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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

개혁주의자들이 모르는 것


개혁주의자들이 모르는 것



흔히 '개혁주의'라 함은, 장로교나 개혁교(the Reformed church)가 견지해온 칼뱅주의 중심의 사상을 말한다. 필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장로교에 속해 온 데다 장로교를 떠날 마음이 별로 없으니, 아직은 개혁주의권 사람이다. 나와 아내가 영언(방언)을 시작하는 등 성령님의 은혜를 입고 나자 신앙 문제로 날 지독하게 박해하고 결국 자기 교회에서 내쫓은 사람은 내가 장로교를 떠나길 바랐지만, 여태 떠난 적이 없다. [참고로, 나와 신자들을 박해한 그는 훗날 상당한 대가를 치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나는 전형적인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성령님의 은총을 입고 나서는 신학이나 사상을 성경보다 앞세울 생각이 전혀 없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신학 사상을 결코 성경보다 중시하지 않으므로 그 어떤 신학적인 '-주의자'도 아니며, 구태여 '-주의' 딱지를 붙이자면 성경주의이다. 그 누구도 내게 개혁주의를 강요할 수 없다. 성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교로 자처하는 학교 출신인데, 나의 스승들은 모두 칼뱅주의로 철저히 무장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신학적으로 좀 여유 있는 입장을 지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의 '여유'란, 칼뱅주의 입장을 떠나 다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관점과 시각상의 여유를 가리킨다. 지금 돌아보면, 실로 숨막히는 듯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모르고 지냈다. 나 자신 그 속에 깊이 처박혀 있었으니까. 


개혁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을 여기에 논함은, 내가 과거 나 자신이 개혁주의자로서 잘/영 몰랐던 것에 준한다. 

우리는 적어도 성경 진리 문제에 있어 '여유'를 논할 수 없다. 절대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다르다. 신학은 절대로 절대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사상 체계일 뿐이므로, 그것에 관해 왈가왈부할 여지가 많다. 성경의 절대적 내용을 다룬다고 해서 신학이 성경과 대등하다거나 우리에게 구원을 갖다 주지 못한다. 신학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고 믿는 사람은 이단아이다. 


나는, 신학이 명목으로는 "(성경의) 하나님에 관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성경대로가 아니며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는 사상체계는 아니었음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다양한 신학 학설들이 성경에 있는 많은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신학에는 결코 절대성이란 게 부여될 수 없다! 비록 하나님을 다룬다고는 하나, 다량의 인간적 이론을 다루는 순수학문이라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신학에 절대성을 부여하려 한다면, 이 역시 이단이나 다름없는 발상이다. 오직 원초적인 성경 진리만 절대성을 지닌다!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계속, 신학의 상대성을 말해 보련다. 신학계는 다양하다. 넓이로는, 문제가 많은 카톨맄교, 정교, 성공회에서부터..온갖 잡다한 이단들까지 저마다 '신학'이란 것을 논한다. 또한 깊이로도 다양한 수준과 수위의 신학이 있고, '개혁주의'라는 것 안에도 극보수파로부터 중도파, 극진보파까지 저마다 개혁신학을 말한다. 신학의 상대성을 말해 준다. 심지어 요즘은 타 종교에서까지 '신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곤 한다. 

따라서 신학자 속에 또는 신학자들 사이에 늘 문제와 논란의 여지가 상존해 있다. 각자의 견해와는 상관 없이, 어느 신학이 옳은지는 상대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모든 신학은 절대적 잣대인 성경 진리에 검증 받을 수 밖에 없고, 그래야 마땅하다. 성경 진리에 검증을 거부하거나 검증 받을 수 "없다"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신학이 아니며, 존립할 수도 없다.  


신학이란 것은 본래 천주교에서 비롯된 학문이다. 신학교도 본래 천주교에서 왔다. 천주교 주요 제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성당(교회)이 있었고, 광야 은둔 수사들과 수도원이 있었으며, 신학교가 생겨났다. 신학도, 신학교도, 신학자도 모두 본래는 천주교에서 유래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교는 이것을 본든 것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다양한 천주교 신학자들의 사상도 본땄다. 중세 개혁가 장 칼뱅이 가장 본받은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개혁파가 알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다량은 천주교도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는 천주교 신학의 대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천주교로부터의 철저한 개혁이나 이탈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개혁주의자들은 유난히 은연중 자기네 신학에 늘 절대성을 부여하는 독단적/독선적인 면모를 보이곤 한다. 그런 개혁주의자들이 흔하다. "이것 외엔 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누가 칼뱅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반박하거나 개혁주의권을 떠나면, 혹 표면상으로는 모르되 내심 상대방을 거의 이단시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이 오만하다. [개혁주의=성경]이 아닌데도 말이다. 

 

칼뱅주의자들 또는 개혁주의자들이 간과하기 쉽거나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칼뱅도 거짓말을 남발할 수 밖에 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는 진실이다(로마서 3'4 참조). 그들은 흔히 칼뱅의 사상이 "가장 성경적"이라면서 마치 그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양 거의 절대성 비슷한 것을 부여하려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칼뱅 역시 나와 똑 같은 인간인 데다 그가 성경 기자들중 한 명인 것도 아니며..그의 생각이나 행실이나 삶의 열매 등에 무척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성경적, 역사적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 진상을 노골적 또는 은연중 부정하려고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칼뱅에 관련된 역사적 문건들이 발굴되고 인터넽 등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어 칼뱅의 다대한 문제점들이 여기저기 발견되곤 하자, 개혁주의 사람들은 자기네가 마치 사경에 처한(?) 것쯤으로 알고 칼뱅의 장단점을 진솔하게 논의하기보다는 이런저런 변명으로 칼뱅과 칼뱅주의를 옹호하는 데만 급급한다. 사람은 모두 장단점이 있고 나름의 열매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태도는 모든 영을 검증하라고 명령하는 성경의 교훈(요한서신A=요일 4'1)과는 상치된다. 나는 개혁주의자들의 이런 개인선호적, 명사중심적 편향성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대조적으로, 사도 파울은 그런 명사중심적 편향성을 적극 경계한 사람이었다(참고: 갈라티아서 2'1~10. 특히 문맥에 유의).  


대조적으로, 내가 아는 수많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뱅주의자들보다는 열린 사람들이다. 개혁주의자들처럼 그렇게까지 아르미니우스 사상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 다수는 성경과 일치하는 칼뱅의 사상 일부를 기꺼이 동의하고 공감하기도 하며 필요하면 과감히 수용한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즐리까지 그런 면모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감리교 사람들 상당수는 웨즐리의 단점과 약점을 노골적으로 스스럼 없이 논하곤 한다. 웨즐리 역시 인간이었기에, 문제가 많았던 탓이다. 


개혁주의권 사람들에게 묻는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이 17세기에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단시되었지만, 지금 개혁주의가 공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단시하는가, 안 하는가? 내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표면상 이단시하지도 않을 뿐더러 할 수도 없다. 개혁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단시하면 자동적으로 개혁주의도 이단시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신학 사상은 상대적이며 따라서 변모한다. 그것 자체가 진리가 아님을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단시 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면서 '개혁주의 충성파'로 자임한다. 그런 사람들이 특히 성경적으로 문제시 된다.    

성경 진리에 충성된 것이 옳은 태도인가, 아니면 칼뱅의 성경해석이나 그의 신학체계에 충성된 것이 더 옳은 것인가?



'개혁주의'라는 명칭의 적용 범위의 문제도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 역시 천주교와 근본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개혁가의 한 명이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역시 개혁에 동참해왔기에 그들 역시 개혁파의 일부라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은근히 부정하려 든다. 그들 가운데는 웨즐리는 인정해도 아르미니우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칼뱅주의자들만 개혁주의자, 개혁파가 아니다! 루터교도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개혁파 쪽 사람들이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도 본래는 정치적인 이유로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천주교와 아직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지만, 역시 개혁주의 사상 다량을 흡입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앞 부분에 성공회가 생기기 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에게 보내는 헌사를 썼다. 성공회도 개혁파라면 일종의 개혁파라는 말이다. 

개혁가들은 칼뱅 뿐만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 후스, 위클리프, 루터, 츠빙을리...등 수많은 다른 개혁가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개혁주의'라 하면, 유독 칼뱅과 자기네만 개혁을 표방해 온 듯한 느낌과 환상마저 준다. 명칭 자체가 곡해와 의혹을 안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영어의 the Reformed/리폼드라는 말은 "개혁된"이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서 개혁(지향)주의도 아니고 이미 개혁된 사람들의 사상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리폼드는 원칙적으로 칼뱅 뿐 아니라 천주교에서 이탈한 모든 개혁가들과 그 교파들을 통칭하는 뜻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다시피 칼뱅주의자들이 독점한 양상이다. 


또,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실제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칼뱅주의만 개혁주의(reformational-ism)로 불리는 게 아니며, 칼뱅주의자들만 개혁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개혁을 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개혁주의이기도 하다. 



둘째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대로의 성령님의 패턴을 모른다. 여기서 성령님의 패턴이라 함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님이 사역해 오신 방식을 가리킨다. 한 분이신 성령님은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영이셔서 어제나 오늘, 언제나 변함 없이 한결같은 하나님이시건만, 개혁주의자들 대다수는  성령님의 '변모' 같은 개념을 주장한다. 바로 이적/은사/신유/영언(방언).. 등 성경에 나타난 거룩한 초자연적인 것들의 소위 '종식론'(cessationism=단절설/중단설)이란 것이다. 이것은 언필칭 신본주의나 절대주권주의를 표방하는 그들의 커다란 신론적 모순점이다. 성경대로의 하나님의 불변성을 제대로 모르고 그 분의 사역 패턴을 모르면서, 어떻게 신본주의나 절대주권주의 따위가 가능이나 한가? 성령님의 '변화'/'변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론을 논할 자격조차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자주 논하면서도, 성령님이 성경의 실저자이심을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성경대로 믿는다면, 신학논리적으로라도 결코 '종식론' 같은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 예수 크리스토님의 영으로서 늘 한결같으시기에(참고: 히브리서 13'8) 오순절 이후 그 분의 사역 방식도 늘 변함 없다! 행전 2장 이후에 초대교회에 나타난 그 분의 권능의 역사는 코린토교회를 비롯한 초기교회에도 나타났고, 오늘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지탱된다. 변하는 것은 그 분이 아니라, 그 분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태도일 뿐이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늘 거짓되다(로마서 3'4). 그 분의 말씀에 절대 의존하지 않으면, 헛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개혁주의는 '종식론' 따위의, 성경과는 딴 소리를 한다. 더 큰 문제는 그 딴 소리를 성경대로라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칼뱅 사상을 절대화하는 개혁주의의 오만과 독선이 있다. 


종식론이 사실이고 진리라면, 성도들은 현재 성경 한 권만 달랑 갖고 있을 뿐 아무런 초자연적 유산이 없는 셈이다. 개혁주의에 따르면, 은사건, 신유이건, 영언이건, 이적이건, 성도는 아무 초자연적 혜택도 못 받는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개혁주의권 사람들 다수는 거의 구원관만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구원과 천국 소망 이상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혁주의권 신자들이 많다. 

물론 무슨 제자도입네 성장입네 리더슆입네 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현대에도 일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배제한 것들이다. 그들은 '초자연'이란 말 자체를 꺼려한다. 모조리 악령에게서 오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연신이 아니라, 유일한 참된 초자연적 신(the Supernatural God)이시다! 마귀나 그 졸개들은 빛의 천사인 양 흉내만 낼 뿐이다. 가짜 초자연일 뿐이다. 진짜 초자연은 성령님의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 성령님에게서 초자연적인 것을 다 빼버려 사실상 성령님을 무장해제 내지 비무장시켜 놓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비초자연적인 것을 모두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씀! 말씀! 말씀!을 외쳐대며 마치 성경이 자기네 전유물인 양, 자기네를 유일한 말씀 중심주의로 생각하지만, 사실, 다름아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권능적이고 초자연적이며 그 속에, 그리고 현재의 성령님께 초자연적 요소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지낸다. 


구원과 거듭남 자체가 초자연적이다. 결코 자연적인 사건일 수가 없다. 내 몸과 혼이 아닌 내 영이 구출되고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는 사건이 어찌 범상하고 자연적인 사건일 수 있겠는가? 비범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분명 굉장한 내외적 변화가 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개혁주의권 사람들을 보면 대다수가 밋밋한 구원관을 갖고 있다. 그냥 교회 다니다 세례를 받고 오래오래 지내다 보면 절로 구원받는 양 말이다. 초자연적이 아닌 자연적 사건으로 오인하는 듯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개혁주의권 지도자들은 구원에 관해서도 뭔가 초자연적인 요소가 보이면, 거의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래서 교인들은 거듭남의 굉장한 사건도 조용히 체험하고 조용히 지낸다. 뭔가 표를 내면, 이상하게 취급 당하니까.

지금은 교회에 따라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한국교회가 대표적인 부흥과 개혁 사건으로 내세우는 한국 초기교회사의 장댓재(장대현)교회 사건을 보면, 주로 회개와 생활변화에 관한 것이다. 물론 성령님은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신다. 그런데 동시에 성령님은 초자연적 신이시다. 그 분은 전능하시니, 자연에 영향을 주실 수 있지만 자연을 통해 사역하시지 않는다. 회개도 초자연적일 수 있지만, 회개 이상의 것-이적/신유/은사/영언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패턴이라는 것이다. 

왜 장대현교회는 회개와 변화 밖에는 없었을까? 장로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이상은 성령님도 어쩌실 수 없었다. 그 분은 강압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을 갈망하고 성경대로 제대로 알고자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믿음으로 갈구하고 히브리서 11'1 말씀처럼 믿음으로, 능동적으로 선행(先行)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은 성경대로 역사하신다. 

신학과 주의로 이리저리 필터링하면, 필터링한 만큼만 역사하신다. 왜냐고?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자기 믿음을 확증하라는데도 사람들은 확증할 생각은 않고 은연중 자기 믿음이 늘 온전한 줄, 또는 가망 없는 믿음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은 흔히 말하는 '종교생활'과 방불하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성령님의 패턴을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 언제나 이전에 일하시던 방식대로 하신다. 그 분은 조금도 변하시지 않았다. 즉 오순절 이후 초기교인들에게 영언/은사/신유/이적으로 역사하신 대로 오늘날도 현대인에게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종식론' 같은 이론의 신학으로 필터링한 하나님은 성경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권능 역사가 과거와 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세 카톨맄교 신도들과 현대 신교 교인들이 성경 그대로 믿지 않고 신학으로 걸러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령님의 역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 분은 온유하신 분이어서 인간에게 강압적으로 사역하시지 않는다. 


개혁주의자들은 절대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지 않으므로, 성령님의 사역 패턴을 오해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래서 인간이 믿는 만큼만 사역하신다. 

사람이 성경 그대로 믿고 행하면, 성령님께서도 그를 향한 사역의 폭을 넓히신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개혁주의자들은 모르고들 지낸다. 하지만 조금씩 깨닫고 아는 사람들도 이젠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권 안에 머물러 있는 한은 상당한 또는 심한 박해를 받으므로 거의 입을 다물고 지낸다. 



아직도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자기네 믿음이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들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격으로 스승의 스승의 스승..들에게서 배운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 비좁은 알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는 길은 모든 선입견과 신학적 주견을 내던지고 성경 진리 앞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부딪는 길 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를 비춰 볼 수 있는 하나뿐인 영적 거울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지만,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영적 싸움이다. 


대다수의 개혁주의권 사람들은 영적 싸움을 정신적 싸움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리스-카톨맄교 선분으로 이어져온 인간 이원설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고 믿고들 있다. 이것은 유대교와도 비슷한 인간론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분명 인간 ('삼분설'이 아닌) 삼원론을 강조해 준다. 영과 혼은 표면상 모호해 보여도, 본질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영이 인간의 실존재이고 속사람이지, 혼이나 몸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동물에겐 혼만 있을 뿐 영은 없다. 그러나 죄인들은 영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영이 본질임을 모르고 혼만 붙들고 지낸다. 만약 혼이 정녕 인간의 본질이라면, 철학자들은 정녕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들이며 거의 다 구원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철학이 전혀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없다!


혼은 평소 영과 결합되어 구분이 잘 안된다. 그러나 말씀이 메스처럼 가해질 때 확연히 구분된다. 히브리서 4'12 말씀의 부분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성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개혁주의자들은 드물다. 철학적 이원론을 굳게 믿는 탓이다.  



영적 싸움은 혼적인 싸움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고 더욱이 영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속사람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혼과 심지어 몸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영적 싸움은 근본적으로 영들끼리의 싸움이다. 사상전이 아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오직 마귀와 그의 악령들만 우리의 적이다. 인간 영혼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하지만 사상전에서는 상대 사상가들까지 증오하고 죽이기가 일쑤다. 실제로 개혁주의권 안에서 수많은 영적 물리적 살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칼뱅이 주도하는 종교적인 제네바 시의회는 신정(theocracy)의 이름으로 이단자들과 불법자들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칼뱅주의와 견해를 달리했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가 상륙한 남 아프리카에서는 하나님과 성경의 이름으로 여러 세기동안 인종차별이 자행됐다.  


이것은 구약적, 주권주의적인 사고방식 탓이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며, 영적 싸움을 물리적 싸움으로 오인한 탓이다. 신정의 이름으로 처단한다고 해서 하나님까지도 그를 처단하신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권 사람들 다수는 '신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정반대로 신약 정신에 위배되는 극단적인 인본적, 인위적 행동을 한 것이다. 


신약시대의 영적 싸움은 구약 때처럼 물리적 싸움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냥 영적 싸움일 뿐이다. 사상 싸움도 아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제어하는 것이 영적 싸움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빌지 않고 영적 싸움에 이길 방법이 없다. 인간은 성령님의 권능 빼면 거의 시신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식으로 성경책만 붙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성령의 권능과 은사..등은 오순절교/순복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직 거듭나서 믿음으로 활용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 점을 개혁주의자들은 모른다. 



개혁주의권 사람들은 개혁주의 사상을 가지면, 일단 다 건전하고 안심이고 다 옳다고 할지 모르나, 개혁주의가 다 옳다고 한다면, 개혁주의자들도 전반적으로 두루 의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는대로 개혁주의권에는 다양한 온갖 이질적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대표적 사례로, 표면상 분명 개혁파 사람인 노먼 빈슨트 필은 일종의 목회자인데도 온 세계 비밀집단 사람들이 존중해온 고위 인사에다 사실상의 뉴에이저였고, 역시 개혁파 사람인 라벑 슐러는 필과 대동소이한 인사이다. 최근 은퇴한 개혁주의자 좐 파이퍼는 맄 워런 같은 문제 명사들을 적극 지지한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미 교계 명사, 좐 매카터는 철저한 주권주의자인 동시에 내노라는 종식론자이다.  


주권주의(dominionism)는 오늘날 교파와 교단을 넘어 심지어는 프리메이슨 등 비밀집단 사람들과도 같은 향방으로 걷고 있다. 땅의 영역을 7개로 나눠 '7 권역', 일곱 산봉우리 정복을 지향해온 주권주의는 관상영성(comtemplative spirituality), 떠오름영성(emerging spirituality)은 물론 '목적 영성', 리더슆 중심 영성, 신사도(New Apostolic spirituality)영성, 미래영성, 뉴에이지 영성 등 수많은 이상(異常) 영성의 지도자들이 함께 걷고 있는 노선이다. 


현재 수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어둠의 주권주의 운동에 가담되어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라고 해서 유별나고 특별날 게 뭔가? 다른 사상과 마찬가지로 그냥 인간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 자체가 절대진리가 아니다. 오직 성경만이 절대진리일 뿐이다. 


대다수의 장로교인들이 장로교 신학으로 틀잡힌 장로교 교리에 묶여 지내므로, 성경 그대로의 세계를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에 이미 [훗날 장로교단 총회장이 된(!)] 내 모교회의 "우리 목사님"이 새로 부임한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여, 수시로 교우들끼리 영언모임을 갖고 매일 새 영언자가 추가되고 그 목회자의 아내가 영언과 예언과 영언 통역과 분별을 하는 등 다양한 초자연적 사역이 일어났다. 

내가 아는 수많은 장로교 명사들을 비롯한 목회자들이 영언을 시작했고, 한동안 영언/예언 등을 했거나 현재 하고 있다. 수많은 장로교 목회자들이 신유/이적 등의 초자연적 사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칼뱅주의의 믿음이나 교리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 상당수는 두려워서 그 역사적 진실이나 현재의 이 진상을 부인한다. 칼뱅주의가 '진리'라는 노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는 위선자들이다.  


뭘 말하는가? 개혁주의자들이 굳게 진리로 믿는 많은 부분들이 성경과는 다른 한낱 거짓 '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주로 칼뱅의 머리에서 나온 사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 개혁주의권 사람들이 한시빨리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기를 희구한다. 이름만의 진리라는 사상의 알 껍질을 꺠기를 바란다. 칼뱅도 한 인간일 뿐이었고, 그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로마서 3'4a 말씀의 적용 대상을 면할 길이 없음을 인정하길 바란다. 모든 영은 검증돼야 한다(요한서신A=요일 4'1). 예외가 없다. 칼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나는 장로교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내 놓고 그 앞에 부복하여, 진정 성령님께 지배받자는 것이다. 성경대로의 성령님을 믿고, 그 분의 권능사역을 힘입자는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를 무지막지하다느니 '교회 파괴자'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결코 개혁주의의 하나님이거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어디까지나 성경대로의 그 하나님이실 뿐이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시니, 성경대로 사역하실 뿐이다. 개혁주의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 분은 개혁주의 방식대로 일하시지 않는다. 성경만을 내 놓으시고 종식론/중단론을 따라 잠자코 계시지 않는다. 

오직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만을 위해 그들의 믿음과 그들의 의지만큼 권능으로 사역하신다. 강압적으로 사역하시지 않는다.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은 개혁주의에 종속되지 않으시며, 딱히 개혁주의의 지원자도 아니시다. 그냥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도우실 뿐이다. 그 분 자신이 로고스요, 유일한 길과 진리, 생명이실 뿐이다. 그 분을 개혁주의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이 다음에 천국 가면, 개혁주의자들만 가득 차 있으리라는 발상은 '위대한 착각'일 뿐이다. 거기는 개혁주의자이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든 거듭난 사람들만 와 있게 된다. 

개혁주의가 천국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주의자들 다수가 이 불편한(?) 진상을 잘 모르고들 지낸다. 개혁주의가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참된 개혁이란, 성경대로의 자기개혁이다. 자기 사상을 갖고 남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직 성경 진리로 먼저 자신이 개혁되고 나서, 성경대로 남을 훈련시키면서 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 또 자신과 자기 교회도 개혁되지 않으면서, 교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개혁을 부르짖어 봤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우선 일부 비성경적인 교리들부터 개혁해야 한다. 전혀 성경과는 다른 '종식론'부터 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참 개혁이 이뤄지질 않는다. 개혁됐다느니, 개혁되고 있다는 착각과는 달리 말이다. 



오해 말라. 난 개혁주의자들의 영혼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나의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개혁주의권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사상 가운데 비성경적인 요소들은 경계한다. 


개혁주의는 개혁주의권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런 절대진리가 아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러하다.

개혁주의와 성경을 구분할 수 있는 통찰과 의식-그것이 올바른 생각이다. 

성경 그대로를 믿느라 개혁주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그것이 바른 신앙이고 바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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