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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3 (샬롬)

         에머릭의 생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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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번역서: '그리스도의 수난'

전민경 옮김/예찬사/2004


평자: 샬롬


4. 베드로 강조


베드로가 분명 주님의 수제자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카톨릭교에서 은근히 시사(示唆)하려는 듯 베드로가 독신이었는가? 오직 베드로만이 반석인가?


베드로는 독신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장모가 있었으며(마8:14), 따라서 당연히 아내도 있었을 터이다. 둘의 자녀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4~15)고 말하고 있다. 본인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실 정도로 가정이 예수님께 호의적이었고, 장모가 나은 후 예수님을 직접 섬길 정도이니, 믿음의 가정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가 나중 ‘이혼’ 했다고 누군가가 상상한 글을 보았는데, 우리 주님이 최초로 축복하신 가정을 함부로 갈리게 하는 소치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정한 연고가 아니면 아내를 버리지 말라 하였으니, 만약 베드로가 이혼하였다면 그의 아내가 부정하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카톨릭 독신주의를 옹호하기 위함인가? 답변이 궁금하다. 


성경은 오히려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가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을 권리라고 표현하였다. 즉, 가정을 꾸린 자들은 아내와 동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린도전서 9:5)


천주교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교황 힐데브란트 그레고리 7세가 명하였다(AD 1079년). 따라서 위 내용 역시 이러한 카톨릭교의 어젠다에 의하여 조작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땅의 제도교회인 카톨릭교의 계획에 의하여 하늘의 진리가 좌우될 리 없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규율을 정하신 바 없고, 사도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다수가 결혼한 사람이었고 바울은 감독들이 아내와 자녀들을 가질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딤전 3:2~5, 12; 마8:14~15)


·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되자 예수님이 씻겨주시는 것을 겸허하게 사양했다... “시몬 베드로야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 복을 네게 주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시니라. 너만이 그것을 확실하게 고백했구나, 그러므로 내가 네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나의 권세는 네 뒤를 이을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질 것이니라”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에게 베드로를 보이시며, 주님이 제자들과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때, 베드로가 주님의 빈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인정한, 멋지고 훌륭한 신앙 고백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고백이 과연 베드로를 카톨릭의 첫 '교황'으로 모실 근거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배경이 되는 마 16: 15 ~ 19절을 살펴보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5~19)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셨고, 베드로가 대표 격으로 대답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게 한 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먼저 밝히심으로써 이것이 굳건한 신앙고백임을 확인시키셨다.


둘째로, 그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뜻을 풀어서 반석이라 말씀하고 계신다. 문장을 직역해 보면 ‘바로 너는! 게바(=베드로)이다’이며, 이는 예수께서 시몬의 신앙 고백을 가상히 여기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수여하였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이미 이전에 예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그에게 주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막3:16, 요1:42).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막3:16)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1:42) 

시몬의 무엇을 보고 거기에 따라 예수님께서 보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가운데 이미 예수님께서 시몬을 그렇게 부르셨다는 말이다. 


▶▶ 천국열쇠를 주시사 묶고 푸는 권세는 베드로에게만 주신 권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화답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나, 이 권세는 아울러 믿는 성도 모두에게 허락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18:18~19를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묶고 푸는 권세, 그리고 합심기도의 권세는 복수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 주님의 빈 자리는 베드로가 아닌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위로와 친교의 사역을 통해 채워 가신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은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에 대한 유익으로 성령님이 오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제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주님의 빈 자리를 결코!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베드로는 ‘초대교황’이었을 수가 없고 그랬을 리가 만무하다. 초대교회의 주석은 베드로보다는 오히려 주의 형제 야고보(행12:17, 15:13, 21:18, 갈 1:19, 2:9, 12)이다.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으로 유대인의 비난을 받자(행11:1~2),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지위에 나갔다.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갈릴리 교회의 지도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죽인 일로(A.D. 40년), 유대교 측의 호평을 얻은 것에 맛을 들여 자신이 유대를 다스리게 되자(A.D. 41년) 곧 베드로까지도 잡았는데,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을 떠난다(행 12: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12:17)


이 일 이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고, 예루살렘 회의 때에도 그는 교회의 ‘기둥 같이 여기는’ 사람들 중에 들고 있다. 그는 회의에서도 바리새파 출신의 신자를 대표하면서 회의를 인도 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행15:5, 13) 그는 사도교령(행 15:19 ~ 29)의 기초자로서 또한 발신자였을 것으로 보이며, 바울이 최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자 수만 명이라고 했는데(행 21:20) 이때 야고보는 이 사람들의 지도자로 되어 있었다.

 

또한 (카톨릭이 첫 '교황'으로 모신) 바로 그 사도 베드로는 모든 성도(!!)가 왕적인 사제=제사장들(loyal priests)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벧전 2:9) ‘교황’이라는 명칭이나 ‘만인의 감독’이라는 명칭은 A.D 810년 악독한 황제 포우커스가 로마 감독에게 처음으로 준 명칭이라는 설이 있다. 그 역사성 여부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 나는 예수님이 손에 직접 물을 부어주시고, 또 성배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기름부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주님은 그들의 어깨와 머리에 손을 얹으셨다... 주님은 그들의 엄지와 검지에 기름을 부으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가로로 성유를 찍으셨다. 


· 작은 야고보, 안드레, 큰 야고보, 바돌로매도 기름부음을 받았다. 주님은 영대 같은 것으로 베드로의 흉부에 성호를 만드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엇갈리게 놓으셨다. 


· 베드로와 요한이 둘 다 봉헌된 주교 [주교(bishop)  : 하느님의 제정하심에 따라 성령을 받아 사도들의 지위를 계승하는 주교 즉 감목(監牧)은 교회 안에서 세워진 목자들로서 교리의 스승들이요 거룩한 예배의 사제들이며 통치의 봉사자들이다(교회법 375조 ①). 출처:http://www.catholic.or.kr/] 


였는지, 혹은 베드로 혼자만 주교이고 요한은 사제 [ 사제(priest) :    신품성사(神品聖事)와 주교로부터의 파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성제(聖祭)를 봉헌하며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출처:http://www.catholic.or.kr/ ]였는지, 혹은 다른 네 명의 사도가 어떤 존엄한 지위에 올랐는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 사도들의 영대를 배열한 다른 방법은 봉헌의 다른 직무를 지적하셨다고 생각한다.


·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따로 불러 다른 사도들에게는 나중에 알려질 일들을 말씀하셨고 요한에게는 그가 사도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에게 일곱 교회와 왕관들, 천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어떤 신비한 형상의 의미와 상징을 가르치셨다. 


 카톨릭교에서 가르치고 실행한 것들 중 가장 오랜 것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성호’(가슴 앞에 십자가 그리기)이다. 이 두 가지는 A.D. 300년에 시작되었다. 카톨릭의 신비주의 사상들도 엿보인다. 천사숭배, 형상과 상징들... 


▶▶ 요한이 사도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 것이라 말씀하신 부분은 첫 성찬식 중 은밀하게 알려진 말씀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요21:19)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21:21~23) 



· 베드로가 자신은 언제까지나 충직할 거라고 항변할 때, 주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성경 본문을 교묘하게 비틀어 놓았다. 이 표현에 따르면, 사도들을 위하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 내용이다. 성경은 사단이 너희(복수)를 청구하였으나, 너희(복수)를 위하여 베드로의 믿음(단수)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함이 아님을 명확히 나타낸다. 아래 성경 본문들을 살펴보자.(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개역개정)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 (공동번역)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헬라어를 살펴보면, 31절에서 나온 인칭대명사 ‘너희‘가 32절에서는 ’너‘로 바뀐다. 즉 31절에서는 제자들 전체를 지칭하는 2인칭 복수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였으나 32절에서는 베드로를 지칭하는 2인칭 단수 대명사가 사용된다. 이는 31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제자들을 향한 것이나 좁게는 바로 다음 날 자신을 배반할 베드로를 향한 것임을 보여 준다.



· 유다는 제사장들이 은연중에 자기를 경멸하고 불신하고 있음을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눈치 챘다. 따라서 나름대로 자존심을 세우고 자신이 의로우며 공명정대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그 돈을 성전의 헌금으로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피 값을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며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줌은 자기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고, 자기가 판 예수께서 잡히시어 단죄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말의 가책이 느껴져 도로 갖다 준 것이다(마 27:3). 



5. 비성경적 내용들 : 환상들, 다수의 인물들, 연옥


· 예수님은 .... 시온산 오르막길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이 남자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지난 번 베다니의 유월절 만찬 때에서 예수님이 드신 음식을 장만했다. ... 이 사람의 이름은 헬리이며... 금년에도 헬리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인 만찬장을 빌렸다. 그는 두 사도들에게 방의 위치와 정돈된 내부를 보여주었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찬장에서 유월절 양고기로 식사를 하셨다. 그들은 세 군데로 나눠 앉았다. 예수님은 만찬장 내실에서 열두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양고기를 잡수셨고, 나다나엘과 다른 제자들은 옆 방에 있었고, 글로바와 헬리의 딸 마리아의 아들이며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엘리아김과 또 다른 열 두명은 다른 방에 있었다.


 성경은 만찬장인 다락방의 주인을 익명으로 해 놓았다. 이름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 주님의 명령은 명료했다. 그 사람의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에머릭의 이 책에서는 헬리라는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만찬장을 빌렸으며, 이 만찬은 세 부류의 제자들도 옆방에서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마26: 18)


· (제11장 '감람산의 예수님' 중) 주님의 애통함과 고뇌는 갈수록 더해졌고 기도하러 동굴에 들어가셨을 때는 위험한 폭풍을 피해 급히 쉼터를 찾는 지친 여행자처럼 온몸을 떨고 계셨다... 감람산 위에 있는 이 동굴은 낙원에서 쫒겨나 지상을 떠돌던 아담과 하와가 들어와 울며 신세를 한탄했던 곳이다.


 성경 내용도 역사적 사실도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환상



· 사탄은 예수님을 흔들어 놓을 속셈으로... 죽음 직전 그들을 시험하듯이 많은 생각들을 주님에게 꺼내 놓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이때는 숨겨진 것이라 주님은 보통사람으로서 시험을 당하셨다. 우리 주님은 신성을 잠시 내려놓고 인성이 앞서도록 하시어, 죽음 직전의 성도들이 의심하지 않고 정당하게 믿음의 공로를 얻도록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영적으로 숨겨진 없다. 복음서에서는 귀신들이 이미 예수님을 알아보고 떨며 나가는 모습들이 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8:28~29)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1:24~26)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눅 8:27~28)


▶▶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지 일시적으로 하나님이고 일시적으로 사람으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다.

교리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이후 고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정의하여 위하여 수많은 논쟁을 벌였으나 칼케돈 회의(A.D. 45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선언함으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회의에서는 두 본성은 혼합 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에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으며 신성과 인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성도들의 믿음의 공로를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요1 4:19) 그 아들을 보내심이요,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아들 예수를 내어주심(롬 4:25)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히2:14~5)이며,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은 율법의 행위(공로)가 아닌 믿음이다.(갈 3:5) 



· (겟세마네 기도 후) 주님은 서글픈 어조로 다음 날 주님이 죽으실 것, 한 시간 후에 사로잡혀 재판정에 서시고 학대와 모욕을 당하시며, 매 맞고 결국에는 잔혹하게 처형당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세 사도 =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모친과 막달라 마리아를 위로해 주라고 당부하셨다. ... 주님은 다시 (기도) 동굴로 돌아가시려고 했지만 걸을 기력이 없으셨다. 나는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을 부축해서 동굴로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가 11시 15분경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신앙고백을 한 이후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마16:21).


예수님은 결코 고난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죄로 인해 들어오게 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야말로 승리의 사건이다. 주님은 오히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요, 이는 보혜사가 오시기 때문이라 밝히셨다(요16:7).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친을 의탁함은 십자가 아래에서, 요한에게 였다. 


· 주님은 저 세상의 일부를 보셨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 족장들과 선지자들, 의인들, 모친의 부모들, 세례 요한이 저 세상에서 그분의 도착을 몹시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이 모습은 주님의 판단을 도와 사랑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주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고, 간절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옥에서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 예수님께서는 한 차례 크게 울부짖으신 후 돌아가셨을 때, 나는 빛나는 유성 같은 주님의 성스러운 영혼이 가브리엘과 다른 천사들을 거느리고 십자가 밑의 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신성은 십자가에 달려 잇는 그분의 몸과 마찬가지로 영혼과도 연합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영혼이 들어간 곳은 세 군데로 구분되어 있는데 세 개의 세계처럼 보였다. 그 세계는 둥근 모양으로 각 세계는 다른 세계들과 반구체로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저 세상의 맞은편에서 밝고 아름다운 공간을 보았다...... 다음으로 나는 승리의 행진을 하시는 주님을 보았다. 주님은 진리의 희미한 빛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착한 이방인들로 가득 찬 곳으로 들어가셨다......착한 이방인들의 영혼이 주님의 발밑에 엎드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분을 경배했다.......마침내 나는 무저갱의 중앙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보았다.


 은근슬쩍 연옥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연옥의 교리는 A.D.593년 그레고리 교황에 의하여 처음으로 설정되었다.


카톨릭교에서 연옥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地獄, infernum)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말한다.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 지은 자 또는 소죄(小罪)를 지은 의인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일시적인 정화’(satispassio)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가 ‘연옥’이다.


카톨릭교에서는, 개인이 자기 힘으로는 연옥에서 탈출할 수도, 또 괴로움을 완화시킬 수도 없으나, 지상에 있는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에 의지하여서만 가능하며,  ‘불쌍한 영혼’(poor souls) 들을 위한 지상의 기도를 ‘연도기도’ 또는 ‘위령(慰靈)의 기도’라고 한다. 


연옥이 있다면 참 편리할 것이다. 내가 비록 천국에 가지는 못한 어중간한 지점에 있되, 언젠가는 후손의 선업으로 인하여 천국으로 이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러나 , 성경은 연옥의 존재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중간의 체류지가 아닌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심판이 있다(히 9:27)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음부(陰府)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과 지옥은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며,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서는 이미 죽은 자가 되살아나 전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전도자(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저기로 결코(!) 이주 할 수 없는 곳이 천국과 지옥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16:26~29) 


사람은 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3:23) 믿지 않는 자의 상태이다. 죄를 해결할 만한 어떠한 선함과 제도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겠는가?


강조컨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롬5:1). 편리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는 그런 복음은 없다.



· 십자가는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기 위해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준비되었는데 죄패를 제외하고 모두 다섯 토막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십자가는 지금처럼 열십자 형(+)이기보다 머리가 짧고 꼬리가 긴 헬라어 알파벳 ‘타우’ 내지 T자형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느냐? 유다는 무얼 하려고 왔는지 더듬더듬 웅얼거렸다. 예수님은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구나“라는 이 말씀은 잡히시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성만찬 당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라는 말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인간에게 사용되던 속담적 표현이다(욥 3:2, 10, 11) 예수께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가룟 유다의 비극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원어에서는 ‘좋을 뻔’으로 번역된 ‘칼논’이 문장의 서두에 나와, 현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26:24)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궁수 네 명과 바리새인 여섯 명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꾸러지지 않았다. 유다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힘에 전적으로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반면 넘어졌다 일어난 이들은 나중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말고는 치료를 받고 즉시 회심했고, 마리아와 예수님의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주려고 동분서주했다.


․요한만이 홀로...뒤를 밟았다. 그들은 요한을 포박하려 했으나, 요한이 몸부림쳐서 겉옷이 벗겨지는 바람에 놓쳤다. 겉옷을 벗고 미끄러져 나온 요한은 ..쉽게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오벨은 세례 요한이 처형당한 직후, 주님이 베다니에서 헤브론으로 여행하시는 길에 쉬셨던 곳이다... 오벨 주민의 대부분은 주님이 돌아가신 뒤에 회심하여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었다


· 예수님의 속박을 느슨하게 풀게 한 사람과 물을 떠다 드린 이의 마음에는 은혜가 드리웠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직전에 회심하여 제자들의 대열에 들어갔다. 


· (가야바의 심문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감동을 받아 더 이상 양심의 소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열 명의 군인들은 아프다는 핑계로 법정을 빠져나갔다...그 군인들은 즉시 그곳을 나와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 남쪽, 시온산 반대편에 있는 동굴로 안내했다. 동굴에 숨어있던 사도들은 낮선 사람이 은신처로 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기겁을 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그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며,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

▶▶ 누가복음 14장 50절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청년은 12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이 청년이 겟세마네 동산의 체포현장에서부터 예수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며, 이 청년은 사도 요한이 아닌 마가 요한 자신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여기서 ‘베 홑이불’은 본래 세마포를 가리키는 데 팔레스타인에서는 매우 귀한 것이어서, 대개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시신을 염하는 등의 매우 중요한 때에 사용하는 정도였다.(눅 15:46) 

반면 부자들은 이것으로 잠옷이나 시원한 겉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으니 이런 점에서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이야기(막14:51 ~52)의 주인공은 마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를 누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행전 12:12)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근접해갔다. 

 

· 빌라도의 궁전 뒤쪽에는 테라스와 정원이 많았다. 그리고 한 채의 저택이 있었다. 정원은 총독의 궁전과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클레스의 처소 중간에 있었다. 


· 클라우디아는 ... 빌라도와 오랫동안 대화하며 빌라도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선지자이며 성인 중의 성인인 예수님께 해를 입히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간 밤에 보았던 주님과 관련된 꿈과 환상을 이야기했다... 클라우디아는 주님의 극심한 고난과 인내, 무한한 사랑과 그 모친 마리아의 고뇌와 체념도 보았다. 


․예수님이 채찍을 맞고 기둥 밑에 쓰러져 계실 때, 나는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클레스가 넉넉한 아마포 몇 단을 갖다 주는 모습을 보았다. 


· 빌라도가 불법적인 판결을 선언하는 동안,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는 남편에게서 받은 증표를 돌려보내고 총독 궁전을 빠져 나와 주님의 친구들을 찾아갔다. 그리스도인들은 클라우디아를 예루살렘에 있는 나사로의 집 지하실에 숨겨주었다. 


같은 날 이 사건 이후에 나는 주님의 한 친구가 가바사라고 부르던 테라스의 위에 있던 초록빛 돌에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말과 클라우디아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보았다. 이 돌은 아직도 어느 교회의 토대 위나 예전에 가바사라고 불리던 곳과 동일한 지점에 서 있는 예루살렘의 어느 가옥에서 찾을 수 있다.


클라우디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사도 바울을 따랐으며 그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 나는 부활 후 목요일에 빌라도를 보았다. 빌라도는 사라진 아내를 찾느라 도성 안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클라우디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숨어 있었다. 아무도 그곳을 찾아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집에는 다른 여자들의 그림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그녀를 위해 음식을 날라다 주었고, 예루살렘 성안의 모든 소식을 알려주었다. 스데반은 사도 바울의 큰 사촌이었고 두 사람의 부친들은 친형제였다.


 철저하게 전설, 신화에 근거한 내용으로 빌라도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빌라도의 최후에 대한 많은 전설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클라(Claudia Procla)는 ‘문(門)의 개종인’(Proselyte of the Gate)인데,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다고 한다. 희랍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성렬(10월 27일)에 올려놓았다. 


▶▶ 본 환상에서 스데반을 사도 바울의 큰 사촌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데반의 이름의 뜻은 ‘면류관’이며,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이다. 예루살렘교회가 교회 내 구호사역을 감독하려고 사도들의 제안으로 뽑은 7 집사들 중의 한 명이다(행6:5). 스데반은 아마 헬라어를 말하는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 ‘스데반’이 헬라 이름이라는 것과 그에 대한 박해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그 근거이다.

그의 활동은 먼저 예루살렘에 회당을 가지고 있던 이방에서 예루살렘에 와서 거주하는 유대인(헬라파 유대인)들이 교회에 대립했을 때 시작되었다. 논쟁은 특히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사람들과 구레네인․알렉산드리아인들이 가담한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하여 야기되었다(행6:9).


반면 바울 곧 옛 사울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다. 또한 사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스데반의 살해에 결정적으로 앞장선 인물인데(행전 8:1) 만약, 큰 사촌을 죽음에 내모는 데 서슴지 않았던 사울이었다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라는 고백과의 엄청난 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혹독한 채찍질은 45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때 웬 낮선 사람이 단검을 들고 군중 속으로 들어와 순식간에 기둥까지 접근했다. 그는 천민 출신으로 크데시본의 친척이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셨던 소경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묶은 기둥의 밧줄을 번개같이 끊어 놓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사이, 술 취한 악당들은 놀라움에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 갈보리를 포위하고 있던 백여 명의 로마 군병들은 행군하며 물러갔고, 그 자리를 다른 오십 명이 교대했다. 그들의 지휘관은 아랍 태생의 아베나달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세례를 받고 크데시본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지휘관인 카시우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롱기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 아베나달은 그 순간(예수님의 운명 순간)에 새 사람이 되었다. 백부장은 자신의 군마와 창을 부관인 롱기누스에게 주었고, 롱기누스는 부하들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백부장의 말을 타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아베나달은 갈보리를 떠난 뒤, 기혼 계곡을 지나서 제자들이 숨어있던 힌놈의 동굴을 찾아가 주님의 부고를 전하고, 빌라도를 알현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다. 아베나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자 많은 수의 군인들과 구경꾼들도 이를 따랐다. 물론 바리새인들 가운데서도 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이 생겼다. 


․빌라도는 갈보리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명령이 시행되었는지 알아보게 했다. 빌라도가 보낸 사람이 아베나달인 것 같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일을 돕는 아베나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소개되지 않은 다양한 인물들. 

▶▶ 백부장이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이 아니다. 모인 무리들 또한 백부장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운명당시 된 일들을 보았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눅423:47~48). 마태복음을 보면 백부장이 분명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마14:33의 제자들의 고백과 일치한다. 그러나 당시 백부장이 진정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로마 세계에서는 황제나 사제 혹은 뛰어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림 강림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질때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회심하였다 하였으나(행 6:7), 바리새인들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성경에서 찾기가 어렵다. 물론, 기록되지 아니한 허다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분명 있을 수 있으나 본 환상에서처럼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부분은 보기가 어렵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눅 23:47~48)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 나중에 구원 받은 강도는 별 말이 없었지만, 다른 강도는 거칠고 고약해서 저주와 욕설을 그칠 줄 몰랐다. 


· 왼편에 자리 잡은 강도는 다른 강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자신의 젊은 공범을 타락시켰던 전형적인 악인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디스마스와 게스마스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나는 그들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 구원받은 강도는 디스마스로, 악한 강도는 게스마스로 부를 것이다.


두 사람은 이집트 국경지대에 출몰하던 도적 떼와 한 패거리였다. 이 약탈자들의 본거지였던 동굴은 유대인 남자 아기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벌어졌을 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탈출해 숨어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문둥병에 걸린 한 불쌍한 아이가 아기 예수님이 목욕하셨던 물에 몸을 담근 후 순식간에 고침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바로 이 아이가 디스마스였다... 이때 있었던 외적인 정화는 후에 디스마스의 영혼이 정화되는 갈보리산 위의 사건,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받은 구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 강도 다 예수님을 욕했다(마 27:44, 막15: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 15:32) 


어느 한 시점에서 한 강도에게-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아니다. 성경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듯하며,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인간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영접한 듯하다. 주님의 말씀이 그것을 입증한다(43절). 아무 힘없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예수를 보며 하나님의 의(41절)와 나라(42절)를 기억해 내는 그에게 예수님은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죽음을 앞둔 처참한 몰골의 예수님께 과감히 자신을 의탁한 이 강도의 고백을 어찌 가볍다 여길 수 있겠는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39~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 예수님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넘어지셨다. 네 번째 쓰러지신 것이다. 그래서 시몬은 안간힘을 쓰며 십자가를 들어 올렸다. 그 때 예수님은 분명하지만 아주 슬픈 목소리로 외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욕하고 때리며 주님을 일으켜 진흙탕 밖으로 끌어냈다. 


▶ 위 부분 중 성구는 에머릭이 인용해 놓은 주변상황과는 달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마태복음 27장, 마가복음 15장, 누가복음 23장 등이 예수님의 수난 길을 그리고 있으며, 위 인용 성구는 마태복음 23:37과 누가복음 13:34에 기록된 말씀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24장)을 내다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임할 환난을 애통해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본 표현은 성경의 배열을 교묘히 비틀어서 짜깁기해 놓은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끌고 정확히 십자가형이 집행될 그 지점에서 넘어지셨을 때는 11시 45분경이었다. 


· 1시 30분쯤에 나는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의 일을 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리는 어둡고 음산했다.


 매우 정교한 환상(?)들..그러나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 형 집행인들은 주님의 옷과 밧줄이 매어 있던 띠와 그분의 옷에 딸린 허리띠를 벗겼다. 마리아가 직접 예수님의 양모 겉옷을 벗겨내려 했으나 가시관 때문에 벗겨낼 수 없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장면과 묘사들.



· 주님의 자비로운 십자가는 이 땅에 세워지게 되었고, 이 십자가는 아득한 옛날, 낙원에 있었던 생명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상처는 동산에서 발원하는 네 강줄기로 흘러가 온 세상을 죄악의 저주에서 정화하고 비옥하게 하며,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는 성스러운 샘이었다. 십자가가 세워진 높이는 주변의 땅보다 약 2피트 정도 높았다. 주님의 발은 주님의 친구들이 입맞춤할 수 있을 정도로 땅에서 가까웠다. 주님의 얼굴은 북서쪽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성경은 주님의 상처‘만’ 말하고 있지 않다. 그의 찔림, 상함, 징계 받으심, 채찍에 맞으심이 모두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주님이 받으신 징계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모든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상처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몸소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서 대가로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 유품 숭배 사상도 엿보인다.


· 십자가 주변은 적막이 감돌았다. 제자들, 추종자들, 친구들 그리고 모친마저도 뒤로 물러나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다. 주님이 아낌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수천 명의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 곁에서 그분의 극심한 고통을 최소한이라도 덜어드리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님의 영혼에 말 못할 슬픔과 비애가 가득했다. 주님의 마음은 어둡고 음울하고 비참했다. 주위에 깔린 암흑은 오직 주님의 내면에 일렁이는 슬픔의 상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고개를 돌리시고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구속을 위한 고난의 잔을 올려드렸다. 모든 수난의 과정에서 행하셨던 기도를 지속하시며, 당신 안에서 완성을 보게 될 시편의 예언 일부를 암송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결코(!) 억지로 지시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어찌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주님 마음이 ‘음울’했겠는가? 다만 아버지께 버림받은 심경은 슬프셨을 것이다. 


▶▶ 주위의 암흑은 오히려 예수님의 심정이 아닌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하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닐까?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눅 23:44)


▶▶▶ 예수님은 시편만이 아니라 온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 즉, 율법의 모든 요구를 몸소 다 들어줌으로써 완전케 하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 (제 9시 즈음) 햇빛이 환하게 비추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기력이 쇠해지고 얼굴은 납빛으로 변했다. 주님의 몸은 계속되는 출혈로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예수님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혀가 말라붙은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십자가 곁에 둘러서서 주님을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다. “나에게 물을 조금 줄 수 있겠느냐?” 주님이 하신 말씀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막을 사람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요한은 후회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오 주여, 저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나이다.” 예수님은 몇 말씀을 더하셨는데 주로 이런 뜻이었다. “나의 친구들과 이웃들도 역시 나를 잊고 마실 것을 주지 않으니,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로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주님을 더욱 아프시게 했다.


제자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주님께 약간의 물을 갖다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게세 내밀었다. 동정심이 생긴 백부장 아베나달이 그들에게서 해융을 빼앗아서 적셔진 쓸개즙을 짜낸 다음, 포도주에 담가서 갈대에 해융을 꿰어 예수님이 목을 축이실 수 있게 해드렸다. 


주님은 몇 마디 말씀을 더 하셨는데 기억나는 것은 이 말 뿐이다. “내 목소리가 잠잠해질 때 죽은 자들의 입이 열리리라” 


 “내가 목마르다”는 십자가상의 제 5언이다. 이 또한 예수님께서 구약 예언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에머릭의 본 장면에서는 가상 칠언을 능가하는 많은 말들이 폭포수처럼(?) 나열되어 있다. 물론, 죄다 성경에 없는 부분들이다. 풍부한 상상물의 소산일 뿐.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 저자는 제 구시 즈음 이미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자세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제자들은 어둠이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할 수 있다고 표현해 놓았다. 정황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 성경과도 불일치한다. 


▶▶▶ 신 포도주를 제공한 사람의 이름을 성경은 대지 않고 익명으로 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운명 후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의인”이라고 고백/표현한 사람이다. 성경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 27:48)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 부지휘관인 카시우스는 양손으로 창을 잡고 예수님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다......얼굴과 몸에 피와 물이 뿌려졌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과 같은 효과가 났다. 피와 물을 맞자 은혜와 구원이 카시우스의 영혼에 찾아왔다. 그는 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때리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며 자신의 신앙을 큰소리로 고백했다. 


 세례는 중생의 표요 인이며, 중생 또는 사죄 능력이 전혀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무엇을 믿느냐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이다.(롬10:9) 

세례란 위와 같은 고백을 바탕으로 믿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지, 속칭 ‘물 뿌림 효과’에 의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갈보리산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하늘이 구름이 많았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십자가 앞에는 경건한 여인들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다는 것과 주님의 다리가 왜 꺾이지 않았는지, 마리아와 요한에게 설명했다. 마리아와 요한도 니고데모에게 카시우스가 찌른 창으로 생긴 옆구리의 상처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마음속 깊이영적인 기억을 간직한 그들은 백부장 아베나달이 도착하자마자, 십자가에서 귀하고 귀한 주님을 몸을 내려 가슴 시리고 경건한 노동을 시작했다.


 온 땅에 임한 어둠은 유대 시간으로 제 육시부터 시작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미 예수님이 운명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어둠이,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두움이 계속되었는지 의문스럽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마 27:45)


▶▶ 주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요19:36)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은 요한복음이 유일하다. 요한복음 19장 35절은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본 자’에 대해서는 ‘본서의 저자’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와 별개의 증인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예수의 십자가 주변에 있던 인물로 남자는 ‘애제자’ 한 사람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6절)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애제자’ 곧 본 복음서의 기자인 요한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목격자로서 자신의 증언이 참됨을 스스로 직접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9:34~36)


   이것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이 증언은 참되며, 이 증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여러분도 믿게 하려고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다.(공동번역 요한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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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패션오브크라이스트는 거룩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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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새성경 사전

옥스퍼드 원어성경 대전

호크마 주석사전

네이버 지식인

http://www.catholic.or.kr/

온라인 성경

루이스 벌콥.「벌콥 조직신학」.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5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저서) Loraine Boettner, Roman Catholicism,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9). 7-9-

유선호.「천주교도 기독교인가」. 하늘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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