁이니까 술을 먹이면 교회와 동네에서 쫓겨날 거다"라는 최종 공작 계획이 세워졌다.

사회주의 분자들이 관준에게 동네 유지이니까 중국 정식을 대접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음모가 있을 줄은 몰랐던 관준은 그다지 내키진 않았으나, 모든 사람들을 전도대상으로 여겨 오던 터라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초대에 응했다. 음식을 대접하던 도중 술도 권했으나 관준이 끝내 사양하자,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다 큰 맥주잔을 통째로 들이부어 버렸다.

장내 분위기는 삽시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난데없는 '맥주세례'를 받고서야 그들의 적의를 제대로 느낀 관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수수 일어났다. 그들의 조소와 수근댐 속에 온통 시금털털한 맥주 냄새가 풍기는 것을 느끼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은 뒤 딴 옷을 갈아 입었다.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자, 사회주의자들은 "전도사가 술을 퍼 마시다 못해 술로 목욕을 했다"는 악소문을 온 동네에 퍼뜨리고 다녔다. 한인 신자들이나 사역자나 복음에 합당한 모범생활이 절실히 필요한 시국에 지방사회에서, 더구나 사역 초기에 예상 밖의 심각한 사태가 번지고 있다고 판단한 관준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산기도에 들어간다.

그곳 겨울 기온은 영하 14~15도가 평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버코트를 걸치고 산에 오른 관준은 숲속을 헤매다 양지 바른 남향의 나무 사이에 바위가 모인 곳을 찾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내 뼛골까지 시려 왔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추위도 잊은 채, 천사와 씨름을 하던 야뽁 강가의 야콥처럼 기도로 매달렸다.

    "주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 역경을 통하여 오히려 영광을 받으소서!"

여러 시간을 기도한 것 같아, 눈을 떠 보고 저녁 때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웬지 엉덩이가 바닥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 보니, 오버가 바위에 얼어 붙어 있는 채로 몸을 당기느라 찢겨져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관준이 묵고 있던 조선 여관집의 주인이자 교우인 여인이 그를 보고 반가워 하면서, 한편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세요?"
    "예, 잠깐 기도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교우는 관준의 태연한 말투와 찢긴 오버코트 자락에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잠깐'이 무어야요?! 선생님이 월요일에 나가 여태 안 돌아오시다가 오늘 토요일에서야 오시니, 나가신 지가 벌써 엿새째입네다. 내일은 주일이니 설교 준비를 하셔야지요."
    "예? 오늘이 토요일...이라고요?"

관준은 그녀의 말이 선뜻 믿기지 않고, 한참이나 의아스러웠다. 월요일 아침에 나가 몇 시간 기도한 줄만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엿새 동안이나 그것도 영하의 숲속에서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로 지낸 것이다. 분명히 거룩한 신비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권능과 이적 사역

영하 속 산기도 체험 후, 관준은 자신에게 주님의 권능이 강하게 내려 역사함을 느꼈다. 이튿날인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그의 열 손가락으로 성령의 불길이 뻗어 나가는 것을 주님이 영안(靈眼)을 열어 보여 주셨다.

그 동네엔 1남5녀를 둔 의사 가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의술이 아직 부실해, 어린 아들이 홍역에 걸려 고생하는데도 의사로서 속수무책이었다. 부근의 의사란 의사는 모두 방문 진료를 해 봐도 허사였다.
어느 날 밤 11시쯤, 교회 집사가 중국인 부인 한 명이 찾아 왔다고 귀띔하면서, "의사의 아들이 다 죽게 됐는데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밤으로 일어나 그 의사 집에 가 보니, 정말 죽어 가는 독자를 앞에 놓고 사색이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과 얼굴이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듯한 의사를 보고 다시 물었다.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잘못을 그 의사가 못 깨닫는 것 같아, 그냥 침대 위의 아이를 끌어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 모르게 기도한 뒤 아멘 하고 눈을 떴는데, 죽은 듯 보이던 아이는 아무 기색 없이 그냥 고요히 잠 자는 듯 했다.

   "이 아이가 살았으니, 내일 아침에 깨면 묽은 음식을 주십시오."

과연 아이는 이튿날 깨어나 음식도 먹고 뛰어 다니며 놀기 시작한다는 희보가 들려왔다. 의사의 외아들의 불치병이 전도사의 기도로 고쳐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앓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등 온갖 병자들이 찾아와 기도로 치료받곤 했다.   
관준에게 '맥주 세례'를 주며 박해하던 일부 사회주의자의 가족도 찾아와 기도로 고침 받았다. 주님은 젊은 관준을 기도의 사람, 권능의 사역자로 훈련시키시면서 그의 난국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 주셨고, 이 작은 개척교회와 그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셨다. 또한 성령께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권능으로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다.

[ 약 60년이 지난 뒤, 주관준 목사는 중국신학교 순방 차 현지에 들러 휘남현 교회개척 시절의 감회를 되새겼다. 그가 설립한 첫 교회는 사라졌으나 다른 교회가 들어섰고, 조선 여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늦장가를 들다

휘남현 교회 개척 시절의 관준은 당대로서는 혼기를 넘긴 노총각이었으나, 주변에 장가 들 곳이라곤 도무지 없어, 미래는 주님 손에 맡기고 사역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남 동래의 김대업 목사에게서 집에 한 번 놀러 오라는 편지가 날아 든다. 관준은 그의 숨은 의도는 전혀 모른 채 다만 그의 애정 어린 배려가 늘 고맙고 그가 소개한 스승 윤인구의 마산 실수학교 추억도 새로워, 반갑고 고마운 마음만으로 향발했다.

김대업에게 조용하고 다소곳한 처녀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이성에게 아련한 감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관준은 그녀-김금순-을 언뜻언뜻 눈여겨 보며 저런 여인이 자신에게 와 준다면, 삶과 목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기 시작했다.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일어난 그에게 대업이 동래 온천에 다녀 오자고 하여 둘이 나서는데, 대업의 뒤엔 그녀도 동행하고 있었다.

그 뒤, 둘 사이엔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다. 만주로 돌아오는 길로 김대업에게 고맙다는 서신을 띄웠는데, 그것을 신호 삼아 금순에게서 답장이 왔다. 알고 보니, 그녀도 주님의 사역자인 그를 갓 만난 순간부터 연모의 정을 품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10여 회 편지가 오가며 둘의 사랑도 무르익어 갔다.
 
김금순은 당시 동래 일신학교를 다녔는데, 형편상 주로 집안 살림을 돕고 있었다. 관준은 그녀에게서 더없는 여성다움을 느끼며, 사역자에게 걸맞은 짝이라는 확신이 들자, 자신의 뜻을 동래에다 알렸다. 앞서 비쳤지만, 김대업은 퍽 오래 전부터 관준의 됨됨이를 지켜 보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고, 이젠 당사자의 대답만 기다리며 뜸 들이던 참이었다.


   우여곡절의 '하니문'

1938년 9월, 노총각 관준은 다시 동래로 내려가 그곳 수안교회에서 김만일 목사의 주례로 하나님 안에서 김금순과 짝을 맺게 된다. 신부는 20세. 관준의 다섯 살 아래였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관준에게 나중 "딸이냐?"고 물을 정도로 그녀 쪽이 젊게 보였다.

하지만 사역자인 데다 시대가 시대였던 탓인지, 평생 반려와의 합일조차 평탄치 않았다.
당시는 고등계 형사들이 목사와 전도사들을 마구 잡아들이며 괴롭히던 험한 시기였다. 관준은 혼례식 초대장을 만들어 농업실수학교 동기생 등 여기저기를 다니며 전하려던 참이었다가 이동 순사(당시의 순경)와 맞닥뜨렸다. 어딜 가냐고 캐묻는 순사에게 동래로 간다며 급한 김에 신분증 대신 명함을 내밀자, 전도사 직함을 보는 즉시 인근 파출소로 끌고 가더니 유치장에 가두어버렸다.
 
그렇게 2주나 갇혀 있을 동안, 처가가 될 김금순의 집은 말 할 나위 없이 어수선했다. 식과 잔치 준비를 다 해 놓고 마냥 기다렸는데, 신랑될 사람이 졸지에 말도 없이 사라져 결혼 당일은커녕 2주 동안 깜깜 무소식이니, 무슨 드라마 같고 망연자실할 일이었다. 
영문을 모른 김대업의 집안 식구와 친지들이 동래 시내와 교외를 온통 누비며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않자, 그냥 신랑이 실종된 줄로만 알고 맥이 빠져 있었다.

결국 하나님의 중재로 관준이 풀려나 금순네를 다시 찾아오자, 놀랍고 반갑기 그지 없는 마음으로 이튿날 서둘러 식을 올렸다. 죽었던 신랑이 되살아난 것만 같은, 실로 충격과 감격의 해후, 눈물 끝의 결합이었다. [ 훗날 주 목사가 자신의 투옥 당시의 아내의 심경과 정황을 물었더니, 김금순 사모는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에만 열중했다"고 담담히 대답했다고 한다. ]

일본 경찰의 훼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뒤 둘이 함께 만주로 갈 때도 이동 순사가 나타나 길을 막고 트집을 잡았다. 신혼부부치곤 나이차가 너무 많아 보여 수상쩍게 여기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보다가 별 이상이 보이질 않자 놓아 주었다.

당시는 신혼여행하는 부부도 드물고, 할 처지도 못되던 때였다. 휘남으로 돌아가던 길에 관준과 금순은 평안북도 정주에 들렀다. 거기는 누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스무 살도 더 손위인 누나 부부는 정주 녹산교회당을 직접 건축했고, 매형은 장로장립도 했다. [ 미국 알래스카에서 목회하던 안길홍 목사가 매형의 생질이다. ]

특히 고향 태천을 다녀 정주로 가는 시골길 40리는 이를테면 '신혼여행'의 절정이었다. 노중엔 제법 넓직한 시냇물이 있어서, 관준은 금순을 업고 물을 건너가며 하나님 안에서 부부된 기쁨과 행복감에 겨웠다.


    도시 교회 개척

휘남현 교회가 전재선 목사를 강사로, 첫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 성경공부를 주로 하는 부흥집회-편집자 주)를 열었을 때였다. 전 목사는 관준을 큰 그릇으로 보았는지 "여기서는 큰 일을 하지 못할 테니 도시로 나가라"고 하며, 화중 강소성 서주시로 재파견 해 주었다. 휘남교회를 개척한 지 2년 5개월만인 1940년 4월이었다. 

그 때의 서주는, 중-일 전쟁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다. 가는 길도 험했지만 무사히 도착했고, 그곳 '동양여관'에 투숙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 여관 주인 여성은 독실한 신자였는데, 훗날 해방 후 장로교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어 여성계에서 많은 활약을 한 김영주 씨였다. ] 거기에 조선족 청년들을 모아 함께 예배하면서 지냈는데, 참으로 재미있고 알찬 신앙생활이었다. 

조선족 대다수는 중국식 의상이나 일본식 '화복' 또는 양복을 입고 다녔으므로, 수많은 행인들의 국적을 겉으로는 구분할 수가 없어, 관준 부부는 머리를 짜 내어 전도전략을 세웠다. 관준은 한복에다 모시 두루마기를 걸치고, 금순은 노랑 저고리와 남색 치마 차림에다 그즈음 6개월 된 첫 아기를 업고, 서주 중앙시장에서도 가장 번잡한 길목에 서서 찬송가를 부르기로 했다.

특히 다음 찬송가는 타국에 사는 한인들에게 걸맞았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父兄) 같이 되소서 (구 번역)

[ 이 찬송가는 한국에 온 미국인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의 부인이 1895년 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지나가던 길손이 발길을 멈추고 머뭇거릴 때면, 즉시 달려가 인사를 나누며 간단히 복음을 전하고 주소를 물어 받아 적곤 했다. 상대가 여성일 때는 금순이 그렇게 했다. 드넓은 대륙 땅에서 한국인들을 그렇게 한 사람씩 만나고 전도할 때마다 마치 땅 속 보물을 하나 하나 캐내듯 느껴졌고, 그렇게 세운 교회여서, 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관준 부부의 애착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