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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가수 구하라와 윤심덕

가수 구하라와 윤심덕
-특히 자살욕구인들, 자살기도자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가수 구하라(28세)가 11월 24일 저녁 갑자기 숨진 채 발견됐다. 그녀의 절친인 배우/가수 설리(=최진리, 25)가 스스로 죽은 지 42일만이다. 연예인들의 오랜 연쇄 자살 풍조에 사회적, 개인적 충격이 커 가고 나라의 수심이 깊어간다.

이 글은 사실 (애당초 티엘티 애독자가 힌트를 던져 준) 윤심덕에 관하여 쓰려던 참에, 구하라의 죽음을 알고 '크리스천' 연예인의 자살 이슈로 부각시켜 쓰는 글이다. 윤심덕도 20세기 전반기에 조선의 첫 성악가/가수/배우로서, 더구나 표면상 크리스천으로서 자살했기 때문이다.  
 
구하라는 아이돌(idol, '우상'이란 뜻인 이 아이돌은 용어 자체가 참 문제다!) 그뤂인 '카라'출신이다.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이 무슨 풍조가 된 것 같아, 가슴 아프다. 그들의 잃어진 영혼 때문이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의 드높은 자살율은 세계적이 되어가는 추세인데 말이다. 일종의 사회적 롤 모델 내지 히어로/히로인들인 연예인들이 앞장서(?) 자살하니, 젊은이들이 지속적인 악영향을 받을까 우려스럽다. 

구하라는 모 그뤂 해체 후인 지난 해 9월 이후, 전 남친 최 모(28)씨와 최근까지 고소전을 벌여오다 극복하고, 계속 활발하게 활동해 왔단다. 또 비록 설리의 죽음에 쇼크를 "먹었지만", 고인 삶의 남은 몫까지 살아내겠다고 했던 그녀였다.  

구하라는 왜 죽었을까? 짧은 유서가 있다지만 내용은 알 수 없고, 설리처럼 악플 즉 악성 댓글(=덧글) 때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설리가 악플로 시달리던 '다음넽'의 '카카오'는 연예란 댓글 잠정 폐지 선언을 했는데, 구하라를 괴롭힌 악플들의 고장인 '네이버'도 같은 길을 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구하라는 요 얼마 전에도 악플러를 포함한 팬들에게 "한 번만이라도 좀 예쁘게 봐 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구하라는데 왜 구해주지 못했나?
듣건대, 설리처럼 구하라도 '크리스천'이었다는 정보가 있다. 2013년엔 아직 '무교인'(?)이었는데(예: http://www.dailywrn.com/3478 ), 2014년엔 '기독교인'으로 보도됐으니(예: https://m.blog.naver.com/culturecre/220051275619 ),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가수 구하라의 죽음이 특히 머릿속에 걸리는 까닭은, 지인들 사이에도 회자돼 왔듯 평소 그녀의 이름이 주는 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설리의 본명인 최진리도 그렇다. 고인이 된 남의 이름 갖고 이러쿵저러쿵할 계제가 아닌지 몰라도, 내딴엔 아쉬운 김에 꺼내는 말이다. 그녀의 특이한 이름이 어쩌면 기독교성(?)을 풍긴다 할 것이다. 구하라는 "찾으라", "얻으라"란 뜻의 구(求)하라로부터, 구(救)하라, 즉 "구원하라", "건져내라" 등의 다양한 기독교적 뉘앙스를 갖는다. 원래야 어떤 뜻이었든간에. 

그녀가 이름으로나마(?) (자신을) 구하라! 즉 구해 달라고, "저를 구해주세요~!"라고 평소 외쳐왔는데, 왜 그 누구도 미리 그녀를 건져내지 못했는가?! 생시에 그녀의 영혼부터 누가 구해냈으면, 목숨도 미리 건졌을 거 아닌가 말이다. 이건 이름 갖고 장난치는 게 아니다. 이름 그대로 구했으면 못 구할 리 없었건만, 못내 통탄스러워 하는 말이다.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느끼고만 지냈던 게 자책감이 드는 이는 나뿐인가. 

최진리의 이름 뉘앙스도 그렇다. 역시 앞서 자살한 비슷한 이름의 배우 최진실도 표면상 크리스천이었다. 비록 이름의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자칫 '최고의 진리', '가장 진실한' 이름처럼 생각되던 연예인들이 왜 하필 자살을 했는가? 죽기까지, 아니 스스로 죽음으로(?) 이름값을 한 것인가? 왜 하필 기독교적인 이름으로였는가? 

또는, 죽음으로 악에 대응하거나 진실을 입증하겠다는 발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엔 퍽이나 많다. 가끔 할복 자살하는 일본 명사들이나 분신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순교라면 모를까, 자살은 '딴 얘기'다. 자살은 아무리 미화하고 합리화해도 自殺, 곧 스스로 목숨을 뺏는 살인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남의 목숨이든 내 목숨이든 뺏을 권리가 없다! 태아의 생명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것은 영혼이 제대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기 전, 미리 그리로 강제이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건 국방 임무 수행중 적을 사살하는 것과는 또 차원이 다르다. 

윤심덕은 앞서간 연예인 자살자였다
크리스천 연예인으로서 자살했다는 것 외에도 구하라는 일본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윤심덕과 공통점을 보인다. 
배우 출신 가수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였던 윤심덕은 1927년 8월 4일 오전 4시쯤, 부산행 관부(釜)연락선(부산과 시모노세키/下関市 사이를 오가던 페리. 관부 대신 '부관'으로 표기하기도 함)인 도쿠주마루(德壽丸) 선상에서 대마도 부근의 대한해협(일명 '현해탄', 원명은 '현계탄(玄界灘)', 일어 겐카이나다) 바다로 풍덩~,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당대 언론에 따르면,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였단다. 둘 다 나이 30세였다. 윤심덕은, 유작이 돼버린 그 유명한 '사(死)의 찬미'를 불러 일제 강점시대에 유행을 탔다. 루마니아 작곡가, 요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의 왈츠 '도나우 강의 잔 물결(Valurile Dunării)'의 가락을 딴 것이다. 동반 자살한 것으로 추정돼온(자살을 가장해놓고, 타국에 생존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연인이자 천재 극작가였다는 유부남, 김우진(호: 수산) 또는 심덕(수선) 자신이 썼다는 노래 가사만 봐도, 수선의 자살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즉 수선은 수산이 써 준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르고 나서, 둘이 함께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위 사진 속 가사처럼 본래의 원문은 당대의 구식 표기로 돼 있었다)

 

비참 내지 참혹할 정도로 염세적, 비관적인 내용이다. 그러면서 다분히 교시적 또는 교훈적이다. 그 교훈이 옳든 그르든, 부분적으로 맞든 간에. 당대에 이런 염세성 노래가 일반적(?)이었다는 문화적 보편성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국적인 노래도 전혀 아니다. 가사를 보면, 수산과 수선 모두 초기 기독교적 (플러스/또는) 불교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선의 가정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으나 수선 자신의 정신상태가 허약했던 것 같다. 일제의 지배 때문이었을까? 어찌보면 슐로모(솔로몬)의 전도서 같은 냄새도 풍긴다. 그런데 노래 가사에 포함된 그 모든 것보다, 아니 그보다 몇 배나 더 허무한 것은 바로 죽음 자체이다! 이것을 그들은 몰랐거나 미처 생각지를 못했다. 그래서 이 노래의 교훈성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당시의 문화성을 표출했을 뿐이다. 

 

제목부터가 죽음의 신(死神)을 찬미하며, 그를 불러들이는 노래 같다. 이런 노래를 진지하게 듣거나 부른다는 것 자체가 자살의 영(Suicidal spirit=Spirit of suicide)을 불러들이는 셈이 된다. 자살령은 타살을 일삼는 살인령(Spirit of Murder)과 함께, 사탄이 영혼을 잃어버려진 채 지옥에 끌고 가려고 적극 부려온 중요한 악령의 하나이다. 이 노래는 윤심덕의 마지막 녹음 맨 끝에 실린 것으로, 배포된 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이 노래를 통해 자살령의 작용에 더욱 도움이 됐다. 

자살령은 성폭행 피해나 학대 등 육체적/정신적 상처, 현실과 내일, 미래에 대한 절망감, "아무도 날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식의 무조건적 불만 또는 거짓과 속임에 넘어감(믿음), 사람들과 상황으로부터의 배신감, 자타에 대한 불만/반항/불복종, 아이돌인 자신에게 쏟아진 악플 등에 대한 피해의식 따위를 구체적인 무기로 삼아 활약한다. 알고 보면, 자살로의 치달음은 '정해진 순서'처럼 너무나 뻔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자살로 멸망하지 않으려면, 평소 이런 것들을 멀리하거나 극복해야 한다. 자살을 다른 심리적 방법으로도 극복하기도 하지만, 최선의 방법은 예수님을 믿어 그 이름 권세로 자살의 영을 물리치는 길이다. 구하라는 한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가 이번에 단행한 케이스다. 설리와 구하라는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들이었다. 흔히 어릴 적부터 재능과 '끼'가 있는 데다 미모까지 받쳐주는 사람들이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한국사회처럼 외모를 밝히는 곳에서 미모가 달리면, 비싼 값에 성형까지 해서라도 미모로 인기를 덧보태려 애들을 쓴다. 

아이돌=우상
요즘은 미국의 '어메리카 같 탤런트'(America's Got Talent)처럼, 옛날의 장기자랑 같은 것들이 국제화되고 고급화된 것 같은 형태의 아이돌 출세 경쟁판들이 많아서, 웬만한 재주꾼들은 다들 나서서 뭔가 주가를 내 보려 애들을 쓴다. 아이돌이란 낱말은 본디 형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이돌론'(εἴδωλον)에서 왔다. 살아있는 사람 또는 죽은 이의 영적 이미지를 가리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신격화와 결부되면서, 거짓 신의 형상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현대에 오자, 아이돌은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착화(着火)된다. 추종세력을 거느린 문화적 숭배 대상(히어로/히로인)과 거의 같은 의미로 말이다. '스타'나 '컬트'와도 결부된다. 컬트라면 교주가 연상되고, 교주 같은 이미지가 쉽게 우상화된다. 자신의 재능/장기로 아이덜이 된 사람은 더 나아가 자신의 외모나 고유하고 특이한 제스처, 패션과 취향, 스타일 등으로 더욱 인기를 모으면서 우상의 주가를 높여간다. 

문제는, 아이돌은 그냥 아이돌=우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우상은 쓰러지면 허무하게 내동댕이쳐지거나 우상끼리 한데 모아 놔두곤 한다. 한 때 이스라엘 법궤는 맥없이 허무하게(?), 우상을 섬기는 펠레쉩(블레셋) 족에게 앗겼지만, 정작 펠레쉩 족의 주신인 다곤의 신당에서는 신당 우상들을 다 자빠뜨리고 역병을 몰고와, 그들의 공포를 자아냈다. 위대한 하나님이 법궤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냥 우상에 다름아니다. 

히브리 문화는 고대로부터 우상을 배격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시각예술을 경원시하는 성향이 있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는 우상 때문에 결국 망하다시피 했다. 그래선지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대신, 음악과 기타 장르를 주로 발달시켜왔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 '아이돌'들이 그래온 것처럼. 그런데 현대 유대인들 대다수는 예호봐(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맘몬 우상을, 예수 크리스토보다는 '제2메시아'관에 기초한 찌온주의(시오니즘)를 섬기고 있으니, 큰 아이러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아이돌 문화도 맘몬과 인기와 외모를 섬긴다. 

우상의 종국은 허무(虛無)
성경은 우상 섬김을 허무하게 볼 뿐더러, 우상 자체를 허무로 본다. 허무는 허무일 뿐, 어떻게 고쳐서 의미있는 무엇으로 만들 수가 없다. 허무의 해결은 그냥 허무한 것과 허무했던 길을 내버리고 떠나는 것뿐이다. 우상은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다. 쓰러진 우상을 도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우상 섬김보다 더 허무한 일이다. 아이돌의 맹점은, 위로 한없이 오르는 듯 자타에게 떠받들려 드높이 치켜지고 추켜세워졌다가..쓰러질 때는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그 끝은 자살로 마감되곤 한다. 허무의 종점은 거의 자살이다. 

하지만 다른 '종점'도 있다. 뜻밖에도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는 자살하지 않았다. 왤까? 초인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의 삶을 살핀 사람들은 그가 정신질환 탓에 자살할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한다. 니체의 누이는 오빠의 숱한 원고를 출판하여 혼자 돈을 챙겼다. 그중 하나가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였다. 권력에의 의지를 논한 니체는 자살할 의지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살이든, 의지의 불능성이든 귀결은 대동소이하다.  

역사 속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특히나 화려한 무대를 자랑삼는 공연예술인들이 그렇다. 그들 자살자 다수는 인기절정에서 갑자기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격이었다. 

가수나 배우들만 자살이 흔한 게 아니다. 패션계도 그렇다. 웹 문화언론인 투오션즈바이브뉴스(2OVN)의 네리셔 퍼텔 편집위원이 지난해 쓴 패션뉴스 한 가지의 제목은 '왜 수많은 유명 패션디자이너들이 자기 목숨을 앗는가?'였다. 
요 며칠 전 뉴욝타임즈(NYT)는 '자기 세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네덜란드 출신의 조세푸스 멜키오르 티미스터를 꼽았다. 패션매거진 '보그'도 그를 '금세기 패션스타들'의 한 명으로 추켰다. 한때 그를 후원했던 벨기의 여성 재력가, 안네 샤펠은 그를 '장인(master)'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티미스터는 11월중 자살했다. 그의 재능을 받쳐주지 못한, 잇따른 재정난 탓이었다. 재능은 있어도, 재력이 없으면 쉽게 자살로 가곤 한다. 

자살욕의 실체를 알자
자살의 유혹과 자살욕구. 이건 실컷 써먹고 내버리는, 마귀의 고도의 술책의 하나다! 마귀는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목표다. 반면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의 뜻은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서 영원한 낙원의 나라인 천국에 이끌어들이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적인 진상을 인정하려는 사람은 적다. 자살자는 악플이나 재정난 따위가 없는 저승에서의 '자유'를 희구하겠지만, 그건 마귀의 속임수다. 자살이라는 달콤한(?) 유혹의 개념은 자살노예의 굴레로 이끈다. 

자살이라는 흔한 귀결은 모든 것의 귀결이 아니다. 자살 후에는 자기 맘대로의 행복이 아니라 엄정하고도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필자의 이야기가 아닌, 성경의 증언이고, 진리다. 

자신의 영혼에 끝내 책임지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영원히 버리는 사람이다. 자신의 영혼을 책임질 길은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로 귀의하는 길 뿐이다.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가 마지막 가는 사람들의 올바른 기도이다. 자살기도자가 구조받으면 다행이고, 자살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면 더 다행이지만, 혹시 구하라처럼 한 두 번 또는 여러 번의 자살기도 끝에 끝내 자살로 제 목숨을 마감했다면, 숨 넘어가면서도 성경, 이 글이 생각난다면,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호소해 보자. 그러나 의도적 또는 계획적으로 그 기도를 한 뒤에 자살하는 것은 순서가 뒤집힌 것이며, 결과도 전복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이다.  하나님과 그 분의 진리는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자살 저편에 천국이 있으리란 생각은 위대한 착각이요, 환영(幻影)에 더 가깝다. 성경은 자살의 옳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정말 천국에 갈 기회가 생긴다. 

아이돌들의 부모들에게 
이런 얘기는 아이돌들의 부모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부모들 다수는 돈과 명예를 바라고 적극 자기 자녀를 아이돌로 만들려고 한다. 또는 아이돌 되는 것을 "잘 해 보라"며 가만 놔 두고 방관한다. 심지어 자신이 부모인 일부 목회자들도 그러고 있다. '아이돌'의 뜻이 우상임을 정작 신자나 목회자가 까마득히 잊기도 한다. 연예계의 무한경쟁에서 이겨 아이돌이 되는 게 오히려 "얼마나 좋으냐?"고 싱글거리기도 한다. 미래의 아이돌에게서 십일조라도 두둑히 받아낼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인가? 아서라! 착각하지 말자. 십일조라고 해서 다 거룩한 돈은 아니다. 미안하지만, 영적 창녀와 다름없는 아이돌들도 있다. 자녀출세욕에 휘말려 아이돌 인기절정의 허무를 창출하지 말라. 올바른 출세가도도 얼마든지 있다. 자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마라. 맘몬의 노예, 간특한 사탄의 속임수에 비참한 희생자가 되지 마라.  

'악플러'들에게: 
아이돌 다수가 인기 절정에서 또는 인기 가도를 달리다가 악플에 상처받고 나가 떨어진다. 그러다 끝내 못 이겨 자살로 치닫는다. 도대체 그들을 죽이는, 또는 죽이려는 악플러들의 심사 내지 심리는 뭘까? 좋게 봐 줘서, 악플러들은 과거 자신들이 '상처'를 받았다며,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것을 즐긴다. 심지어 상대방이 자살하기까지(!) 지켜보며 즐긴다. 상처를 받으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으려는 것이 흔한 세상 인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악플은 어디까지나 악이지, 선이 될 수 없다. 악플은 결국 끝없는 상처를 놓고 복수심과 거기서 울어나는 저주를 가져온다. 회개와 뉘우침 없는 악플러들의 귀결도 결국 천국 아닌 지옥이다. 악플러들끼리 어울려 낄낄대며 상대방의 불행과 비극을 즐길 수 있는 천국은 없다. 악플 인생은 악플 자체처럼 비참하다. 악플러의 삶도 아이돌 자살자 못지 않게 비극인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뉘우치고 악플을 중단하면 최소한 행복이 찾아들 공간과 여유가 생긴다. 거기에다 예수님을 믿으면, 차원이 다른 영원한 행복을 쟁취할 수도 있다. 내 말이 아닌, 성경의 절대 진리이다. 안 믿어지는가? 죽어보면 안다. 끝내 안 믿어지면, 죽어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죽어보기엔 목숨이 하나 뿐이며, 그러기엔 너무 늦다. 그러니, 죽기 전 미리 깨닫고 믿길 바란다. 

스스로를 살인하는 자살로 마감하거나 니체 같은 허무에 갇히지 않길 바라며.. 독자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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