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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비 온 뒤 햇빛처럼-이 한 편의 찬송가

사진출처: http://wcs4.blogspot.kr/2013_12_01_archive.html



비 온 뒤 햇빛처럼 



김삼



원명: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The Peace that Jesus Gives) 


원곡 참조 사이트: http://hymnary.org/hymn/GTS1921/page/149


영문 가사 scissurl.com/5/0i9


작가(작시/작곡): 할더 릴레나스(Haldor Lillenas) 



 





가사 (김삼 번역)


비 온 뒤 햇빛처럼 


   1

   비 온 뒤 햇빛처럼 고통 후 안식처럼

   되찾은 희망처럼, 복된 예수의 평화


   (후렴) 

   오 주 예수의 평화 항상 머물러 있네

   하늘 음악 같으며 유리 바다 같아라 

   주님 주신 참 평화 주님 주신 참 평화


   2

   저 맑은 이슬 같고 새 아침 동녘 같네

   정다운 우정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


   3

   끝없이 흘러가는 한 줄기 강물처럼

   샘솟는 노래처럼 깊은 예수의 평화

                                                                                                             

                                                                                             



이 찬송가는 장로교 합동/고려측이 만든 옛 '새찬송가'(1962년)의 제 497장으로 실렸던 것이다. 인터넽에 떠 있는 곡은 반주곡이 붙은 가락으로만 되어 있는 데 비해, 한국 찬송가의 곡은 4부 합창으로 편곡돼 있다. 또 가락도 일부가 서로 다르다. 반주부 가락이 원곡인지, 본래부터 편곡된 합창곡이 있었던 것인지, 한국에서 편곡된 것인 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가사와의 조화는 합창곡 쪽이 더 낫다는 느낌인데, 편곡은 잘 되었으나 베이스 라인이 너무 높은 편이다. 


원곡의 연주 사례로 찾은 것은 다음 (앨토 독창) 동영상 뿐인데, 연주가 가볍고 배경도 좀 그렇다.  

youtu.be/dG0fOJ1BMT8



흔히 한 두 개의 독특하고 두드러진 화음의 바탕 위에 걸린 비화성음이 한 악곡의 인상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때가 있다. 위 곡이 수십 년 간 필자의 뇌리에서 좀체 잊혀지지 않는 이유도 둘째 마디(그리고 둘째 줄 둘째 마디)의 앞 부분에 걸쳐진 (변화화음이자) 감7화음(F#dim7)과 그 위에 걸쳐진 화음밖의 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줄 둘째 마디에서도 같은 음이 나타난다. 작곡자가 왜 초두부터 이런 화음을 쓰게 됐을까? 비와 햇빛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대비를 염두에 두다 보니 은연 중 감성적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작시/작곡자가 동일인이어서 가사와 가락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다반사처럼 가사/가락이 동시발생돼 나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가사를 가락으로 살리는 면에서 부분적으로 좀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체는 매우 아름답지만. 

왜 이런 말을 하냐면, 흔히 영어권 비평가들이 핸델의 '메시아'의 가사와 노래가 어떤 부분에서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작곡가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 릴레나스의 스타일은 한 마디로 프롤리핔, 즉 다작형이다. 그래선지 가사의 시운과 음 높낮이와의 조화 면에서 썩 탁월한 편은 아니다. 일부는 어색(awkward)하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이 찬송가는 당대엔 크게 애호 받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대중화에 그다지 성공한 작품은 못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오래 남아 잘 불리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원곡이 반주부 가락 곡인 탓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에서 편곡한 듯한 위의 합창곡 형태는 회중용보다는 성가대용으로 매우 적격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런 면과 이 곡의 불규칙한 면에서, 릴레나스 곡 중에서는 드물게 아름답고도 창의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럴 요인 중 하나는 우선 주 예수님의 평화라는 주제이고, 그래서 그 토핔을 묘사하다 보니 순차진행적이거나, 부드럽게 다독이듯 또는 달래는(soothing) 듯한 부분들(첫줄 3,4째 마디와 후렴 3째 마디), 그리고 중간중간의 도약적인 부분들이 모두 매우 절묘하게 잘 조화되어 있다. 

특히, 4분의 6박자 안에서 2분음과 4분음의 묶음이 흘러가듯 평화를 노래하고 있는 가운데 가사 때문에 둘째 줄 중간부터 돌출하는 2개의 4분음 묶음이 '못갖춘마디'(불완전소절) 분위기를 형성하는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불규칙적인 변화는 회중에게는 하나의 부담스러운 건덕지이지만, 음악의 미로서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번역과 음감


그 다음으로 논하고 싶은 것은 영시와 가락의 조화 자체가 불안한 부분들의 번역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 온 뒤[에] 햇빛과 


초기 (옛 '새찬송가' 편집팀의) 번역자는 후렴 전 부분 가사의 7.7.7.7. 음절/가사 속에서 강박을 살리려면 으레 번역도 [4+3]의 흐름/리듬을 타면 되리라 생각했겠지만, 결과는 사뭇 awkward하다. 

예컨대 위 악보 사진 속 오리지널 번역에서 '비 온 후[에] 햇빛과'라고 토씨(조사) '-에'에 가장 높은 음의 강세가 와 있다. 약박이지만 최고음이다. 물론 원시(링크 참조)의 'sunshine'에서 뒷 부분인 -shine도 한 마디의 끝음인 높은 음에 떨어졌으니, 영시 자체가 이미 그렇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급한 대로 뒷 부분을 고음으로 높이는 것은 썩 좋은 테크닠이 못 된다. 


필자는 그래서, (영어 음절에 맞춘) 한글 번역을 4+3조가 아닌 '3+4'로 도치시켜, 높은 음에 토씨 아닌 어간, '햇-'이 오도록 옮겨 보았다. 아마도 4+3의 (상투적인) 흐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반발할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음율 대 가사의 결합 면에서 3+4의 음감이 훨씬 낫다! 

두 가지 번역을 각각 가락과 대조해 보라. ([ ]표 속은 고음의 위치)


   비 온 후[에] 햇빛과


   비 온 뒤 [햇]빛처럼  


최고음은 각각 '-에'와 '햇-'에 떨어졌다. 어느 쪽이 좋은지 한 번 불러 보라. 부르는 연주자의 느낌도, 듣는 청중의 느낌도 후자가 더 낫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필자는 가사 2, 3절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옮겨 처리했다. 하나를 그렇게 바꿔 놓고 나니까 나머지도 균형상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고통 후에 안식과 

   다시 찾[은] 소망(여기서도 최고음에 토씨 '은'이 떨어짐)


4.3조로 된 이 옛 번역가사를..  


  고통 후 안식처럼 

  되찾은 [희]망처럼(최고음에 어간 '희'가 떨어짐)


이렇게 3.4로 고쳤다. 이처럼 번역 시 상투적인 가사 조의 흐름을 약간만 바꿔도 뜻밖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락의 리듬보다 가사와의 조화를 더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창의적이고 narrative한 해석기법이다. 그런 기법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인의 고백으로 점철된 찬송가나 기독교음악의 경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어진다. '되찾은 희망처럼'에 이어지는 가사와 호흡의 처리 문제이다. 원시는 보다시피 갑자기 둘째 마디 끝의 두 4분음이 (가사의) 그 다음 연의 시작으로 돼 있어 못갖춘마디처럼 되면서 이음표(페르마타)까지 길게, 한 프레이즈로 잇다 보면 뒤에서 숨이 차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성악적으로 잘 훈련된 성가대/합창단이 아니면, 알아서 적당히 쉴 만한 데서 쉴 수 밖에 없다. 

이를 의식해선지(?) 옛 '새찬송가'에서는 다른 마디에서처럼 둘째 줄 둘째 마디 끝에다 숨표를 붙여 놓았다. 하지만 되도록 원시의 가닥은 존중해 줘야 한다. 더욱이 후렴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 '못갖춘마디' 형인 2개의 4분음표 군은 바로 이 부분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필히 바로 앞에서 끊어줘야 전체적 균형상 올바르다. 그러다 보니 필자의 번역은 원시엔 없는 두 글자씩의 '복된', '참된', '깊은' 등의 형용사를 넣어야 했다. 물론 원 뜻이 크게 마이너스 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원곡 둘째 줄 끝의 이음표나 후렴 처음에 이어지는 이음표 중 하나를 생략하는 것이 현대적으로 적합하다. 물론 효과를 위해 둘 다 끄는 것도 해석자의 자유이겠지만. 후렴의 첫 이음표는 순전히 영문가사 'Oh'의 감탄효과를 위해서다. 끌지 않고 금방 나아가버리면 어색하고 효과가 적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곡은 전반적으로 베이스 음군이 높아서(최저음: 낮은 Bb) "둥둥 뜬" 기분이다. 따라서 D조로 내리는 것이 안정감에 있어서는 더 낫다. 그러나 소프라노 음군이 반음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쉽다면 3절을 조바꿈 하여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연주를 위한 귀띔


가사내용상 '대비'를 살리려면 밋밋하기보다 처음부터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 즉 '비 온 뒤 햇빛처럼'과 '되찾은 희망처럼'을 크레센도로 키워 '햇빛'과 '희망'이 작은 절정을 이루게 한다. 처음부터 크레센도를 전개하는 것이 부담 된다면, '비 온 뒤 햇빛처럼'은 약간 가볍게, '되찾은 희망처럼'은 더 강하게 처리한다. 

아무튼 정말 비 온 뒤의 햇빛처럼, 되찾은 소망처럼 환하고 찬연한 느낌이 들 만하게 강렬히 표현돼야 좋다. 그렇지 않고 밋밋하게 넘어간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대조적으로 '고통 후 안식처럼'은 조용히 처리하되, '안식' 두 글자에는 가볍고도 분명하게 앸센트를 준다. 후렴 전 '복된 예수의 평화'는 고조된 채 좍~ 펼쳐 주는 듯 처리하면서, 속도를 충분히 늦춰 준다(요즘 많이 모자라는 여유이다). 


후렴 첫 글자 '오'를 늘인다면, 그 다음은 금방 원속도(인 템포)로 하기보다 약간 여유 있게, 이내 속도를 키워 제 속도를 되찾는다. 

후렴 첫 줄은 큰 변화 없이 대강 넘어가되 가락 모습 그대로 찰랑거리듯, 다독이듯 가볍고 부드럽게 처리하면 더 좋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남성 파트는 여성보다 조용해야 좋다. 여성 가락이 낮은 편인 데 비해 베이스의 가사와 진행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후렴 둘째 줄의 가락에서 작가는 다시 앞뒤의 극적인 대비효과를 노렸다. [ 음율을 맞추느라 좀 달리 옮겼지만, 원시는 "한 줄기 시편 가락처럼, 기쁘고 영원한 평온처럼"으로 되어 있다. ] 앞은 밝고 환하고 강하게(곡 전체에서 세 번째의 옥타브-음정 도약이다), 뒤는 약간 애조를 띠듯 깊고 그윽하게. 따라서 전자는 고조시켜 강세를 이루고, 후자는 음량을 줄이면서 생각하는 듯 처리한다. 

마지막 줄은 다시 한 번 중간 수위의 크레센도로 조용히 마무리한다. 

새삼 강조하지만, 이 곡의 연주적 생명은 처음부터 나오는 옥타브 도약 부분을 강하게, 또는 짧은 크레센도로 처리하는 데 있다.     



부록

작가의 생애


평화와 햇빛을 무척 사랑한 찬송작가, 할더 릴레나스(Haldor Lillenas 1885-1959)는 미국 현대 찬송가의 왕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기독교 곡을 썼다. 작품 수가 약 4,000 곡이나 된다. 한국의 중노년 세대의 귀에 익은 것만 해도 퍽 많다. 그의 대표작은 후렴에서 남성 파트의 익사이팅한 "한량 없는 주의 크신 은혜 바다보다 넓고 깊도다"라는 멜로디가 나오는 웅장한 합창곡,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 http://scissurl.com/5/0mf )이다. 


릴레나스는 특히 웨즐리/성결교 계열의 송라이터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평가된다. 그는 나자렡(나사렛)성결교회 목사였고, 작가, 음악전도자, 시인, 음악출판업자, 찬송가 다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 1931년에 나자렡 성결교단 최초의 공식 찬송가인 '영광스런 복음성가들'을 편집/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41년 올리벹 나자렡 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릴레나스는 본래 1885년 노르웨이 베르겐 부근 스토르트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넓은 땅을 팔아 그가 두 살이던 1886년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초기엔 사웉다코타 콜턴의 잔디풀 짚으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오리건주 아스토리아를 거쳐 미네소타 로즈빌에 거주하지만, 릴레나스 자신은 공부를 위해 오리건에 돌아가 생화학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릴레니스의 신앙배경은 스칸디나비아 출신답게 루터교인이었으나, 어린 시절 살던 아스토리아의 한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던 1906년 무렵, 그 할머니가 활약하던 성결교 피니엘(브니엘)선교회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본래 그윽한 콘트랄토 목청을 갖고 있던 그의 어머니(안나 마리 릴레나스)는 자주 경건한 루터교 노래를 들려 주어 어린 릴레나스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가 죽은 얼마 후 아스토리아로 돌아갔을 적 어느 날 저녁, 거리 코너의 예배장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나도 거기 있겠다고 어머니께 말해 주오'를 들은 것을 계기로, 계속 노래와 간증에 감동을 받고서 삶을 바쳐 기독교에 투신하기로 결단, "그 해에 구원을 받았고 그 3주 후 성결함을 받았다"고 한다. 스물 한 살 때였다. 


1908년 그는 포틀랜드제일나자렡교회(A.O. 헨드릭스 목사) 정식 교인이 되었고, 통신성경공부 코스를 통해 사역자가 될 길을 닦는다. 또 구세군 보컬그룹 '전마차 군단'과 함께 활동하면서 부흥집회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1909년 릴레나스는 소속교회의 담임목사인 헨드릭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디츠 퍼시픽 성경대학에서 사역자 공부를 계속하다가, 그 해 말 한 지역교회의 음악감독으로 들어가 송라이팅과 설교사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리릭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는 디츠퍼시픽 대학 재학 당시 목회자(훗날 지방회 감독)의 딸인 버타 메이 윌슨( http://scissurl.com/5/1jk ) 양과 만나 함께 음악사역을 하다가 이듬해인 1910년 결혼을 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와서 앞서 언급한 피니얼 미션을 떠맡아 사역하다가, 1년 후 릴레나스가 롬폭나자렡교회 목회자가 됐다. 1912년 부부는 나자렡 교회 장로로 안수를 받는다. 


그즈음 릴레나스는 웨일즈 출신의 가수/작곡가였던 대니얼 프로티로와 아돌프 로젠케버에게서 3년간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그 후 릴레너스는 포모나 레드랜즈, 일리노이 오번, 텍서스 피니얼, 인디애나폴리스 등에서 계속 목회를 하다가 목회일선에서 물러나 음악출판에 투신했을 때, 아내 버타는 계속 목회 일을 했다. 버타는 흠잡을 데 없는 목회자인 데다 자신도 찬송작가였다. 


그는 또 10년간 음악전도자로 아내와 함께 순회부흥음악집회 사역을 하면서 뉴저지 웨즐리언감리교회도 방문했는데, 당시 그 교회 목사는 훗날 미국의 저명한 베이스바리톤이 되는 조지 베벌리 쉐이(참고 글: http://truthnlove.tistory.com/760 )의 아버지였다.   

  

릴레나스 부부는 1938년 미주리주 밀러 카운티에 있는 2평방km의 광대한 시골 땅에 '멜로디 레인'이라는 저택을 짓고 살면서 동네 교회를 돕다가 1945년 아내를 사별한 뒤, 롤라 델과 재혼하여 계속 살다가 1955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너로 옮겨와 살게 된다. 



사족이겠으나, 릴레나스의 생애에 연루된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이 있다. 1955년 그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과거 미국 이민 초기 시절 만났던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정교도 '시르한'(영어 '설핸')의 가정을 돕기 시작했다. 시르한 가족은 릴레나스의 도움으로 1957년 1월 패서디너에 와서 그의 집에 3개월 머무른 뒤 그가 마련해준 임차 주택에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가장인 비샤라는 아내 메리와 두 아들을 버려 두고 요르단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평소 두 아들을 구타로 체벌하는 엄한 사람이었다. 

릴레나스가 당초 예루샬렘의 시르한 집을 방문할 당시, 2살 아기였던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BS)은 훗날 미국에서 크리스천으로 이 교단 저 교단을 전전했는데, 어쩐 일인지 (좐 F. 케네디 대통령의 아우인)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 혐의자로 기소/선고 당하여, 현재까지 종신형을 살고 있다니 기구한 일이다. [ 가장 최근의 변호사는 그가 모종의 음모로 "프로그램 화"되어 범행을 저질렀기에 범행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며 공모자가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범행 당시 SBS는 오컬트 비밀집단인 '장미십자단' 단원이었고, 체포된 후 전문가에게 정신감정을 받은 결과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


아무튼 릴레나스는 1959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나 미주리 캔저스 시티의 포레스트힐 묘원에 묻혔다.



창작경력


릴레나스는 어릴 적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19살 때 처음으로 작품 출판을 시도했다. 여러 번 출판사에 거절 당하면서도 거듭 시도한 끝에 '주님 나를 풀어 주셨네'(He Set Me Free)가 히트작이 되면서 로열티를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 21살 회심 후에는 자신의 신앙과 기쁨을 노래한 찬송가를 많이 쓰기 시작해 수많은 사역자들에게 공급했다. 또 부활절/성탄절 특별음악예배를 위한 칸타타 음악도 썼다.


릴레나스의 특징 한 가지는 작품에다 가명을 많이 썼다는 것인데, 여성의 이름인 '버지니어 로즈 골든'이나 '래번 그레이', '리처드 헤인즈웙', 'H. N. 라인즈 목사', '롸벑 휘트모어', '펀 윈터즈' 등이 그것이다. 위의 원곡도 '리처드 헤인즈웙'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는 1917년 가난하던 시절에 쓰였다. 그와 아내가 일리노이주 올리벹에 작은 집을 지었지만, 내부를 꾸릴 돈이 없었다. 피아노도 없어 악기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한 이웃집에서 작은 풍금을 발견해 '5 달러'에 구입하여 여러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 작품은 1918년 판권등록을 했다가 1922년에야 비로소 '태버너클 합창성가집'에 수록돼 출판됐는데, 당시 그가 받은 금액이 바로 '5 달러'였다! 


1924년 릴레나스가 인디애나폴리스제일나자렡교회를 목회할 무렵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음악출판사인 '릴레나스 퍼벌리슁 컴퍼니(LPC)'를 설립했다. 지분은 100 달러씩에다 사장은 E.W. 페티코트, 매니저는 릴레나스 자신이었다. 4년 후인 1930년엔 출판사를 교단 발행매체인 나자렡퍼블리슁하우스(NPH)에 팔았는데, 조건은 릴레나스 자신이 10년간 (음악발행) 매니저로 계속 일하고 재평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총 약 70만권의 찬송가와 노래책을 만들어 팔았고, 계약 당시 1,535개 작품의 저작권도 팔았다. 

하지만 65세인 1950년 은퇴하기까지 계속 편집인으로, 은퇴 후에는 NPH의 음악자문위원으로 죽기까지 사역했다.   

릴레나스는 시인이기도 했는데, '가난'(1928)이 그 대표작이다. 또 시집 '낙엽 긁어 모으기와 기타 시편'을 1929년에 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