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별과 검증/카톨맄(천주교)

'주기도', 유아세례 관행은 카톨맄으로부터

[다음 글은 데이빋 헌트의 '베레아의 외침' 뉴스레터에서 간추려 본 것입니다. 전통에 익은 독자들은 좀 견해차를 보이겠지만..퍽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필자(김삼)는 헌트의 주장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문장 도중 꺽쇠표 속은 김삼의 것입니다] 
 
'주기도', 유아세례 관행은 카톨맄으로부터

[독자들은 '주기도'라고 따옴표를 붙인 데 대해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래야 한다.] '주님의 기도'(The Lord's Prayer)라는 말은 카톨맄 교회가 제멋대로 갖다 붙인 명칭이기 때문. 신교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주기도' 관행은 신교가 여과 없이 받아들인 대표적인 카톨맄 전통의 하나다. 

[사도들은 그 누구도 '주님의 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더욱이 행전 이후에 나타난 교회시대에 그 누구도 이 기도를 예배의식 따위에 사용한 흔적이 없다. 만약 그토록 중요한 기도라면, 반드시 초기교회 예배 때에 기도문 또는 의식문으로 사용됐어야 한다.] 

일명 '주님의 기도'는 본래 예수님이 12제자들에게 기도의 한 패턴으로 제시하신 것이므로 구태여 이름을 붙이려면 '제자들의 기도'여야지, '주님의 기도'가 아니다. 주님이 직접 이런 기도를 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냥 하나의 본으로 보여주셨을 뿐이다.

더구나 이 기도를 하나의 의식문/기도문으로 매 번 무의미하게 되뇌면 마태복음 6:7에 어긋난다. 기도의 참 응답을 의식하지 않는 헛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진정 아버지로 모시는 거듭난 사람들의 기도일 뿐이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동으로 세상 온 인류의 아버지이심 또는 온 인류가 자동으로 우리의 '형제'임을 주장하는 것은 가짜 기독교의 오류다. 

미국 전역의 운동팀들이 '주기도'를 남용한다. 특히 고교 풑볼(미식축구)팀들의 상당수가 경기 전후에 이 기도를 한다. 아마 "거 참 좋은 현상이네~" 할 독자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선수 본인들은 "이게 도대체 뭐냐?"는 회의감 속에서, 또는 행운을 안겨줄 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따라하기 마련.

NBA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코치의 한 명인 필 쟄슨은 비정통 오순절교에 개입됐다가 공동목회자인 부모들로부터 선불교와 라코타 인디언 영성을 배운 뒤 오순절교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코칭하는 팀들에게 '주기도'를 반복하도록 강요해 왔다. 하나님의 왕국과 크리스토에 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것은 복음 전도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다.

신교 주류계 교단의 영아/유아 세례 관행도 본디 카톨맄에서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아세례성사를 집전하는 요한 파울로 2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위해선 거듭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거듭남의 경험은 카톨맄이나 루터교 기타 교파의 주장처럼 영세나 물세례를 통해 오지 않는다.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모든 루터교회는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따른다. 루터교 유아(영아)세례 받음이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의 증명서를 받는다.

"세례 때 온전한 구원이 그대에게 주어졌노라. 하나님은 그대의 아버지가 되셨고 그대는 이 행위를 통해 그 분의 자녀가 됐노라.."

사실 성경에 따르면,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침례/세례가 베풀어진다. 침례/세례는 거듭난 신앙을 간증하는 표시다. 그렇지 않다면 무의미하다. [그리고 침례/세례 자체에 아무 실제적 파워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아/유아 세례는 복음을 부정함과 별 다를 바 없다. 거짓 확신을 갖다주기 때문. 그렇게 해서 행여 훗날 올바른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되면 몰라도.

어떻게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영아/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그런 전통교회는 사제/목회자의 근엄한 자세, 무게 있는 목청, 촛불 켜기, 향 피우기, 성스런 의식과 손짓, 제스처와 선언, 오르간 연주 등으로 영아 세례 의식의 "영적 권위"에 무게를 보탠다.

카톨맄의 세례성사 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카톨맄 교회의 존재를 거부함이고 자동 출교 당하여 "지옥 갈 운명"이 돼 버린다. 1547년 3월 3일 치러진 트렌트 공회의의 카논(정법)과 선언에 따른 '성사에 관한 선언'은 지금도 완전 유효하다.

Can. 4. 누구든, 새 법의 성사들을 구원에 불필요하다면서..그것 없이 또는 그것에 대한 열망 없이도 사람이 오직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의인(=칭의/의화, 의롭다 함)의 은총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파문(저주) 받을지니라. 

Can. 5. 누구든, 새 법의 성사들에 의해 실천된 행위로서 은총을 (못 받고) 다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은총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파문(저주) 받을지어다.

카톨맄들의 이 거짓말을 보는가? 위의 두 카논은 엄연히/철저히 성경에 위배된다(로마서 3,4장 참조). 로마 카톨맄이 로마서에 전적으로 위배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런데도 신교 일각에서 카톨맄과의 교회 '일치'를 추구하다니 어이가 없다. 무슨 '생쇼'도 아니고.]

이 로마 교회의 성사주의 관행은 대다수의 개혁교회에 여러 형태로 옮겨져 심겼다.
개혁 신학자 R.C. 스프라울은 영아세례를 구약의 할례에다 비긴다. 구약이 할례를 요구하듯 신약시대엔 영아세례가 요구된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런데 교회시대 시작 이후 신약 기록에서 영아세례의 샘플이나 지침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 반면 유아/영아 세례를 엄연히 지지하는 사람들 다수가 십일조는 신약성경에 몇 번 비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일조를 강력 반대한다. 얼마나 모순된 주장인가? 결국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셈이다.]

침례에 대한 올바른 지침은 행전 8:29~38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교회의 7 집사 중 한 명인 필맆에게 이사야 53장에 대한 설명을 들은 에티오피아 칸다케 여왕의 재무장관은 말한다. "보시오, 여기 물이 있습니다. 제가 침례 받지 못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필맆의 대답: "만약 귀하가 온 맘으로 믿는다면 그래도 되지요."(일부 원문 사본은 이 부분이 없음) 그래서 둘 다 그 물로 내려 가 침례를 행했다.

침례는 크리스토와 함께 죽어 장사됐다가 부활함을 상징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 물을 뿌리지 않는다. 장사한다. 그러므로 물 속에 푹 잠기는 침례가 진정 크리스토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됨을 상징한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요복 3:5). 어떤 사람은 여기 '물'은 모태 속 양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언질은 분명 제2차 출생에 관한 것이지 1차 출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 '물'이란 뭘까? 하나님의 말씀이다(엪 5:26)!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니 신자가 신령(=성령)과 진리(말씀)로 예배하듯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요복 4:24, 15:3, 페트로A 1:23~25).

일명 '주기도'가 아닌 진짜 주님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특히 영아세례를 받는다 해서-거듭날 길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지 종교에 관한 책이 아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종교는 인류를 어둠 속에 가두고 복음의 밝은 빛을 가림으로써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싸탄의 도구일 수 있다(코린토B 4:4).

예수님 당시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황제에 굴하지 않고 오직 성경과 크리스토께 충성을 다해 왔다. 개혁 이후 수많은 옛 카톨맄 신자들이 성경과 크리스토만을 믿고 로마 바티칸을 배신헀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학살되거나 화형됐다.
참 순교자들과 그 학살자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양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