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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2 (샬롬)

             에머릭의 18세기 초상화 (가운데 네모 속)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2 

평자: 샬롬


참고 번역서: '그리스도의 수난'

전민경 옮김/예찬사/2004



[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1 로 돌아가기] 


2. 마리아 숭배/흠숭


글 곳곳에서 마리아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 면에서 주의 모친이 맞으나, 육신의 어머니일 뿐 부활 승천하사 이제는 하늘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어머니(神母)’일 수는 없다. 따라서 신모설은 성경에 밝지 못한 결과이며, 카톨릭교의 착각일 뿐이다. 


또 예수님의 출생은 마리아의 어떠한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이 되는 영예를 얻게 된 것뿐이다. 마리아 또한 죄 없는 인간이 아니라(롬 3:23),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했던 연약한 인간이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 신실한 성도의 한 명일 뿐이다. 마리아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눅1:45) 믿음의 여인이다. 


마리아가 무흠하여 예수님을 출산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마리아가 무흠하다면, 마리아를 낳은 부모 또한 무흠하여야 무흠한 자녀를 낳을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경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만 우리와 한결 같으시되, 죄가 없으신 분이라 표현하였다!! (히4:15) 만약, 예수님 외에 무흠한 자가 있었다면, 그/그녀도 주님처럼 그리스도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마리아는 결코 무흠한 존재일 수 없다. 


마리아는 종신처녀(eternal virgin)가 아니었다.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눅2:7)라고 하여 이후 그녀가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태 13:55)”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에게는 고향사람 누구나가 알고 있는 부모형제가 존재하였다는 의미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9)며, 야고보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임을 나타내고 있다. 헬라어로 주의 형제는 ‘톤 에델폰 투 퀴리우’라고 표현을 하는데 여기에서 퀴리우의 원형 ‘퀴리오스’가 주님을 뜻한다. 이처럼 성경기자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음을 자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 요셉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1:24~25) 여기서 동침을 표현하는 헬라어 ’기노스코‘가 본문에서 미완료 과거로 쓰였는데, 이는 요셉이 마리아를 알지 못하는(동침하지 않은) 상태가 마리아의 출산 때까지 계속되었음과 출산 후로는 정지되었음을 동시에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부부간의 연을 맺지 않게 하셨으면 모를까, 사람이 독처함이 좋지 않아 돕는 배필을 친히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유독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만 죽을 때까지 서로 분방하게 하셨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요셉과 마리아는 합법적인 부부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부 생활을 충분히 누리면서 자녀들을 계속 낳았다. 자녀들은 여호와의 기업/선물이고, 태의 열매는 그분의 상급이지 않은가(시 127:3)?


강조컨대 마리아의 아기 예수 잉태는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눅1:35) 된 일이지, 마리아와 성령의 어떠한 '교합'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성령님과 (영적이든 어쩌든) 결혼 한 것도 아니며, 결코 종신토록 처녀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카톨릭교에서는 이스라엘의 관습에 의해 예수의 사촌형제들을 표기했다고 말하기도 하나, 성경에서는 ‘모친과 이모’ ‘친족 엘리사벳’ ‘요한의 형제 야고보’ 등 그 가문을 분명히 하였는데, 유독 예수님만 그의 형제들을 사촌형제들과 병기할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마리아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먼저 마태복음 12: 46 ~ 50절을 보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본절부터 50절까지는 예수의 육신적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찾아왔으나, 예수께서는 이 기회에 하나님 나라의 가족 개념을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수의 가족은 예수께서 당시 큰 권력을 가졌던 종교지도자들과 계속 충돌하자,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나아왔을 것이다.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성경에는 “그”로 번영되어 정관사인지 소유격인지 구분되지 않은 단어 ‘아우투’는 3인칭 대명사 ‘아우토스’의 소유격 단수로서 ‘그의(his)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께서 모친 뿐 아니라 동생들도 있었음을 나타낸다. 병행구절인 막 3:32과 눅 8:19에서는 이 ’아우투‘를 ’예수의‘라는 단어로 번역하여 원어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 31 ~ 32)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눅 8:19) 


또한 원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예수에게 말을 걸기 위하여 굉장히 애를 썼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말하려고’로 번역된 ‘제툰테스’는 말을 하려고 몹시 애를 쓰면서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가 유대인 지도자격인 바리새인들과 대립하고 있는 것이 못내 불안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하고 있는 말을 중단시키고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막3:21로 보아,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주의 모친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여기고 따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미친) 아들을 찾아다닌 모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마리아가 죽은 후에 육신을 입고 그대로 승천했다는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 이가 사도 요한이다. 이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한 때가 AD90~ 96년경으로 추정되며,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한 후 97년 혹은 98년경 94세 즈음에 에베소에서 별세하였다고 한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라면 마리아는 이미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기 직전 마리아를 의탁 받은 요한은 초대교회에 놀라운 소식이 될 ‘마리아의 승천‘(?) 소식을 그의 서신들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카톨릭교에서는 안타깝게도 마리아를 주님 수준으로 높이고 있다. 

  - 431년,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신모)로 높이기 시작함(에베소 종교회의)

  - 600년, 마리아나 죽은 성자들에게 직접 기도 드림.

  - 1090년, '베드로'(Peter)라는 이름의 은둔수사에 의하여 성모에게 바치는 "장미 꽃다발"의 뜻인 "로사리오" 즉 묵주 기도가 고안됨 

   - 1854년, 교황 피우스('비오') 9세는 성모 마리아는 탄생 때부터 원죄도 없고 해산의 고통도 없었다는 '성모무염시태'를 교리로 선포함

   - 1931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신모)라는 교리 재확인 

   -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죽은 직후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는 성모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포함 (축일은 8월 15일)

   -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됨 



·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아침, 예수님은 베다니에 남아 나사로의 누이들과 모친 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시며 마지막으로 몇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나는 주님이 모친과 따로 대화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 또한, 배신자 유다의 음모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모친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기도했다. 


· 주님이 모친 마리아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리셨을 때, 자신도 주님과 함께 죽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간청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더욱 의연한 모습을 보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고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나타날 장소의 이름까지 분명히 밝히셨다... 그리고는 마리아에게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고 싶다고 하시며 시간을 알려 주셨다. 영적인 의미로 그 때에 마리아가 주님의 귀한 몸과 피를 받을 것라고 하셨다. 


 제자들도 유다가 할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모친 마리아에게는 귀띔을 해주시는 주님의 모습과 주님을 위해 기도해주는 마리아의 모습은 현세적인 모자의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받을 영적인 의미의 성찬의식은 이후 마리아가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구실이 된다. 


예수님의 고난은 결코 누가 대신할 수도, 나눌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성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만한 고초를 당하셨단 말인가?



· 그릇과 필요한 도구들이 준비되고 참석자들은 왕관을 씌운 어린양을 가져왔다. 이 왕관은 다른 경건한 여인들과 한 방에 동석하고 있던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양은 등에 나무판을 댄 채로 온몸이 동아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이 모습은 기둥에 묶여 채찍질 당하시던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다.


· 주님은 성반과 함께 내려놓았던 떡을 서너 조각을 뜯으시고, 첫 조각을 잡으신 후 성배 안에 넣으셨다. 그 순간 나는, 주님의 모친 마리아가 비록 만찬장에는 없었지만 영적으로 성찬의 떡을 받는 듯 했다... 예수님은 그날 아침 베다니에서 마리아에게 영적인 의미의 유월절을 함께 보내자고 말씀하셨고, 그녀의 영혼이 성찬을 받기 위하여 기도에 전념할 그때를 알려 주셨다. 


· 그들은 감사 찬양을 부르며 식탁을 한쪽으로 치우고 현관으로 갔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모친과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감람산에 오르지 마시라고 애원했다... 이때가 9시경이었다.


 마리아의 특별한 영권 강조 및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해 놓은 부분들이다. 다 성경에서는 언급 되지 않고 있으며, 성경은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실 때 제자들에 대하여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라고 쓰고 있다. 



· 나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실 때 마가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서 슬픔과 영혼의 번뇌로 싸여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는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으로 보고서 여러 번 기절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온몸이 피와 땀으로 젖어있음을 영적으로 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내적 움직임을 보았고 주님도 모친을 생각하시고 도움을 기다리듯이 그녀가 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셨다. 나는 주님이 모친과 나누는 영적인 교통을 서광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형태로 보았다.


· 주님은 모친이 예수님의 수난을 견뎌내는 고통을 보셨다. 모친 마리아의 영혼은 주님의 고통에 전적으로 결합되었고 예수님의 고통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두 친구의 팔에서 실신했다. 


· 마리아는 예수님과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함께 고통을 느끼며 살인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에 동참했다. 


· 마리아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겪으시는 모욕적인 수모를 다 보았기에 이 모든 것들을 가슴 속에 담아 두었다. 그녀도 주님처럼 묵묵히 고통을 받으며 여러 번 혼절했다. 


· 그러나 그녀는 구세주를 욕하고 그분을 잔인하게 처형할 십자가를 만들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 마리아는 아드님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베드로의 부인)에 대해 듣고 형용할 수없는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섬돌에 주저앉았다. 그 섬돌에는 그녀의 손과 발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섬돌은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 장소는 기억할 수가 없다. 


·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요한, 막달라 마리아는 가야바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집 모퉁이에 서서 주님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했다. 마리아의 영혼은 언제나 주님과 연합되었음에도 애타는 모정으로 주님께 다가가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 핍박과 수난 가운데서도 주님만이 홀로 평온하게 감내하는 모습이었다...주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리아는 피 끊는 심정으로 절규했다. “가엾도다! 이 사람이 내 아들인가? 아, 그러하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는구나. 오 예수, 나의 예수여!” 행렬이 거의 맞은편까지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극진한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모친 마리아를 바라보셨다.  주님의 이런 눈빛은 애끊는 모정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 잔인한 형 집행인들이 온갖 가혹 행위를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셨다. 주님은 침통하게 서 있던 모친을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 이 모습을 본 마리아는 억장이 무너졌다. 옆에서 부축하는 경건한 여인들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정신이 혼미해 쓰러졌을 것이다.


· 마리아는 채찍질이 끝나자 단숨에 다가와 찢기고 난도질당하신 채로 궁수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가시는 고귀한 아드님을 보았다. 주님은 피투성이가 된 눈을 닦으시고 모친을 바라보시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주님께 손을 뻗으며 그분의 피 묻은 발자국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마리아는 주님의 숨결이 남아 있는 장소를 두루 다니며 그곳을 자신의 눈물로 적셨다.


·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의 모친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고 눈은 눈물로 붉어졌다. 마리아는 푸르스름한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 주님은 어머니를 연민과 슬픔으로 바라보시고는 두 번째로 넘어지셨다...그녀는 주님을 모욕하며 학대하는 무리 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가 주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와락 껴안았다. 내가 들은 유일한 말은 “사랑하는 내 아들!”과 “어머니”뿐이었다.


· 그들은 이 집을 출발해 갈보리로 향했다. 이는 예수님이 지나신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례의 모든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 헤아리다가 내면적인 영감을 얻어 고난으로 거룩하게 된 장소들을 일행들에게 가리켰다. 시므온 노인이 예언했던 시퍼런 칼날이 마리아의 마음에 믿음의 흔적을 새겨 넣었는데 그것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에서 헌신으로 기념하고 있다. 마리아가 시므온의 예언을 일행에게 알려주었고 그 지체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주었다. 이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모친이 주는 귀한 선물로써 마리아의 마음에서 그 후손들의 마음으로 전달되는 전통이 되었다. 


 사도들과도 차별화된 마리아의 특별한 영권 강조, 주님이 가지신 모친 마리아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 강조, 전지적 시점에서 작성됨.



· 나는 예수님이 정말로 이 말씀(보라 네 어머니라)을 하셨는지 잘 모르지만, 마리아를 요한의 어머니로 삼으시고,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로 삼으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때로 사람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감지하기도 한다. 말은 오직 상황의 일부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명백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 대신에 여자여’라고 부신 것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주님이 성경에 예언된 독사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 여자가 마리아임을 설명하려 하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잠시 후, 여자의 아들이 돌아가심으로 성취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그녀를 요한에게 맡기신 것은 혈과 육으로나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당부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마리아는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인사할 때 망설임 없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뱃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아는 그녀가 곧 돌아가실 아드님에게서 다른 이의 영적 어머니가 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니 마리아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즉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귀감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마리아의 ‘무한한’ 권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고 있다.

독사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는 결코 마리아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여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창3:15)이라 말하고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죄와 죽음의 사슬을 이김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셨다.(히2:14~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2:14~15)


▶▶ 그런데도 ‘하나님’이 당신의 ‘뜻’으로 당부하셨다 하니, 마리아=신모(神母)의 권위 사상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 주님은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부르신 게 아니다. 그러려면 진작 그렇게 부르시고 최소한 12사도에 버금가는 사역을 하게 하셨을 것이다. 주님의 공적 생애 초기에 마리아는 자녀들과 함께 예수님을 미쳤다 여기고 찾아다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강림 사건 때 마리아 또한 힘써 기도하였던 사실을 보건대, 회심의 순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경건한 성도였을 뿐이다. 



· 3시경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셨다......존귀한 아드님의 목소리를 들은 마리아는 십자가 밑으로 한달음에 뛰어왔다. 요한과 글로바의 딸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가 뒤를 따라왔다. 


․주님의 때가 이르렀고 죽음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팔과 다리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요한은 십자가 밑에 서서 옷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십자가 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설움에 북받쳐 오른 막달라 마리아는 실신 상태로 땅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살로메와 글로바의 딸 마리아의 부축을 받고 예수님과 구원받은 강도 사이에 서 있었다. 마리아의 눈동자는 죽어가는 아드님의 모습에 그대로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요한이 일어났고, 경건한 여인들 중 몇 사람이 마리아에게 다가가 십자가 밑에 있는 그녀를 데려갔다.


▶ 예수님과 구원받은 강도 사이에 서 있는 마리아는 은연중 예수님과 사람사이에서 중보자처럼 느껴지게 한다. 역시 마리아를 높이려는 카톨릭적 수작일 뿐,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제51장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다)

·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넓게 펼쳐진 천 위에 앉아 오른쪽 무릎을 약간 세우고 쌓아놓은 겉옷 더미에 들을 기대었다. 이 가련한 어머니는 자신의 영혼이 깊은 설움과 비애감에 휩싸이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시신 처리를 마치는 성스런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귀한 머리를 무릎에 누이시고 시신은 천 위에 눕혔다. 마리아는 슬픔과 사랑에 압도되었다. 그녀는 수난의 길에서 어떤 사랑의 마음도 표현할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랑하는 아드님의 시신을 부둥켜안았다. 그녀는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피 묻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의 발에 얼굴에 댔다.


· 마리아의 용기와 의연함은 말할 수 없는 고뇌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나타났다. 수난 당한 상태로 아드님의 시신을 그냥 두는 것은 마리아에게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그래서 드러난 고문의 흔적들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일일이 닦아 내며 씻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가시 면류관을 머리 뒤에서부터 들어내고 예수님 머리에 박힌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냈다.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가시 면류관을 못 옆에 놓으면서 피부에 남아있는 가시들도 둥근 집게로 차례로 뽑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마리아의 얼굴은 슬펐다. 이 가시들은 가시면류관과 함께 놓였으나, 일부는 따로 보존되었다. 


... 그녀는 주님의 머리털을 세 갈래로 나누어 양쪽을 관자놀이 위로 늘어뜨리고 나머지는 머리 뒤편으로 늘어뜨렸다. 엉킨 앞머리는 부드럽게 펴서 귀 뒤로 넘겼다. 주님의 머리가 깨끗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뺨에 입을 맞추고 베일로 덮어드렸다...... 마리아는 씻은 몸을 베일로 덮었고, 상처마다 향유를 발라갔다. 경건한 여인들이 그녀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향유가 들어 있는 함을 들었고 마리아는 향유를 상처에 발랐다...... 예수님의 시신을 닦았던 물은 버리지 않고 해융을 끼워 넣은 가죽부대에 담아 놓았다. 


......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향유 처리가 끝난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가게 해달라고 요한이 마리아에 간청하는 동안,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식일이 곧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시신을 한번 더 끌어안고 애끓는 작별의 인사를 한 뒤 남자들이 시신을 운구 해 나갔다. 할 일을 마치느라 사랑과 인내로 억눌렀던 터질 듯한 슬픔으로 마리아는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본 장면에서 모든 행위의 주체는 ‘마리아’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마 27:57~61이나 마 15:42~47, 눅 23:50~56에서 요셉 혼자서 예수의 장례를 치룬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만 니고데모가 예수의 장례를 치르는 일에 동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장례의 주체가 마리아가 아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인 것이다. 


한편,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요셉과 니고데모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나,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등 예수를 따르던 몇몇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금요일 오후였으므로 장례의 모든 절차들이 안식일이 시작되는 해가 지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정성스러운 동시에 바쁘게 치러졌을 것이다(마27:59~61). 부활절 아침 여인들이 다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서 예수의 무덤을 찾은 것은(눅 23:56) 이때 시간이 급하여 시체를 향유로 충분히 씻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 유품 숭배 사상도 보인다.


(제60장 부활전야)

· 마리아의 기도는 끝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고,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주님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 홀연히 한 천사가 그 곁에 서서, 주님이 가까이 계시니 일어나 니고데모의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 때가 밤9시경이었고, 마리아는 입구에 도달해서 인적이 아주 드문 곳에 갑자기 멈춰 서서 벅찬 감격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성벽 꼭대기에서 주님의 영혼이 상처의 흔적이 전혀 없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주님은 마리아를 향해 내려오셔서, 따르는 자들에게 모친을 소개하시며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보라, 나의 모친이니라” 주님은 마리아에게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시는 것 같았고 이내 사라지셨다.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주님이 서 계셨던 땅에 입 맞추었다. 그녀의 무릎과 손자국이 그 돌바닥에 남았다. 이 광경은 마리아에게 말로 형용 못할 기쁨을 주었다......마리아는 본 것을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힘과 의지가 회복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활기를 되찾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해 주면서 그들이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다. 



(제62장 부활의 밤)

·․갈보리 산에 다다랐을 때 마리아가 별안간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몸과 영혼이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천사가 앞에서 걸었고, 무덤에서 본 두 천사는 주님의 좌우에 있었다......주님은 마리아에게 저 세상에서 하셨던 일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나시리라고 확신시켜 주셨다. 그러면서 직접 모친 앞에 나타나실 것이니 그때까지 갈보리산 바위 근처, 즉 주님이 넘어지시는 것을 직접 보았던 장소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구세주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자 마리아는 베일을 다시 두른 다음, 주님이 나타나셨던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제62장 부활)

· 천사가 무덤에 들어가고 지진이 나던 바로 그 시각, 나는 우리 주님이 갈보리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을 보았다......주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은 손가락 하나가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못 자국에서 빛줄기가 나와 그분의 손가락 쪽으로 발사되었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영혼이 마리아에게 인사를 했고, 주님은 모친께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으나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상처를 보여주셨고, 그녀는 주님의 성스러운 발에 입에 맞추었다. 그러나 주님은 모친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더니 이내 사라지셨다. 



 성경보다도, 사도들보다도 더 빨리 예수님의 영체와 부활체를 만나고, 조상들에게 후손인 마리아를 예수님이 친히 모친이라 소개받고, 후에는 그들에게 인사를 받는 마리아의 놀라운 위치(?).. 


▶▶ 본 환상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시며, 본인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니 그녀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신다.(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개정 요 20:17)


3. 카톨릭 전승, 예전 강조


(묵상 9. 봉헌에 대한 개별적인 가르침 중) 

· 주님은 성직자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도유식(기름부음), 성유(Holy Oils)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주님은 세 개의 상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혼합물을 조제하는 법과 어떤 경우에 그 기름을 바르는지 가르쳐 주셨다. 주님은 성찬이 시행될 수 없는 경우도 말씀하셨다. 아마도 주님의 말씀은 병자성사 [병자성사(病者聖事):  교회가 고통당하시고 영광받으신 주님께 죽음의 위험에 처한 환자를 맡겨 드려, 주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도록 하는 성사. 사제가 전례서에 규정된 기도문을 봉송하면서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절로 집전한다./ 출처:http://www.catholic.or.kr/ ] 를 지적하시는 것 같았다. 


· 주님은 다음 순서로 놋그릇의 불을 축복하려고 나아가셨다. 그것은 밖으로 갖고 나갈 수 없었다. 성찬을 두었던 자리와 가까운 전통적인 유월절 화덕 칸 안에 보관했다. 예수님은 이 의식의 모든 절차를 은밀히 하셨고, 가르침 역시 그랬다. 교회는 이 비밀스런 가르침의 모든 근본을 유지하면서 성령의 감동 하에 자체의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발전시키고 적응해 왔다.


 출애굽기 30장을 보면 제사장만이 관리할 수 있는 관유(anointing oil)가 있다. 관유는 감람유에 몰약, 육계, 창포, 계피 등 향품을 섞어 만든 기름(출 30:23-25)으로 머리에 뿌리거나 부어서 발랐다(출 30:30; 레 8:30). 관유는 성막이나 증거궤, 성막의 기구 등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서 지극히 거룩한 물건이나 사람들로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30:26-29). 관유는 아무나 함부로 만들거나 바를 수 없었으며, 제사장이 관리했다(민 4:16). 


예수님은 율법의 그림자적 의미를 폐하거나 완성하러 오셨지, 새롭게 제정하신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기존의 율법을 더욱 깊고 정밀하게 보셨으며, 제정하신 법의 본래의 의미들을 회복시키신 분이다. 새로운 성전을 지정하고 새로운 성유(聖油)를 만들고...따위는 모두 성경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며,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의 직분 및 사역에도 걸맞지 않는다.


▶▶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의당 에머릭 수녀의 카톨릭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벗어난 비밀스런 가르침을 결코 우리에게 남기신 적도, 당부하신 적도 없다. 오히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미리 알려주셨다.(요14:26)  

  


· 하나님이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가시자 아담이 외쳤다. “이는 내 뼈 중의 ...” 이것이 기록된바 결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내가 말하는 위대한 성례”이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는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잠드시고 옆구리가 열리셨다. 그로부터 교회는 두 번째 하와, 주님의 순결한 신부,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 또 성례를 주사 교회를 순수하고 거룩하게 하셨다...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고,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취하시고자 영원하신 아버지를 떠나 교회와 한 몸이 되셨다. 교회에서 귀하신 성찬을 베푸심으로 그분은 우리와 끊임없이 하나가 되셨다.


 성찬 때마다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아울러 교회 자체가 생명을 줄 수는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요14:6),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도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딤전 2:5). 이에서 벗어난 교회가 과연 참된 교회일까 ? 

 

· (제11장 '감람산의 예수님' 中) 예수님의 영혼은 사도들과 제자와 친구들이 겪을 미래의 온갖 고통을 보셨다. 그 후 주님은 ... 초대 교회를 보셨고... 이단이 생기는 것을 보셨고... 교회가 분열되어 흩어지며 교만과 불순종으로 아담의 죄를 반복하는 것을 보셨다... 악랄한 사제들의 신성모독과 이러한 죄들의 심각한 결과를 보셨다.


 예수님은 이미 선재하신 하나님(로고스)이시다. 어느 시점이 되어야 미래의 온갖 고통을 보실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이다. 


교회의 분열을 아담의 죄의 반복으로 연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카톨릭 측이 주장하기로는 자기네 교회가 “초대교회의 전통, 전승, 예식, 기도를 2000여 년간 이어오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우신 단 하나의 교회”라는데, 1517년 종교개혁을 통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배제하는 모양새이다. 



․나는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교의를 믿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궁권, 왕권, 보좌, 다시 말해 교회와 제단, 성궤, 성배, 성찬병과 장식품, 한 마디로 주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는 모든 것들을 잊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 카톨릭 전승 강조

카톨릭교에서는 A.D. 786년부터 속죄와 예배의 수단으로 십자가, 성상 및 유물 숭배를 하였다. 이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의 파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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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패션오브크라이스트는 거룩한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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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새성경 사전

옥스퍼드 원어성경 대전

호크마 주석사전

네이버 지식인

http://www.catholic.or.kr/

온라인 성경

루이스 벌콥.「벌콥 조직신학」.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5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저서) Loraine Boettner, Roman Catholicism,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9). 7-9-

유선호.「천주교도 기독교인가」. 하늘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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