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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타이타닉의 참 영웅-하퍼 목사






타이타닉의 참 영웅-하퍼 목사


지난 4월 15일은 타이타닉(Titanic. 이하 '타이태닠'으로 표기)호 침몰 100 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 거대한 호화 기선(RMS=왕실우편선)이 처녀 항해에 나선 지 며칠 후인 1912년 4월 14일 밤, 

차디찬 북쪽 대서양 물을 헤치며 미끄러지듯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인간이 만든 최대의 이동 물체였던 이 배에는 수많은 서민들과 함께 국제적인 명사들, 거부들도 타고 있었다. 

그랬던 그날 밤 11시 50분경. 봄철이 되어 북극지방에서 흘러나와 표류하던 거대한 빙산 하나가 부딪쳐 와 배의 우현을 긁어버리고 갑판 위에다 얼음을 퍼부으면서, 동시에 아래 쪽 방수실 6개를 찢어 놓아 바닷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그 다음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2,229명 중 1,528명의 운명이 영원히 바뀐 밤이었다. 


   1세기나 지나놓고 나니 그동안 과학도 많이 발달하여, 침몰 원인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분석과 이론이 회자되기도 한다. 

   백 주년 기념 행사도 있었다.  

   기독교계 관련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도 있었단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는..크리스천으로서 볼 때 타이태닠 호의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존 하퍼 목사(Rev. Dr. John Harper)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진한 감동을 준다. 하퍼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 하거나 돌보지 않고, 잃어진 영혼 되찾기에 최선을 다하다 익사한 전도자/목사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무려 100년전 것이다 보니, 전설처럼 조금씩 미화 또는 경감된 부분들이 포함된 다양한 버전들이 있어서, 어떤 부분과 요소들이 진실이고 아닌지를 가려야 할 판이다. 그래서 되도록 진실에 가까운 팩트들을 모아 본다. 


 

하퍼는 침례교 목회자로, 당시 런던 월웙 로드 침례교회(Walworth Road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였다. 몇 해 전 아내, 애니 벨(Annie Bell)을 여읜 그는 여섯 살의 어린 딸, '니나'(원이름 '애니', 일명 '나나', '낸') 및 조카딸인 제시 리취 양과 함께 타이태닠의 2등급 칸에 승선했다가 변을 당한다. 

[ 다른 사진(링크 속 작은 사진을 두 번 클맄할 것)[각주:1]들을 보건대 아마도 리취 양은 하퍼가 아내와 사별한 뒤, 사역에 집중하려다 보니, 니나의 보모 겸 가삿일을 도울 돌보미로 들인 것 같다. ]    


 

하퍼네는 런던에서 미국 쉬카고로 여행 중이었는데, 당시 하퍼는 쉬카고의 무디 부흥재단의 초청을 받아 웨스트 쉬카고와 러 살(라 살) 애브뉴 코너(808 번지)에 위치한 무디 교회에서 연속 부흥집회를 이끌러 가던 길이었다. 하퍼는 바로 전년도인 1911년 11, 12월과 이듬해 1월까지 계속 무디 교회에서 집회를 이끈 결과가 성공적이어서 재차 초청 받은 것이다. 

 


 

하퍼네의 타이태닠 승선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존 하퍼 (티킽 No. 248727) 

배삯: 33파운드

클래스: 2등칸

출항날짜 1912년 4월 10일

출항지: 영국 사웉 햄턴 항 

목적지: 미국 뉴욬 항

동승자: 미스 애니 제시 하퍼(Annie Jessie Harper)

            미스 제시 윌즈 리취(Jessie Wills Leitch) 

 


하퍼네는 새로 건조된 거대한 배의 규모에 놀라면서, 아울러 수많은 승객들을 둘러보곤 했을 것이다. 


4월 14일 저녁, 하퍼와 미스 리취는 갑판 위에 서서 저녁노을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퍼는 이때 "아침엔 아름다울 거야."하고 중얼거렸는데,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약속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듯, 서로 헤어졌던 하퍼네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충돌하고 나자, 하퍼는 곤히 자던 딸을 깨워 담요로 덮어 싸서 안고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는 딸에게 작별 키스를 한 뒤 선원에게 넘겨 주어, 11번째 구명정에 미스 리취와 함께 태웠다. 하퍼는 다른 구명보트에도 끝내 오르지 않고, 영원한 곳으로 떠났다.  

하퍼는 앞서 삼년 전 아내를 사별했기에 딸을 데리고 살아남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거대한 배꼬리가 위로 쳐 들릴 무렵, 하퍼는 갑판 위로 향해 가면서 외쳤다고 한다: "여성들, 어린이들과 잃어진 영혼들을 구명정으로!" 그러나 타이태닠이 안쪽 깊은 데서 우르르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배가 폭발했다고들 생각했지만, 실은 두 동강이 난 순간이었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갑판에서 떨어지거나 캄캄한 얼음바닷물로 뛰어내렸다. 하퍼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퍼의 생애

 

존 하퍼 목사는 1872년 5월 29일, 스코틀란드 렌프리셔의 후스턴(미국식 발음: '하우스턴') 마을의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열 세 살이던 1886년 3월 끝 주일(28일)에는, 예수님을 자기 삶에 모셔들였다. 건실한 교육을 받은 그는 "젊은 혈기로 방탕하는 것"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해 학교를 졸업한 뒤 조경사 견습생으로 일했고, 나중엔 카핏 제작사에서, 또는 제지회사(일설 방앗간)에서도 일했다. 


그러던 4년 후인 17세 때 스스로 전도자가 된 하퍼는 마을 거리로 오가면서 열정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하퍼의 삶에서 분명한 점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삼켜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사역자들이 그의 교리적 입장을 물어올 때마다 하퍼는 "하나님의 말씀요!"라고 답하곤 했다. 


그렇게 5-6년간 거리에서 복음을 전도하던 이 젊은 사역자는 런던 뱊티스트 파이어니어 미션(침례교개척선교회)의 대표였던 E.A. 카터 목사의 눈에 들게 된다. 하퍼는 이 일에도 충성을 다하다가 1896년 9월, 고번 인근인 글라스고의 플란테이션에 있는 페이슬리 로드 침례교회(현 하퍼 기념교회)의 담임목회 사역을 시작한다. 이 교회는 본래 불과 25명으로 시작했으나, 13년 후 하퍼가 이곳을 떠날 때, 500명으로 불어났다.  

이 기간 동안 하퍼는 아내 애니 벨과 결혼하고, 귀여운 딸 '나나'를 얻었지만, 얼마 후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하퍼는 아이러닠하게도 생애에 여러 번 익사 위기를 넘겼기에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 살 반이었을 때, 우물에 빠져 거의 죽을 뻔 했으나 엄마의 인공호흡으로 살아났다. 26세 때는 바닷가에서 파도에 휩쓸렸지만 간신히 생존했으며, 32세 때는 지중해 한 가운데서 물이 새는 배에서 죽음에 직면하기도 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를 타이태닠 호에서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미리 여러 모로 준비시켰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퍼는 어둠 가운데서 희미한 불빛을 따라 있는 힘껏 헤엄을 치면서 물 속에 빠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한 젊은이는 배의 파편 한 조각에 매달려 있었다. 하퍼는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숨을 몰아 쉬며 "구원 받으셨나요?"라고 물었고, 젊은이는 "아뇨"라고 답했다. 하퍼는 그를 예수님께 인도하려고 애를 썼지만, 젊은이의 대답은 여전히 '노'였다. 


하퍼는 다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몇 분 후 하퍼가 다시 그 젊은이에게 헤엄쳐 왔을 때, 그 모습에 충격 받은 젊은이는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날 밤 어둠 속의 조난자들 가운데 구명정에 구조된 사람은 딱 6명뿐이었고, 그중 한 명이 바로 뱃조각 위에 떠 있던 그 젊은이였다. 하퍼는 또 "나보다는 님에게 더 필요합니다"라면서 한 여성(남성 설도 있음)에게 자신의 구명 재킽을 벗어주기도 했다.   

 


4년 후, 캐나다 온태리오에서 생존자 재회모임이 열렸을 때, 그 젊은이는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존 하퍼가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전해 준 이야기를 간증했다. 하퍼는 물 속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지만, 차디찬 수온과 기력 때문에 결국 바닷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주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럼 님도 구원 받을 것입니다." 였단다. 젊은이는 "나는 그분의 마지막 회심자입니다" 하고 말을 맺었다.

 

카터는 딴 사람들이 돈을 내밀어가며 구명정에 올라 자기만 살 궁리를 하던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 살렸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을 되새길 때, 하퍼는 참으로 타이태닠의 영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그는 젊은 나이인 39세를 일기로,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묻혔다.   



본 티엘티 독자들에게, 하퍼에 대한 몇몇 의문점이 있을 수 있겠다.

 

우선 아빠로서 엄마도 없는 어린 딸만 홀로 남겨 두고 죽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점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여성과 어린이들 먼저"라면서 구명정에 먼저 태웠던 점을 감안하면, 불가피하고도 오히려 용맹스런 결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무디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성도들과의 집회 약속을 지켰어야 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하퍼는 당장 주변의 잃은 영혼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만큼 최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무디 교회의 부흥강사 자리는 누구라도 메울 수 있지만, 이 위기에서 잃어진 영혼들을 돌아볼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하퍼는 알고 있었다. 더욱이 과거 여러 차례 익사 위기를 겪었던 하퍼는 바로 이때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부응할 최적기라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우리는 적시적소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민감해야, 나중 하늘 상급을 제대로 얻게 된다.   



딸 니나 이야기


니나는 타이태닠이 잠길 때, 리취 아줌마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니나는 배의 등불들이 꺼지는 것을 보았고, 물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뉴욬에 도착하자, 어린 '낸'은 이 낯선 땅에 왜 아빠가 오시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 큰 배에 아빠를 두고 떠날 때 제시 아줌마랑 같이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난 이제 아빠를 원해요." 그러나 아빠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고, 한 주 후 리치와 둘이서만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빠의 죽음 후 니나는 정말 고아가 되었다. 그후로는 삼촌들이 키우고 돌보았다. 니나는 그 끔찍한 재난에 대해 아무 말도 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녀가 타이태닠의 조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훗날 니나는 던프리셔 주의 모팻에 있는 세인 존스 교구의 폰트 목사와 결혼했다. 1922년 12월 모교회(현 하퍼기념교회)의 새 건물을 준공할 당시에는 개회식을 이끌기도 했다. 낸 폰트는 1986년 세상을 떠났다. [하퍼 기념교회의 현재 모습  ] 




 

사고 후 제시 리취 양의 전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보도 내용)


뉴욬발, 4월 20일-[단독급전]  한밤쯤 하퍼씨-존 하퍼 목사/박사-는 내 방에 와서 배가 빙산을 들이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그분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나갔다가 돌아와 구명재킷을 입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분은 딸인 나나를 팔로 안아 갑판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여성들은 상층 갑판으로 올라가도록 지시를 받았다. 나는 수직 쇠사다리를 타고 윗 갑판으로 올라가야 했고, 목사님은 내 뒤로 나나를 올려주었고, 사다리 맨 꼭대기의 선원들이 나나를 받아 내게 건네주었다. 

   작별 인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항해팀은) "배가 가라앉을 리 없다"고 거듭 거듭 확언했고 올림핔 호가 금방 도착해서 곁에 나란히 붙을 테니 우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구명보트에 태우고 남자들은 대기했다가 뒤따르라면서, 구명정 수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탄 보트에도 사람들이 이내 가득 차 열한 번 째로 본선을 떠났다. 

약 30분 후, 타이태닠은 침몰했다. 우리 보트는 약 1마일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목사님이 (나중 카파티아 호에 구출된) 여러 다른 보트의 하나에 올라타 있기를 바랐다. 우리가 다시 갑판 쪽으로 다가가면서 얼마나 그의 얼굴을 뵙기를 바랐는지! 그러나 모든 구명보트가 찬 것을 보고 나는 최악을 두려워했다. 

타이태닠에서의 마지막 날은 주일날이었다. 목사님은 우리의 아침 기도 시간에 내게 성경의 한 장을 읽으라고 하셨고, 그후에는 (선상의) 오전예배에 참석했다. 그날 하루를 조용히 유쾌하게 보냈고, 나나와 내가 6시쯤 저녁식사를 하러 가려고 목사님을 찾아갔을 때, 그분은 한 젊은 영국인에게 열심히 크리스토님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가 취침하기 전 갑판에 올라갔을 때, 서쪽에 여전히 한 가닥 황혼빛이 남아있었다. 나는 목사님이 하신 말을 기억한다. "아침에는 아름다울 거야." 그리고 우리는 객실로 내려왔고, 그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신 뒤,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 리취 양은 그후 웨일즈의 앨릭잰더 앤더슨과 결혼했다가 1928년 남편을 여읜 뒤 1963년 2월 6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

 



다음은 추후 발견된 하퍼 관련 자료들이다:


하퍼가 타이태닠 선상에서 쓴 편지가 남아있다. 이것은 회사(화잍스타)용 메모지에 쓰여진 것이다. 이 편지를 잠시 훑어보기로 한다. 



   내 사랑하는 영 형제에게: 


퀸즈타운으로 가기 앞서 몇 자 씁니다. 특히 우리가 북쪽에 있을 때, 당신이 베푼 친절을 잊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려고 말입니다. 내가 떠나기 전 프랱 부인의 기차행 편으로 보내려 했지만, 주말 11-12시 경의 열차편이 특히 바쁜 짬이라 여의치를 못했어요. 쉬카고에서는 보낼 게요. 월웙에서의 지난 며칠 동안 정말 멋지고 복된 한때를 보냈어요. '메리 아줌마'와 님의 모든 친절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모두 갚아주시길. 페이즐리 로드 교회의 모든 일들은 다 잘되리라고 믿읍시다. 전사들(the Warriors)은 여기 나랑 같이 있고, 현재까지 잘 들 하고 지냅니다. 


   가장 깊은 친절, 사랑과 함께

   님의 사랑하는 옛 목사 존 하퍼 



(하퍼의 또 다른 편지)



  친애하는 수녀원장님에게:


이 간단한 쪽지를 퀸즈타운으로 떠나기 바로 앞서 씁니다. 전사들은 나와 함께 있고 잘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나랑 함께 있더라도 우리가 다른 저 편에 있다고 생각하셔선 안돼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우린 8월이면 돌아와, 가을엔 스코틀란드에 있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지난 주 동안 월웙에서 복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 부흥의 계절이고, 나는 (..사라진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모든 나이 들고 어린 moucher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 이 옛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면 우편엽서 하나씩을 보낼 거라고 해 주세요. 


   님과 온 문중에게 

   사랑하는 옛 목사 존 



이 편지에서 'moucher들'('교우들'의 애칭?), '전사들'(동행한 기도용사들? 천군천사들?)이 실제로 누구인지, 신교 목사인 그가 왜 '수녀원장'(별명? 마을 친척?)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쉬카고 무디교회의 관련 문서 기록들 


다음은 쉬카고 무디교회 행정위원회의 1912년 4월 17일~24일 사이의 관련 문서 기록이다. 


1912년 4월 17일 비망록에서: 


타이태닠의 침몰에 관하여..

  세계 최대의 기선 타이태닉 호의 침몰에 관한 비보를 수신함. 영국 런던의 존 하퍼 목사가 딸 나나, 조카 리치와 함께 올랐는데, 현재까지 모든 정보로 볼 때, 아이와 조카만 구출받은 듯. 둘이 2,200 승객들 중 750명을 구한 카파티아호에서 내릴 때 맞으려고 울리(즉 어바인 Y. 울리 부목사: 편집 주)와 맥글래션 형제(교회 이사)-두 교우를 뉴욕에 급파. 하퍼씨의 죽음은 이 끔찍한 사고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의 하나.

그는 영국 런던 월웙 로드 침례교회에서 무디교회로 오던 길이었는데-3~6개월간(딴 문서엔 3~4개월)의 재 방문-그의 이전 방문으로 볼 때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여성과 아이들이 먼저 구출받는다는 원칙에 따라 비켜 선 듯. 

그의 죽음은 그의 사역에 의해 넘치는 복을 받은 쉬카고의 수많은 교우들의 깊은 슬픔일 것이다. 1595명(추후 확인 전)이 죽고 750명이 살아남은 듯. 


딕슨 박사는 울리 박사에게 뉴욬에서 하퍼의 딸과 조카를 맞으라는 전신을 보냄. 게일로드 형제(무디성서대학의 F.A. 게일로드박사)에게는 울리와 맼글래션 형제가 제대로 가는지 확인 정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함.


[급파된 사람들은 추후 게일로드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스 리취와 나나는 잘 도착함. 모든 것을 잃음.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웃 갑판에 올려졌을 때, 가족과의 분리임을 미처 모름. 작별인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 하퍼의 구조가망성 없음. ]


1912년 4월 24일 비망록에서:

맼글래션 형제가 여행보고를 보냄. 그와 울리 씨가 뉴욬시로 가서 난파 후 도착한 하퍼 형제의 딸과 조카의 안위를 돌봄.


[무디 교회는 미국에 아무 연고자가 없는 나나와 리취를 영국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결의한다. 울리 부목사는 그들과 함께 맨해턴 호텔에 묵었다. 울리가 보낸 편지에 따르면, 나나는 카파티아 호를 타고 뉴욬에 도착할 때까지 아빠의 죽음을 몰랐다. 

미스 리취는 당시 걸친 옷 밖에는 입을 의상이 더 없었고, 돈이나 귀중품 등을 전혀 건지지 못했다. 나나는 잠옷과 둘러싼 담요, 리취 자신이 감싼 얼스터 모직코트가 고작이었다. 카파티아호에는 머물 선실이 없어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밤낮을 머물렀다. ]


실천사항:

맼글래션, 울리, 에이친슨 형제들이 (하퍼 박사의 딸과 조카에게 친절을 베푼) 울리의 숙부 D와 베츠 내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도록 선임됨. 또한 영국 월웙 로드 교회에 위로의 안부를 묻도록.


실천사항:

본 위원회가 맼글래션, 울리 씨의 모든 여비를 전담.

 

실천사항:

밤에 전신으로, 그(하퍼의) 딸과 조카에게 영국까지 안전한 여행을 하길 기원.


고 J. 하퍼 목사를 위한 목회위원회의 봉사 내용


특별위원회가 나나 하퍼 양을 위한 특별 지원기금 조성에 관한 보고서 작성할 것. 교회 신문 편집장이 J. 하퍼 목사를 위한 기념호를 발행하도록 지시 받음. 




  1. 참고: 링크의 작은 사진 속 왼쪽 여인은 교회의 맹인 독창/연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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