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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4 (샬롬)


     '성십자가 성당' 안에 재건된 에머릭의 병실. 원래의 가구들이 놓여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4 

평자: 샬롬


참고 번역서: '그리스도의 수난'

전민경 옮김/예찬사/2004



[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3 로 돌아가기] 




6. 신비주의 


이 책은 에머릭 수녀의 환상을 근간으로 했기에 태생적 근거가 “신비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성흔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자신도 함께 '동화'되어 "고통을 느꼈다"는 에머릭은 전형적인 카톨릭 신비환상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환상의 대부분이 성경이나 역사적 사실보다는 카톨릭의 전승, 예식과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을 볼 때, 이 책은 철저히 카톨릭적 배경 아래 작성되었음을 반증한다.



· 나는 만찬 시간 내내, 소름끼치는 작은 형상이 발등상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 유다의 심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요한이 예수님께 들은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요한의 얼굴을 보았다. 


· 나는 (성찬)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도들이 사제들처럼 서로에게 서너 번씩 절하는 것에 주목했다. 


· 1823년 2월18일 저녁 에머릭 수녀의 한 친구는 그녀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에머릭 수녀는 영원하신 아버지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주님 이후에 십자가를 지고 따랐던 모든 이들의 고난에 동화되었다. 그녀는 잠시 기도를 드리다가 에머릭 수녀의 손에 있는 성흔을 보았다. 


· 에머릭 수녀는 사순절 내내 사막에서 사탄과 싸우시던 주님을 찬송했는데, 그녀 또한 여러 고통과 시험을 견뎌야 해서 예수의 고난 이야기가 자주 끊어졌지만 계속 이어졌다. 


· 예수님이 거룩한 성찬예식을 기념하시고 열한 명의 사도들과 다락방을 떠나실 때, 그분의 영혼은 심히 눌리고 슬펐다.


· 주님은 사도들을 데리고 계곡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이곳은 어느 날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곳, 그러나 지금같이 가난하고 겸손하신 모습이 아니라 온 세상이 무서워 떨며... 외칠 만한 모습으로 오실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 가장 거룩하신 이가 이토록 무자비한 이들에게 당하신 모든 고초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광경이 내 마음에 깊이 사무쳐서 내 몸은 정말로 아프기 시작했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 에머릭 수녀는 지금까지(2월 18일부터 3월 8일까지) 전한 환상을 보는 동안... 고통스러워했다. 이 묵상에 깊이 몰두했을 때에 외부적으로는 죽은사람처럼 무감각한 상태였으며 자기 자신이 형 집행인의 손에 있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고 신음하고 사시나무 같이 떨면서 전율했다.


· 그녀(에머릭 수녀)는 큰 고통을 견뎌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질병이나 일시적인 불행을 수용하여 앓았기 때문에 계속 고열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수난의 장면들을 풀어놓기 전에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 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그날의 이야기를 중단해야 했다. 


· 에머릭 수녀의 일생은 영적인 생활과 지적인 생활에서 일 년 동안의 교회 절기의 변화에 따른 영적인 변화와 조화를 이루었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계절이나 일상생활과 이루는 조화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그녀가 교회의 절기와 이루는 연합은 너무 완전했다. 어떤 절기가 시작되면 그녀의 내면세계에 지적으로 또 영적으로 순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 종은 어쩌다 무지나 태만으로 잘못된 시각에 울리기도 하지만 그녀의 변화는 정확히 절기가 시작되는 때를 알려주었다.


· 우리는 에머릭 수녀가 환상을 볼 때 어린이의 모습을 자주 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 속 어떤 예언의 성취가 에머릭 수녀에게 보여지면, 그녀는 흔히 어린이가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어린아이는 위치와 옷차림, 손을 들고 있는 자세나 손 흔드는 방식 그리고 지팡이에 달린 선지서 두루마리 등을 이용해서 어느 특정 선지자의 개성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 에머릭 수녀가 수난에 대한 묵상을 다시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에머릭 수녀는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그녀 자신이 다름 기록에서 설명하는 모든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는 주님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똑똑하게 들었다. 


· (처형장 위에서 궁수들이 처형 준비를 하고 있는)이 장면에서 악마들이 보여서 나는 두려웠다. 악마들은 두꺼비, 독사,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용, 독이 있는 곤충들의 거대한 형체였다. 사악한 영들이 못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게 만들고 공중을 완전히 암흑 세계로 만들었다.  


·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나는 눈을 들어 나의 구원자이고 세상의 구원자인 예수님을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나 자신이 숨을 거둔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은 고뇌와 사람, 공포감으로 겹겹이 눌려 있었다. 머릿속은 반쯤 몽롱해지고 나의 손과 발은 열이 올라서 불덩이 같았다. 모든 혈관과 신경, 팔다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 


‣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신비주의적인 표현들이며, 에머릭 스스로는 예수님의 영혼까지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듯이 말한다. 카톨릭의 중요 절기에 대한 권위도 부여하고 있다.



· 이 광경을 본 나의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나 컸기에 주님에 내게 오셔서 그 손을 내 가슴에 인자하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것들을 본 이가 없었노라” 내가 네게 힘을 주지 않는다면 네 가슴이 슬픔으로 터지겠구나.


· 나는 유다의 입맞춤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까지 모든 장면을 보았다. 


· (제 18장 가야바 앞에 서신 예수님 中)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힐책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한 번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양 외에 다른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우리 주님이 (가야바의 심문장에서) “나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장엄하게 선언하실 때, 지옥이 크게 흔들리더니 폭발하여 예수님을 증오하던 가야바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휩쓰는 것 같았다... 는 끔찍한 형체들 중에서 발톱을 세우고 뒷다리로 걸어 다니는 개들 같은 작고 검은 물체들을 기억한다.., 또는 소름 돋게 하는 귀신들이 시온산 반대편에 있는 묘지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요한이 이런 형체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요한도 나중에 이런 것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환상은 때때로 스스로를 사도들보다도 높은 권위를 지닌(?) 존재로,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많은 것을 본 것으로 부각시킨다. 

▶ ▶지옥의 주인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 공중 권세 잡은 자(엡2:2)이다. 지옥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범죄한 천사들(벧후 2:4)과 불신자들이 가는 곳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말씀처럼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질 수는 있을 것이로되(눅10:18), 지옥이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지옥의 주인이 사탄이라면(이건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하데스의 영역과 비슷하다) 지옥은 사탄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그의 왕국이요 천국이 아니겠는가? 



· 사랑하는 주님이 채찍을 맞으실 때 나는 유대인들이 불결하다고 얼씬도 하지 않는 주님 곁에 있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직 주님의 보혈 한 방울이 나에게 떨어져 정결하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 는 내리치던 망치질 횟수를 서른여섯 번까지 헤아렸다. ... 주님은 늘 암송하셨던 시편의 성구를 되뇌셨다. 주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십자가를 짊어지셨을 때 기도하시던 마음 자세이셨다. 나는 주님을 따라 그 말씀들을 암송했다. 


· 빌라도가 판결문을 돌리던 아침 10시경에 우박이 조금 내렸다. 그러다가 날씨가 맑아졌고, 12시경에는 붉은 안개가 짙게 깔리면서 다시 해를 가리기 시작했다. ... 나는 본래의 궤도를 벗어난 별과 행성들을 보았다... 감람산 뒤에 창백한 보름달이 느닷없이 나타나 안개로 뒤덮인 해를 순식간에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태양의 우편에서부터 커다란 산 모양의 광대한 어두움이 나타나기 시작해 곧 태양 전체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그 중앙부는 어두운 황색이었고, 불의 고리처럼 보이는 붉은 색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에는 어두움이 짙이가고 붉게 타는 별들이 나타났다. 


... 십자가 지척에 있던 사람들이나 멀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눈을 돌려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렇지만 어두움은 갈수로 짙어졌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신실한 친구들을 제외한 온 무리들이 십자가를 뒤로하고 떠났다.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신비주의적인 표현들.

▶▶ 무리가 돌이킴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그 된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고 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눅 23:44, 46~48)



· 베드로가 그들에게 여기(대제사장의 뜰) 있으면 위험하니 떠나라고 하자 그들은 곧 떠났다. 베드로는 점점 극심한 슬픔 속에 빠져 들었고, 다른 제자들은 마을을 떠났다. 나는 대략 열여섯 명 정도 되는 제자들 중에서 바돌로매, 나다나엘, 새너티누스, 바사비스 유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는 시몬, 삭개오, 장님으로 태어났다가 주님께 치료를 받은 마나헴을 보았다. 


· 주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언니인 헬리의 딸 마리아, 글로바의 딸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스무 명 가량의 경건한 여인들은 이 광경(빌라도의 궁전에 다시 도착한 예수님)을 훤하게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 중 맨 앞에 있었다. 


· 형장 위에는 열여덟 명의 궁수들이 있었다. 여섯 명은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했던 자들이고, 네 명은 그분을 갈보리로 끌고 온 자들이었다. 두 명은 십자가를 끈 사람이었고, 나머지 여섯은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온 자들이었다. 궁수들은 유대인과 로마인 모두에게서 보수를 받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키가 작고 땅딸막하고 흉포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때는 대략 12시 15분이다. 십자가가 높이 세워졌을 때, 성정에서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사가 있을 때마다 울리던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정확한 계수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인물들에 대한 환상이다. 전지적 시점이라 할 수 밖에 없고, 스치듯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찍힌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듯한 세밀한 묘사이다. 또 카톨맄에 최종 해석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행동이다. 



· 언덕(골고다) 꼭대기는 둥글었다. 보통 기마 훈련장 정도의 넓이였다. 다섯 개의 입구가 있었고 담은 낮았다. “5”라는 숫자는 보통 이런 곳에서 쉽게 발견할 구 있는데,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던 온천과 베데스다 연못, 그 밖의 여러 마을에 이르는 다섯 개의 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중대한 예언적 의미가 있다. “5”라는 숫자는 우리를 천국의 문으로 인도해 주는 주님의 거룩하신 상처 다섯 개를 의미한다. 


 숫자 ‘5’는 오컬트, 비밀집단에서 선호하는 숫자 중 하나로 은연중 신비주의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나름의 “숫자풀이“에 복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오히려 요한계시록에서 “5”는 문자적이면서(9:5, 17:10), 10의 절반으로 상징성이 있으며, 세상 만수(10)의 파열로 제한된 재앙의 기간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일정 부분 숫자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모든 숫자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여 풀이해대는 것은 때로는 아전인수 격으로 모든 상징과 비유를 획일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숫자를 풀이(?)한다 함은 신비가들의 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성경에서 어떠한 상징으로 접근하였는가 하는 상징성 차원에서 접근함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기억하자!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거룩한 상처 다섯 개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걸. 



·는 내리치던 망치질 횟수를 서른여섯 번까지 헤아렸다. ... 주님은 늘 암송하셨던 시편의 성구를 되뇌셨다. 주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십자가를 짊어지셨을 때 기도하시던 마음 자세이셨다. 나는 주님을 따라 그 말씀들을 암송했다. 


· 나는 주님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나는 포도즙 틀에 으깨진 포도처럼 짓눌렸노라. 내 피가 물이 될 때까지 흐를 것이나, 이곳에 더 이상 포도주는 없으리로다” 주님이 실제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내가 다른 이들에게서 들었는지, 아니면 내 마음속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중에 이 말씀과 연관된 환상을 보았고 포도주를 만드는 야벳을 보았다.


· 잠시 후 주님은 고개를 숙이셨고 영혼이 몸을 떠났다. 나는 빛나는 유성같은 모양으로 십자가 아래의 땅을 통과하는 주님의 영혼을 보았다. 


· 주님이 운명하시기 전, 큰소리로 마지막 말씀을 하시자 땅이 흔들리고 갈보리산의 바위가 깨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주님과 게스마스의 십자가 사이의 땅이 깊게 갈라졌다. 


· 나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반짝이는 유성 같은 모양으로 천사들을 거느린 그분의 영혼을 보았다. 나는 천사 가브리엘이 십자가 아래의 땅속을 통과하는 것을 주시했다. 나는 천사들이 한 무리의 악한 영혼들을 사로잡아 무저갱으로 던져 넣는 것을 보았고 저 세상의 몇몇 영혼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몸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명령도 들었다. 죄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고 회개하며 이 영혼들을 통해 주님의 신성을 보이고자 함이었다. 


· 나는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떠올리다가 다른 데로 주의를 돌렸을 때 주님의 무덤 입구에 예닐곱 명의 경비병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카시우스는 동굴 문을 뒤로하고 서서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바깥문은 닫혀 있었고, 돌도 무덤 입구를 막고 있었다. 나와 우리 구세주의 시신 사이에 두꺼운 문이 가로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곳은 하나님의 빛으로 투명했다. 천사 둘이 주님 곁에서 경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구원자의 거룩한 영혼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 분이 지옥으로 내려가실 때의 광대하고 복잡다단한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일부분만 기억한다.


 성경에 근거되지 않은 신비주의적인 환상과 저자 자신이 주님과 매우 친밀함(?)을 강조한 표현 등이 보인다. 



· 아리마대 요셉은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 빌라도의 인장이 찍힌 허가증을 보여주었다. 군인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성문을 열어보려고 몇 번이나 애를 썼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성문은 지진으로 충격을 받아 뒤틀어졌음이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강도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러 갔던 궁수들도 다른 성문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렇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빗장의 손잡이를 잡자 꿈쩍도 안 하던 성문이 저절로 열렸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마치, 온달장군 이야기 같다. 뭐, 주님이 못 하실 것도 없지만 이 일로 인하여 주께서 어떠한 영광을 받으셨는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지 않은 기적(?)은 차라리 설화와 같다.



· 디나는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던 사마리아의 여인이다......남편이 여럿이었던 디나는 이 남자 저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시가(=수가성)에서 살게 되었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디나에서 살로메로 바꿨다. 디나의 장성한 두 아들과 세 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에머릭 수녀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선지자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즉 예수님은 디나 한 사람을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도 많은 죄에 얽매여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디나처럼 간음과 같은 중대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마라는 수판 근교 출신의 모압 여자다. 나오미의 아들 기룐의 과부인 오르바의 후손이었다.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가 재혼을 했었다. 오르바는 룻의 동서이므로 마라는 주님이 태어나신 다윗의 집안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에머릭 수녀는 공생애 2년째인 엘룰 월 18일(9월 9일)에 예수님이 마라를 괴롭힌 네 귀신을 몰아내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 


아이넌에 살던 마라는 부유한 유대인 남편한테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남편이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간통으로 태어난 세 자녀가 더 있었다.


“나는 보았어요.“ 에머릭 수녀가 말했다. ”나는 다윗 계보의 곁가지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마라 안에서 정결해지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나는 얼마나 많은 혈연과 후손들이 얽히고설켜 있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빛으로 돌아온 겁니다.“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을 개인적 상상/환상을 통하여 마치 예언자적인 듯한 관점에서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주님의 복음의 능력은 특정 가문을 통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다윗 계보의 곁가지들을 어찌 오르바의 자손들로만 한정할 수 있겠는가? 다윗의 형제들은 어떠하며, 다윗의 많은 자손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전 16:31)라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그 가문의 구원까지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의 효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제54장 갈보리의 이름으로: 장 전체를 그대로 옮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은 바위투성이의 해골 지역인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이라는 이름을 묵상할 때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아담의 때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모든 시대의 영을 보며, 이 환상을 통하여 모든 이름들의 의미가 드러남을 깨닫는다. 여기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기억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이-먼 훗날 예수님의 피땀으로 물들게 될- 감람산 동굴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하와가 베들레헴 구유가 있던 작은 동굴에서 아들 셋의 탄생을 약속받고, 셋을 출산하는 모습도 보았다. 또한 헤브론 근처 동굴에 사는 하와를 보았다. 바로 그곳에서 마스바의 에세네파 공동체가 후대에 세워졌다.


나는 대홍수 이후, 예루살렘이 세워지기 이전의 갈보리를 보았는데 갈보리는 완전히 폐허였다. 검은색이었으며, 홍수 이전의 다양한 유물들이 돌과 함께 마구 흩어져 있었다. 나는 갈보리산을 이루는 바위 및 심연에서 아담과 하와의 무덤을 보았다. 아담과 하와의 유골을 보니, 머리와 갈빗대 하나가 다른 해골의 갈빗대로 들어가려 하는 것 같았다. 이 해골 안에 놓여있던 머리는 원래 거기 속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의 유골이 이 무덤에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왜냐하면 노아가 유골의 일부를 방주에 실었고, 후에 여러 세대를 거쳐 족장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노아나 아브라함은 제물을 바칠 때 습관적으로 아담의 뼈를 언제나 제단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시길 원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힐 때도 유물로 지키라고 아담의 뼈 일부를 주었고 요셉은 늘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첫 번째 성물함에 요셉의 뼈와 아담과 하와의 유골이 함께 담기게 되었다. 나는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많이 보았지만 잊어버린 것도 있고 설명하기 곤란한 것도 있다.


갈보리란 이름의 기원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겠다.


나는 엘리사가 선지자로 활약했던 시대의 골고다를 보았다. 그 당시의 산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때와 달랐다. 갈보리는 많은 담과 동굴, 무덤이 있는 언덕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엘리사가 무덤 속에서 있던 해골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 내가 생각하기에는 천사 같다 - 곁에서 그에게 말했다. “이는 아담의 두개골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을 가져가고 싶어 했지만 천사가 반대했다. 나는 두개골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선지자 엘리사는 그 언덕을 갈보리라 불렀다. 마침내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담의 두개골 위에 세워진 것을 보았다.  동시에 나는 천하만국의 고유한 숫자들과 척도들을 전체적으로 보고, 개별적으로도 보았지만 아쉽게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중앙부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다시 말하면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본 셈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방법을 쓴다면, 원근 각처의 여러 나라와 산, 사막, 바다, 하천, 촌락, 심지어 비좁고 후미진 곳들까지도 지도를 펴 놓은 것보다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환상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 읽으면 읽을수록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내용들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스스로가 결코 파기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도 아브라함을 잠들게 하시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이 아닌가(창 15:17). 젖먹이 어미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 유품 숭배사상도 엿보인다. 천국에 가면 얼마든지 볼 실제의 아담을 놔두고 (저자에게) 엘리사처럼 보인 선지자는 왜 유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 주후 70년에 성전과 성읍은 로마 지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파괴된다. 성만찬의 다락방과 예수께서 판결 받으신 곳과 갈보리와 예수님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 당시 자료에서는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현재 추정된 장소들만이 몇 군데 있다.



(제62장 부활의 밤)

· 무덤 전체도 언약궤와 관련된 각 시대의 역사를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카시우스는 천사들의 존재와 무덤을 에워싼 찬란한 광채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그의 몸가짐이 성찬을 받는 사람의 묵상하는 자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 나에게는 예수님의 영혼과 육신이 무덤 밖에서 합쳐지는 것으로 보였는데, 주님의 영혼이 움직임 없던 육신으로 완벽하게 들어가 재결합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주님의 머리맡과 발치에서 무릎 꿇고 경배하던 두 천사가 상처가 다 드러난 주님의 시신을 들고 무덤에 누워 있던 자세를 유지하게 하면서 바위를 통과하는 것을 본 듯하다. 그때 바위가 유난히 흔들렸다. 


그리고 예수님이 수난의 흔적이 있는 당신의 몸을 보좌에 앉으신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보였다. 


· 천사들은 숱한 매질을 당하고 찢겨 나갔던 주님의 거룩한 몸의 작은 파편까지 전부 모아서 보존했다. 그리고 주님이 넘어지시면서 피가 뿌려졌던 땅에서도 그분의 보혈을 모았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모아들인 몸의 파편들을 주님의 몸에 다시 붙여드렸다. 


(제63장 부활)

· 영혼과 신성이 다시 합쳐진 주님의 몸이 일어나 수의를 풀어냈다. 동굴 안은 환하게 밝았다. 바로 그 순간, 무시무시한 괴물이 무덤 밑에서 끔찍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주님은 커다란 깃발을 단 흰 지팡이를 잡으시고 발을 용의 머리에 대시며, 그 꼬리를 지팡이로 세 번 내리치셨다. 


 신비주의적 환상

주님의 부활의 영체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일순에 완전해지셨다. 또한 주의 말씀 한 마디면 바다가 죽은 자들을 내어 놓는다 했다. 천사들이 시신의 작은 파편까지 일일이 챙긴다는 발상에서 자못 신화적이고도 희화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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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새성경 사전

옥스퍼드 원어성경 대전

호크마 주석사전

네이버 지식인

http://www.catholic.or.kr/

온라인 성경

루이스 벌콥.「벌콥 조직신학」.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5

(장로교 신학자 뵈트너 박사의 저서) Loraine Boettner, Roman Catholicism,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9). 7-9-

유선호.「천주교도 기독교인가」. 하늘기획, 1998

성막으로 흐르는 보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