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마라나타, 괜찮나?
몇 년 전부터 고형원의 '마라나타'란 노래가 교계에서 폭넓게 애창되고 있다.
참고 사이트:
http://kjk405.blog.me/50126427442
마라나타란..?
널리 알려진 대로 아람어 문구인 '마라나타'(maranatha)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코린토A서(고전) 16'22에서 사용됐다.
[아람어는 본디 바벨론-아람/쉬리아 등에서 발달한 언어로 유다 포로기를 통해 예수님 당대에도 유다 전역에서 널리 통용되던 언어였다. 예컨대 '탈리타 쿰', '케파', '보아네르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밬타니' 등 예수님이 쓰신 용어들이 모두 아람어였다.]
파울 사도는 편지 수신자들이 이방인인 코린토 교우들인데도, 이 아람어 문구를 신약 원어인 그리스어로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헬라 문자로 'Μαρὰν ἀθά'(또는 Μαρὰνἀ θά)로 음역했다. 따라서 이 아람어 문구가 '할렐루야'나 '호산나'처럼 당대 국제 교계에 널리 통용되던 숙어 내지 관용구의 하나였으리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밖에도 초기신학자들이었던 이른 바 '사도적(일명 속사도) 교부'들의 교훈집인 '디닼헤'(제 10'5,6: 성만찬 관련 내용)에서 사용됐다.
문법적으로, '마르'는 "주님", '안'은 "우리의", '아타'는 "오셨다" (또는 '타'로서 '오소서')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두 낱말을 나누는 방식에 따라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마라나+타'(מרנא תא : 히브리 문자 음역) 또는 '마란+아타'(מרן אתא)로, 전자는 "우리 주님, 오소서!"라는 기도문/탄원문 또는 "주님은 곧 오십니다"라는 신조적 선언문이다. 후자 역시 신조적 선언으로 "우리 주님은 (과연) 오셨습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후자 역시 히브리어/아람어의 포괄적인 시제표현상 "우리 주님은 오십니다."라는 현재형 또는 "우리 주님, 오실 것입니다"로도 해석될 수 정도로 놀라운 유연성을 지닌다.
이 모두가 초기 교회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제국 산하의 박해시대 속에서 전자인 '마라나 타'에 믿음과 감정을 담아 더욱 널리 그리고 애타게 쓰여졌다고들 추측한다.
이 문구는 흔히 요한계시록 끝 부분인 22'20과 결부되어 쓰이는데, 계시록 문구는 그리스어로만 되어 있는 데다 "아멘..예수님!"이라는 낱말이 더 들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디닼헤에는 "마라나타, 아멘"으로 뒤에 아멘이 덧붙여져 있다.
코A 16'22을 '교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크리소스톰)는 "마란 아타"로 해석했고, 대다수의 히브리어/아람어/아랍어 성경들이 이 번역을 선호했다. 아람어 페쉬타경도 이 쪽이다.
'마라나타'는 초기 교인들의 인사말이기도 했다는 흔한 통설이 있어왔는데, 그렇다면 마라나타의 뜻이 "우리 주님, 곧 오소서"라는 (직접 주님 상대의) 기도문이기보다 서로 격려하고 경고하는 뜻으로 "주님은 곧 오십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 경우 "아멘"이 전제된 탄원문/기도문 형태의 요계 22'20보다는 코A 16'22나 필리포서 4'5에 더 가깝다.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당대 교인들은 흔한 이스라엘 인사말인 '샬롬' 대신 이 인사말을 주로 사용했다는데, 주님 오시기까지 지상에는 참 평화가 없다는 인식에서였단다. 초기 교인들이 이 인사말을 애용하게 된 배경은 로마 제국의 당국이 신자들에게 황제를 '주' 또는 '신'으로 부르라고 강요하기에 오직 참되신 주님과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님 밖에 없어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다 보니 박해가 심해져 유일하고 애절한 소망은 주님의 재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므로 '마라나타'라는 말은 먼저 극심한 박해 속에 재림에 대한 절박감과 절대적인 갈망에서 우러난 탄식 그리고 통곡 같은 애원이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고형원의 이 노래에는 이런 분위기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냥 통째로 찬란한 영광 및 열광 분위기 일색이다. 박해 속의 절박감과 통절함이 거의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석된 해당 작가의 딴 노래들 사례에서도 보듯(참고: http://blog.naver.com/yoochinw/130086837669 ), 그의 노래 가사 다수는 주권주의(dominionism) 또는 소위 '킹덤 나우' 사상의 냄새가 난다. 주님의 재림은 세계적 또는 국제적인 거대한 영적 부흥을 전제로 한다는 식의, '부흥한국'의 성향으로 볼 때, 신사도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마라나타를 소재로 한 노래는 이것 말고도 '할렐루야 마라나타'(강명식 작)라는 것이 있는데, 대체로 자연스럽고 별 문제가 없는 가사로 보인다.
그러나 고형원의 경우 마라나타라는 재림 희구의 신약적 문구를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는 사뭇 구약적인 문구와 결부시켰다. 또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물론 시편 57'9이나 로마서 15'11 등은 이를 지지해 주는 듯 하다.
아마도 작가는 주님이 오시기 전 온 세상이 재림을 맞을 준비가 될 줄로 굳게 믿는 듯(?) 하다. 그게 아니라면, 작가는 세상의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주권주의나 신사도운동 등에 개입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가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여기서 작가는 마치 초림 때처럼 메시아를 맞는 사람들의 마음이 회개의 복음으로 잘 닦여지면, 메시아가 오실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초림 때는 골짜기를 돋우며 대로를 만들어 나아간 엘리야의 역할을 한 침례/세례 요한이 불과 6개월 먼저 태어나 성장하여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소개했지만, 주님의 재림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루어 질 일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엘리야나 침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기" 는 하나님의 권능로 되는 일이지, 인간의 계획이나 어젠다에 의해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십자가를 들고 땅끝까지 우린 가리라"고 노래한 것까지는 그럭저럭 맞아들어 간다고 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끝에서 주를 맞으리"
하늘 영광이 온~ 땅을 덮어..? 땅끝에서 주님을 맞아..?
지금 작가는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결과로 주님 오실 때 영광이 온 땅에 덮이고, 온 땅이 다 함께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것 같은 분위기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습을 한 번 미리 보겠는가?
제자들이 주님이 오실 때와 세상의 종말에 관해 주님께 여쭈었을 때 주님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종말이 아니라, 온갖 무섭고 떨리는 징조를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4'3~14 참조)!
연이어 이렇게 예고하신다.
"마치 번개가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까지 번쩍이듯이 인자가 오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여들기 마련. 그 환난의 날들 후에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뒤흔들릴 것이다. 그 때 인자의 표징이 하늘에 나타나, 땅의 모든 민족이 애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자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치 노아시대처럼 인자가 오는 것도 그러할 터이다. 홍수 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몰려와 몽땅 휩쓸어버리기까지 미처 알지 못하였으니, 인자가 오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24'27~30; 37~39)
이건 하늘에서 임하는 주님의 영광과 너무나 대조되는 땅의 처참하고 비참함이다! 고형원이 노래하는 그런 화려하고 영광스런 땅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재림이 아닌) 공중재림과 휴거에 대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주님이 몸소 호령과, 대천사(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로써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인데, 크리스토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맨 먼저 일어난 다음, 우리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하실 테니,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테살로니카 4'16,17)
여기에도 온 땅의 성도들만 불러 모으는 주님과 천사들, 나팔소리의 강림과 이를 맞이하는 그동안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공중으로 조용히 올라간다는 표현만 있을 뿐이다. 고형원이 노래하는, 그런, 땅끝까지 온 땅의 춤과 찬양이 아우러져 주님의 재림을 환영하는 듯한 화려한 우주적인 한 마당 '마라나타 축제' 같은 광경이 전혀 비쳐져 있지가 않다. 그냥 순전히 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더 나아가 주권주의자들, 신사도들의 공상일 뿐이다.
작가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성구를 조금이라도 깊이 묵상해 봤더라면, 마라나타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면-작가가 그런 재림 관련 성구를 모를 턱이 없다면, 그는 고의적으로 비성경적인 재림을 노래한 '마라나타'를 읊어,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는 셈이다.
고형원이 생각하는 그런 화려한 모습은 오직 주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 같은 성도들만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아무튼 작가의 이런 성향은 다른 노래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온 세상의 '7산' 또는 '7권역'을 정복하여 재림 전에 앞서 지상왕국을 이뤄 보겠다는 신사도들, 주권주의자들의 사상과 일치한다. 이런 주권주의자들의 사상은 뉴에이지 사상으로 세상을 통일하여 '세계평화'를 이루어보겠다는 신세계정부의 사상과도 어떤 의미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알고 보면, 이건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고형원의 이런 지상왕국긍정제일주의(?) 같은 사상은 우리가 계속 유의하여 검증할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게 다 좋잖나?"며 이런 노래를 아무 분별 없이 받아 부르는 교회나 그뤂은 별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성경적으로 분별과 검증을 해 보면, 각 교회나 단체가 부르고 현재 카페나 블로그에 올려진 수많은 노래들의 비성경적인 문제점들이 발견될 것이다. 말이나 글, 설교는 분별해야 하고, "노래이면 다 오케이"란 생각은 분명히 안일한 생각이며, 잘못이다.
분별과 검증 대상에는 예외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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