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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혼들 위해 살고 지고-주관준 목사 전기(1)

 

오늘날은 스승과 역할모범이 드물어 아쉬운 시대다.
아버지 만한 아들이 없고, 스승 만한 제자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이런 글도 쓰게 된다.

중국의 선교를 위해 힘써 온 한국인들이 과거에도 퍽 많았지만. 지금도 물론 많다. 세계 최다의 거대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복음화는 당연히 지구촌 신자들의 관심사가 돼 왔다. 그러나 현지 당국은 외국인의 자국 선교를 여전히 금지하고 계속 경계한다. 자국인 신자들마저도 수시로 모진 박해를 겪는다는 현실 -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세기 말, 중국 대륙 선교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논해지고 구상될 당시, 독특하게도 중국 신학교/성경학교 재정 돕기를 통한 간접선교에 힘쓴 사람이 있다. 
고 주관준 목사. 한국서 태어났지만 주로 중국에서 어리고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그곳 화북신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에서 오래 목회를 하다가 은퇴한 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 와, 계속 여러 가지 간접 사역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 21세기 초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아직 중국에 공산주의 세가 여전히 강하던 1990년대 초 대륙을 방문한 뒤,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역이 허용되지 않는 현지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선교방식 하나를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응답 받은 것이 바로 현지 교회 사역자를 기르기 위한 신학생 돕기였다. 1970년대에 중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당국에 의해 등록/설립돼 온 중국 신학교들의 숫자는 1990년대 말 모두 17개였다.

그는 그 후 이 사명을 여생의 과업으로 여겨, 여러 차례 미국과 한국 등에서 십시일반 격으로 성도들로부터 모금을 해, 대륙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현지 신학교를 직접 순회 방문해 기금을 전달하기를, 말년에 병이 들어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꾸준히 감당했다.

그 돈으로 당시 가난하고 어렵던 수많은 중국인 신학도들이 도움을 받아 교회 사역자가 되어 지금도 일선 사역처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 교계의 오늘날의 배후엔 한국인 주관준의 기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하겠다. 그의 중국신학교 돕기 사역은 고인의 유지를 받든 성도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한/미 양국에서 지속되고 있다.

주관준 목사는 생시에, 소위 삼자(三自) 교회로 불리는 중국의 공인 교회만 인정하고, 가정교회/처소교회라고 불리는 지하교회에 관해서는 늘 함묵했기에, 그의 중국관 및 선교관, 선교방식 등은 과연 얼마나 공정하고 효율적이었는지 비평/분석의 여지도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은 바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 사실이다.

주 목사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으로 도무지 흠이 없을 만큼 고매하고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기억한다. 평소 만년선비처럼 늘 과묵하고 조용하면서도, 속에 남달리 깊고 뜨거운 신앙 열정을 품고 있었다. 이를테면 경건한 뚝심 같은 것이 그에게서 풍겼다. 하나님은 그의 그런 점을 활용하여, 평생 사역자로 쓰셨다.
평안도계 억양이 담긴 그의 목청은 굵고 나지막하면서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있었다. 물론 그의 중국어 구사는 중국인과 전혀 다름 없어, 많은 한국인, 중국인들이 그를 진짜 중국인으로 알고 지내기도 했다.
모든 점에서, 그는 참으로 타고난, 탁월한 주님의 일꾼이었다.

한편으로 그지없이 담대하면서도, 수줍을 정도로 겸허해 자기 자랑을 싫어하던 주 목사는 죽음을 얼마 앞두고서야 '중국 선교의 꽃이 피려 한다'(성광문화사)는 자전적 백서 겸 중국선교 명세서를 펴낸 바 있다. 정말 꼭 필요해서 낸 책이었다.
필자도 고인의 생시에 부탁을 받아 책 편집에 일부 간여한 바 있어, 원고와 이 책을 참고하면서-출판사의 양해를 바란다- 주로 그가 성령님께 현저히 사로잡혔던 삶의 굵은 맥을 잡아, 특히 흥미로운 부분을 중심으로 몇 회에 나눠 간추려 써 보련다.

[중국의 지명들은 편의상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일한다.]






만주에서의 어린 시절

주관준은 1915년, 지금은 북한에 속해 있는 평안북도 태천에서, 4남 6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한-일 강제 병합이 있은지 5년째 되던 일본 지배 시대 초기였다. 지방 유지였던 아버지 주남홍은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듬해인 1920년, 다섯 살이던 관준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온 식구와 함께 고국을 떠나서 중국 요녕성 홍경현 한가령으로 아버지 주남홍을 찾아갔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 근거지를 둔 대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잦아 여기저기로 피난하고 다니면서 굴곡과 기복이 많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만주 무순을 거쳐 봉천(훗날의 심양) 인근의 현령 등으로 자주 이사를 했다. 가족이 대 식구여서 관준의 형들이 주로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 나갔다. 막내아들인 관준은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 고집이 세어, 밥도 제일 큰 그릇에다 그득 담아 주지 않으면 울면서 떼를 쓰곤 했다.

열 두 살 때, 살던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동네 중국 아이 하나가 "꺼울리빵즈!"(고려 놈의 자식)라고 욕을 하며 놀려 대더니, 대꾸 없이 가만히만 있던 관준에게 약이 올랐는지 나중엔 몸으로 대들었다. 관준보다는 다소 덩치가 큰 애였다.

그러나 관준은 형들에게 배운 씨름 기술로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한 순간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겁 먹은 그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다시 날 때려 봐. 또 잡아 메칠 거야"라는 관준의 느긋한 으름짱에 질려, 그 자신은 물론 다른 동네 아이들도 관준에겐 두 번 다시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어릴 적 교육

관준은 십대 초까지 순전히 전통 구식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먼저 익혔고, 형들에게서 한자를 좀 더 배우다 조선식 서당에 다녔다. 그러던 열 네 살 무렵, 저마다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지내는 동네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초조해져 부모님께 졸라 봐도 별 반응이 없자, 소년 관준은 결국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스스로 신식 학생이 될 계기를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동네의 육영학교(훗날의 '보통학교'/국민학교/초등학교)를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큼직한 십대 소년이 1학년 교실에 들어와 냉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엉뚱한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 놀란 담임 교사는 다가와서 내쫓으려 했지만, 만사를 각오한 관준은 끄떡도 않으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때마침 그 학교 교장의 눈에 띄었다.

관준이 설명하는 집안 내력과 자초지종을 들은 교장은 소년이 딱하기도 하고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기특하기도 해서, 1학년에서 공부할 수 있게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데다 머리가 커서인지, 그는 남들이 6년 공부할 것을 3년만에 끝내고, 19세 때는 중등학교로 진학했으나 집안 형편 상 여의치 못해 중단해야 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관준의 유다른 학구열은 기독교를 알고 나서 더욱 당겼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열 두 살 때인 1927년, 집안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 처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70세 노인인 이지은 목사였다.

관준은 그 후 백영엽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 서탑 교회의 설립자인 백 목사는 평안북도 도지사와 대광중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온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식구끼리 집에서 경배하다가 철령현 난석산으로 이사를 한 뒤 난석산 사태자교회(계창봉 목사)를 다녔다. 첫 모교회인 셈이었다.

그렇게 대 가족과 더불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던 관준은 조용한 사명감이 느껴져 서탑교회의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중등학교를 중퇴해 아쉽던 학교 공부를 이제는 신앙으로 잇대어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서탑교회의 목회자는 정상인 목사. 성경학교 교장이기도 했다. 교사들은 교장 정 목사를 비롯, 이지은/김대업/전재선/최혁주 목사였다.

20명 남짓한 학생들 가운데는 한석주/백리언 등도 있었는데, 훗날 모두들 전도자/목회자가 됐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남/녀로 나뉘어 앉아 경배하던 전통이 있었는데, 관준은 서탑교회 여성 고령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맡기도 했다.

한 번은, 성경학교 교사들 중 김대업 목사가 관준네 식구가 다니는 사태자교회에 와서 부흥집회를 이끌었다. 관준은 집회 시간마다 꼬박꼬박 참석해 경청했다. 새벽모임 때도 가장 일찍 나와, 맨날 그을음이 앉곤 하는 호롱불 유리 등피를 돌아가며 모두 말끔히 닦아 놓기도 하고, 맨 앞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주 청년의 남다른 면모를 유심히 관찰하던 김대업은 이내 그에게 깊은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관준의 앞날을 함께 얘기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훗날 그는 관준의 처남이 된다.


다시 밟은 조국 땅

다섯 살에 떠난 조국을, 그것도 여태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남녘 땅을 20대의 관준이 처음 밟게 된 것도 김대업 덕분이었다. 경상남도 마산에 있던 복음농업실수(實修)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

당대의 뛰어난 성경교육가인 윤인구 목사가 교장이었던 이 학교는 이름에 '농업'이 붙었지만, 실상 신학교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부산 동래에 자기 집이 있던 김대업이 관준에게 이 남녘의 학교를 소개한 것은, 은근히 그를 앞날에 자기 매제로 삼고 싶은 숨은 동기 때문이었다.   

아직 일제 치하인 한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의욕을 내비친 막내아들의 말에 관준의 부모는 처음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결국 승낙을 해 주었다. 당초 바로 윗 형인 관측도 함께 떠날 생각이었으나 최근 장가를 든 터라 못 가겠다고 하여, 혼자 나서는 관준에게 아버지는 쌀 한 가마니 값을 여비로 주었다.
 
만주 난석산에서 경남 마산까지는 장장 20시간이 걸렸지만, 어릴 적 떠난 조국 땅을 되밟고 윤인구의 제자가 된다는 생각에 설레어 그다지 지루한 줄 몰랐다.

대망에 찬 관준 청년을 싣고 힘차게 압록강 철교를 지나 조국으로 들어선 기차는 계속 남으로 달려 내려갔다. 능금 명산지인 황해도 황주에서는 코흘리개 때 맛보던 사과를 실로 오랜만에 사 맛보기도 했다.
한성(서울)에 도착해서는 일식으로 지어진 역사 밖으로 나와 광장과 주변을 구경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 서울이구나!" 라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목적지인 마산에 당도했다.

농업실수학교 기숙사에 자리잡은 관준은 학업을 닦으면서 교수의 한 명인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선교사 류용완(한국명)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뜰 잔디도 깎고 화장실 분뇨를 치우는 등의 잔일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뜰마다 으레 심겨진 토마토를 그 때 처음 보았다. 감보다 더 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맺히면 선교사 가족이 따다가 조리해 먹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돈을 모아 꼭 사 먹어 봐야겠다고 맘 먹었다.
그러나 돈이 생겨 정작 사 먹어 보니, 달콤한 것을 기대했던 상상과 달리 떨떠름한 것이 야릇하고도 희한한 맛이었다. '이런! 상한 것을 사 왔구나' 하고 다시 여러 개를 사다 먹어봤지만 마찬가지여서 실망 끝에 모두 내다버렸다.
과일이 아닌 채소인 토마토 맛이란 원래가 그렇다는 진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관준은 혼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변화의 계기

이처럼 주변 세계를 통해 얻는 폭넓은 체험은 하나하나가 관준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열림의 일부였다. 그러던 차, 그는 삶의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자신과의 중요한 첫 싸움에서 이긴 것.

그즈음 관준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지켜 봐 온 학교측의 신임으로 심부름 따위를 하는 소사 역할도 맡았다. 한 번은 학습 준비에 필요한 등사기와 문구용품을 구입해 오라는 학교의 지시를 받아 10원을 들고 인근의 일본인 상점을 찾아 갔다. 당시의 1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1원 50전 어치의 물품을 산 뒤 10원을 냈는데, 일본인 서기의 실수로 거스름을 8원 50전이 아니라 되레 5원 짜리 한 장을 더 보탠 13원 50전을 받아 왔다. '이게 웬 횡재냐!'는 식으로 속으로 쾌재를 부른 관준은 학교에다 구입 물품과 원래의 거스름만 건네 주고, 나머지 5원은 주머니에 간직한 채 어디에다 쓸지 궁리를 하며 지냈다.    

그 날 밤 취침하기 전, 관준은 여느 때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문득 그 5원 짜리 지폐가 눈 앞에 나타나더니, 이리저리로 아물대면서 기도 문이 콱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머리를 흔들면서 잊어버리려면 곧 다시 나타나 아른거렸다. 

난생 처음 물욕과 탐심, 유혹이 옥죄어 오는 굴레와 양심 사이에서 허우적대며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늦은 밤길을 걸어가서 상점에다 이러구러 사실대로 해명하고는 5원 짜리를 돌려 주었다. 일본인 서기는 웬지 계산이 맞지 않아 밤늦도록 주산 알을 굴리며 씨름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숙사로 돌아 온 관준의 속은 한결 가벼웠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잠시 담으로 막혔던 기도 문도 다시 열렸다. 이튿날 그 상점 앞을 지나려니까 일본인이 불러 고작 10전을 주면서 "호떡이라도 사 먹어라"고 했다.
나라를 말아 먹은 일본인들에 대한 한국 청년의 양심선언이었던 셈이다.

이 사건은 관준에게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정직이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동시에 중요한 것이며, 인품과 삶의 기본 자산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 뒤로 관준은 평생 거짓말을 할 줄 몰랐고, 아울러 이 체험은 정식으로 신학의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 역할을 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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