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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찬송가 연구: 우리 주 십자가(533장)




우리 주 십자가(새찬송가 533장)


원제: Have You Been to the Cross (또는 Have You Been to Calvary)

작시/작곡자: Richard D. Baker (1927-2011)

참고 악보: > (이하 붉은 색 화살표는 링크)



   우리 주 십자가 고난 당하실 때에 너는 거기 있었나?

   죄인들 위하여 목숨 버리실 때에 너는 거기 있었나?

   저기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신 주님 

   너희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느냐 사랑의 주께로 오라



20세기 후반인 1970년대에 창작된 이 찬송가는 구원을 위한 초청의 전도 노래다. 미국의 음악 목회자/복음찬송 작가 리처드 베이커가 가사와 곡을 다 썼다. 공식 곡명(가락이름)은 '매키니'(McKinney)이다. 한국 찬송가들 가운데서는 (21세기) '새찬송가'에 처음으로 실렸다. 

가사는 곡의 분량과 어울리게 총 3절로 돼 있는데, 주 예수님께만 참된 속죄와 구원, 참 만족이 있고, 오직 그 분만이 영생을 주신다는 내용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크리스토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매우 복음적인 가사이다. 1절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혜택에 동참하라는 부름/호소를, 2절은 세상 모든 것에서도 얻지 못할 만족이 오직 주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 안에 있음을, 3절은 주님은 지금도 뭇 사람을 초청하고 계시니 그 분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반복되는 후렴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주저 말고 나오라고 촉구하고 있다.  


멜로디는 대체로 aa'ba" 형식인데, 비록 가사 음절이 불규칙적이라곤 해도 단순하고 지루하기 쉬운 반복을 가락과 화성의 부분적 변(주)형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이 곡의 비교적 조용하고도 강렬한 매력은 바로 화음에 있다. 즉 베이스의 바탕음 위에서 세 상성부(S/A/T)가 각각 상하로 점진적/순차적 또는 마일드한 도약적 진행을 하면서 생기는 비교적 미묘한 '화음밖 음'들이 애틋한 감정을 자아낸다. 특히 테너 파트의 최다 5마디에 걸친(!) 찬송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긴 크로매팈(반음계적) 하강 순차진행은 그러하며, 그 가운데서도 각 프레이즈(악구) 끝에 나타나는 Fm7 화음 위에서 가락에서 발생하는 예리한 불협화음인 선타음, 'B♭'이 강한 인상을 준다. 이 불협화음은 1,2,4째 줄 등에서 3회나 반복되어 최다 효과를 내고 있다. 


심지어 21세기까지 국내외에서 전형적으로, 정격 화성 중심인 대다수의 찬송가들에 비해, 이런 20세기적 불협화음을 비교적 자유롭게 쓴 찬송가는 현재로선 이 작품 밖에 찾지 못하겠다. 교회음악에서 화음을 쓰기 시작한 이래, 성가나 찬송가들은 거개가 협화음 안에서 강박을 처리하는 전통적/정격적인 화성을 써 왔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민감한 감정/서정 중심인 현대의 젊은 신자들에게는 아무래도 불협화음도 너무 지나치게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자주 들어가야 '적성'과 생리에 맞는다. 왜냐 하면, 어떤 곡에서든 가락의 음악다운 면모는 주로 협화음들 속의 화음밖 음에 있기 때문이다. 협화음만 써서 음악을 만들면 지루하고 맛 없는 음악이 되기 십상이다. 


고전적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묘한 행습 한 가지는 불협화음을 너무 쓰면 안 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현대음악처럼 불협화음을 과도히 써서 문제(?) 되는 음악이 아니고서는 다 지루함을 면해 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다. 심지어 바로크 시대 사람들까지도 뒤늦게 해결되는 지속음이나 경과적/선타적 불협화음을 써서 미묘한 효과를 노린 것을 발견한다. 교회음악이라고 해서 협화적 화성만 고집한다면, 단연코 도태된다! 특히 현대에는 그렇다. 젊은이들은 협화음을 지루해 하고 생리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배찬양'곡들이 정서적/심리적으로 다소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불협화음이나 속화음, 나중 해결되는 견지음('sus') 따위를 자주 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찬송가와 같은 유의 화성적 여유를 지닌 찬송가가 더 많이 개발돼야 한다. 그러나 물론 지나치게 비협화적 화성을 남발해서 감정을 좌우하려는 것은 정서심리적 효과만 노리는 것이므로 너무 인간적/인위적이며 좋지 않다. 모든 것은 절제해야 옳다. 이 찬송가의 불협화음들은 듣기 좋긴 하지만, 약간 과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가사 상의 문제점

- '너는 거기 있었나??


얼핏 보기에 이 찬송가의 한글 번역은 대체로 무난해 보인다. 그러나 의문점들이 없지는 않다. '너는 거기 있었나?'라는 번역 부분이 특히 그렇다. 물론, 수난절에 흔히 불리는 흑인영가(아프로-어메리칸 스피리추얼) '거기 너 있었는가?'(Were you there..?)를 모방/원용한 번역이다. 

그런데 '너는 거기 있었나?'라는 물음은 묘한 시대착오적 혼동을 자아낸다. 우리가 2000년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당시 현장에 있을 수도 없었거니와, 꼭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우리가 대속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타임 머쉰'이라도 타고 역사를 소급하여 2000년전의 골고타/칼바리로 가 봐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어불성설이고 신비주의적이다. 흡사 환상적이고 뉴에이지적인 '비주얼라이제이션'(구상화)을 연상시킨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환상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단지 필요하면 주어진 계시인 말씀을 묵상하면 된다. 계시에 대한 믿음으로 그 분의 십자가를 맘 속으로 바라보면 된다. 

 

베이커의 원시는 'Have you been to the cross?' 곧 "그대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어, 의미가 많이 다르다. 이 경우 말이 된다. 대속의 유일한(!) 매체/에이전트인 예수 크리스토님의 피의 효험을 적용받으려면, 누구나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나 피가 낭자한 처참한 현장의 환상을 실제 목격/체험해 봐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의미는 결코 아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알아야 할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성경 기자들이 충분히 증언하고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록대로 믿으면 그만이다. 성체성사로써 '체화'를 실감해야 하는 카톨맄교처럼 그 이상의 '체험'이란 게 필요 없다.  


독자가 언뜻 "결국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대가 거기 있었나?"란 물음과, "주님이 수난하신 십자가로 나아가 본 적이 있나?"는 물음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마치 2000년전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구상화 내지 '리앨리티 쇼'적 체험 상상을, 후자는 주어진 계시와 믿음에 의한 묵상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 가사를 부른다고 누가 정말 (전자처럼)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할지 몰라도 가사 자체는 그런 어감을 풍긴다는 말이다. 찬송가는 가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2절 둘째 줄, "오직 주 예수님 네게 생명을 주사 참된 만족 주시네"에서 같은 동사 '주사'와 '주시네'가 겹친 것은 시적인 맛이 떨어진다. 물론 번역자/편집자 모두의 실수이다. 끈질긴 성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번역시도 시여야 한다! 번역문학도 문학이다! 한글 시도 시다! 이런 작은 실수도 전체 성도를 위해서는 깔끔하고 꼼꼼히 고칠 수 있었어야 한다. 


그 다음, 제 3절에서 '.. 너를 부르실 때에 주께 모두 나오라'는 것은 목적격인 '너'라는 단수와 '모두'라는 복수개념이 상치되어 모순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원시가 모두 성경적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원시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은 선곡상 차질을 빚지 않으려고 고쳐 번역하는 수도 많다. 



다음은 필자가 원시를 직역해 본 것이다. 


   1.

   그대, 주 예수님이 수난하신 십자가에 나아간 적이 있나?

   골고타로 가 봤는가?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장소로 나아가 보았는가?

   골고타로 가 봤는가?


   (후렴)

   거기 골고타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드님이 자기 목숨을 그대 위해 내려놓으셨다네

   아직 시간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크리스토(그리스도) 예수님께 그대의 신앙을 두라

   그대의 눈길을 지금 골고타로 돌려라


   2. 

   그대, 사람이 만든 온갖 것을 찾아 사서 가질 수 있어도

   그게 참 만족은 줄 수 없다네

   참 만족을 주실 분은 오직 크리스토님, 더 풍성한 삶을 주실 분, 

   그 분이 골고타로 부르시네


   3. 

   부드럽게 부르시는 성령의 또렷한 음성이 들릴 동안

   그대의 삶을 이제 예수님께 드려라

   의존하는 신앙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길

   그 분이 골고타로 부르시네



물론 원시 특히 1절은 마치 예루샬렘 현지로의 '성지순례'를 촉구하는 착각이 얼핏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원작자가 의도한 바는 수난하신 예수님이 구원의 길로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아래는 필자가 원시와 음절에 맞춰 새로 옮겨 본 가사이다. 


   1. 

   예수님 죽으신 저기 십자가 앞에 그대 나아갔었나?

   죄인들 위하여 값을 치르신 그 곳 골고타로 나오라


   후렴

   거기 십자가에서 목숨 주신 하나님 아들

   아직도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니 주저 말고 나오라

 

   2

   세상의 좋은 것 모두 갖는다 해도 참된 만족 못 얻네

   넘치는 생명을 네게 주시는 예수 너를 지금 부르네


   3

   성령의 음성이 네게 들려올 동안 너의 삶을 드려라

   영생을 얻는 길 오직 믿음뿐이니 지금 주께 나오라

 



참고 자료1: 작가의 생애


찬송가 '우리 주 십자가'(새533장)의 작시/작곡자, 리처드 D. 베이커(Richard Dee 'Dick' Baker)는 미국 텍서스의 유명 음악 목회자이자 전도사역자였다. 1927년 5월 12일 텍서스 주 파머즈빌의 침례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플래노를 근거지로, 1947년 노래 작곡을 시작해 지난 2011년 9월 5일 84세로 죽기 얼마 전까지 300여 곡의 가스펠송을 썼는데, 이 찬송가와 "All to Thee," "Longing for Jesus," "His Way Mine"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 다수는 목회자/전도자인 친형, 보 베이커(Rev. Dr. Bo Baker Jr.)와 함께 만들었다.

  

베이커는 젊은 시절부터 음악을 통한 전도사역에 열심을 품었다. 파머즈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1944년), 베일러 대학교 재학시절인 2차 대전 말기에 미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1950년 복교해 청년부흥운동(YRM)의 음악 리더와 독창자로 활약했고, 지금도 건재한 '베일러종교시간합창단(BRHC)'을 창단해 학교 채플과 순회음악선교에 기여했다. 한편 학교소속 미식축구단 '베어즈'의 선수였던 프랭크 보그즈(훗날 조지 베벌리 쉐이와 함께 쌍벽을 이룬 미 교계의 명 바리톤)와 둘이서 베일러 경기송(BFS) >을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 모교에 기여한 공로로 베일러의 조지 W. 츠루엩 '특별교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베일러는 현재 리버티 대학교와 함께 세계 최대급 기독교 사학의 하나이다. 둘 다 침례교 계열이다. 


베일러를 졸업한 뒤에는 포트웙에 있는 형인 보가 담임목회자로 있던 버취맨애브뉴침례교회에서 음악사역자로 일하면서, 사웉웨스턴신대원을 다녀 1953년 종교음악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아내인 앤(마거맅 앤 셀프)과는 앞서 1951년에 결혼했다. 1956년부터는 풀타임 음악 전도자로 나서 빌리 그래엄 전도대회의 오하이오 애크론 집회에 참가했고 17주나 지속된 그래엄의 뉴욬 매디슨스쾌어가든 집회 때는 전적으로 음악 부문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엔 그래엄 전도협회측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형과 함께 '베이커 형제' 전도팀을 이뤄 이후 20년간 국내외에서 전도자로 활약했다. 1973년 보가 플리멑파크침례교회 목사가 되고나서도, 리처드는 계속 전도사역을 했다. 


그후 댈러스 북부의 한 소형 교회(현 프레스턴우드침례교회)가 그를 불렀다. 당시 교인수 75명이었다. 아내 앤과 함께 적극 사역에 참여했는데, 이후 12년간 6000명 규모로 불어났다. 1978년엔 이 교회 첫 공식 음악목회자로 200-300명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음악컨서버토리, 어린이/청소년 찬양대 등을 창설하고 연3회 음악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등의 '기적'을 일궜다. 그는 복음과 함께 탁월성과 창의성으로 음악사역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쟄 그래엄 목사가 사역하는 프레스턴우드 교회가 현재(>)는 3곳에 모두 3,3000명의 교인을 둔 미국에서 "최고속 성장" 교회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 물론 실성장 요인이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음악사역을 통한 성장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1992년엔 다시 전도음악 사역자로 돌아와 2007년까지 활약했다. 


베이커는 그밖에 이 찬송가를 첫 출판한 크리센도 뮤짘 출판사의 부사장, 세계전도(WE)의 음악 코디네이터를 역임했다. 

그는 시편 28'7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후손으로서는 아들 부부 및 딸들 부부와 교계나 사회의 명사인 여러 손자/외손자들이 있다.

관련 사이트: www.HisWayMine.com 

  




참고자료 2: 연주를 위한 노트


이 찬송가는 본래 전도용 회중 노래로 적합하다. 화음이 매우 아름다워서, 혼성합창으로 부르는 것이 이상적이고 효과적이다. 바꿔 말해, 이 곡의 생명은 그 어떤 요소보다 화음이며, 따라서 화음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거의 무의미하다. 그 '생명줄'을 테너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부 합창의 경우, 이 작품의 화성적 라인을 전체적으로 주도하고 좌우하는 (첫째, 둘째, 넷째 줄의) 테너 파트의 반음계 하강 진행에 강세를 두고 섬세하게 훈련시켜야 좋다. 그렇다고 물론 알토 파트에 가끔 나타나는 F, C음 등 경과/선타적 비협화음도 무시해선 안된다. 또 테너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소프라노보다 음량이 커서도 안 좋다. 그리고 베이스 라인은 부르기가 쉽기 때문에 은은하고도 무게 있게, 부드럽게 처리를 해 주면 된다. 


주된 멜로디는 별 기복이 없으나, 순차진행 부분을 절에 따라 크레센도/디크레센도로 살려주면 좋고(그러나 비슷한 멜로디를 매번 다 그렇게 하면 맛깔스럽지 않다), 셋째 줄인 후렴의 고조된 부분에 음악적 생명을 불어넣어 최대한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셋째 줄 전체를 포르테로 부르기를 권한다. '죽으신 주님' 뒷 부분에서 소리를 대폭 줄여, 끝줄에서 다시 점점 키우든지 작은 대로 끝 맺는 것도 무난하다. 


제 2절(또는 3절)의 앞 부분은 변화 있게, 가사를 똑똑히, 의식적으로 또박또박 articulate해서 부르든가 약간씩 테누토해 주거나 템포 루바토로 끌면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경우 예컨대 '세상의 모든 것,| ...' 하고 약간씩 쉬었다가 진행하는 "끊었다 잇기" 식으로 하면 그럴싸한 가사 표현이 된다. 그러나 모음과 자음 발음은 철저히 제대로 해 주되, 효과를 위해 모음을 순간처리할 수도 있다.  

2절은 남성만 멜로디를 부르거나 거기 더하여 여성이 테너 라인을 허밍 또는 모음제창으로 레가토 처리하여 부르면 효과적이다. 또는 '합창반주'(허밍 또는 모음 합창을 배경으로 삼음)를 하는 동시에 누군가 가사를 낭송해도 좋겠다. 


이 찬송가는 3박 젓기보다는 속도를 약간 빨리 하여 느린 2박타로 연주하는 것이 더 좋다. 완전 프레이징을 위해서다. 화성적 분위기가 자못 현대적인 곡이므로, 3박타는 너무 느려서 현대의 젊은 회중에겐 걸맞지 않다.  


요즘 예배시간의 압박감 탓인지 이런 3절짜리 찬송가의 경우, 1, 2절을 후렴 전까지 이어서 부르고, 3절로 가는 방식으로 하는 연주가 잦은데, 좀 짧고 성의 없는 인상이 들 수 있다. 그렇다고 전조를 하지 않고 3절까지 똑 같은 방식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3절까지 모두 부르되, 변화를 주는 것이 좋다. 


참고로, 이 곡은 베이스의 최저음이 Bb로, 좀 높기 때문에 전조를 하는 경우 베이스 음 일부를 좀 더 낮게 편곡하거나 반주의 저음부를 강화해야 좋다. 


이 곡의 효과 있는 연주를 위한 한 가지 팊을 제시하면..


   1절: 원곡대로 합창

   2절: a. 합창으로 가사를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자주 끊어 부르기, b. 또는 독창 또는 (가사)낭송 및 허밍/모음(아/오/우) 합창. 단, 후렴 첫 줄만은 원곡대로 한다. (a의 경우, '소유한다고 해도'의 '-도'를 너무 길게 늘이면 효과가 절감됨)

   간주: E 또는 F 장조로 전조

   3절: 첫 줄은 여성 또는 남성이 제창, 둘째 줄은 반대로 바꿔 부르기. 후렴은 원곡대로 하되, 끝줄에서 고조시키기를 해 본다. (예: '주저하고 있느냐'의 '-느냐'의 멜로디를 하이 F-Eb 진행으로 올려본다. 또 괜찮다면, 가락 끝 부분(사랑의 주께로 오라)을 1옼타브 높여 부르면서 간단히 필요한 편곡을 한다. 


   기타: 전주를, 합창 허밍을 배경으로 짤막한 전도초청 관련 성구를 낭독하여 처리해도 좋다. 




참고자료 3: 연주사례 평가


아래에 이 찬송가의 실연주 사례를 다뤄 본다. 



합창 예1: >


아마도 일반 교우들이 익히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내 놓은 상업성(?) 연주 같은데, 전체 화음은 양호하나 너무 밋밋한 연주이다. '합창예술'이라고 하기엔 20세기적인 현대미도, 21세기적인 생동감도 적다. 다이내믹스마저도 거의 없다. 

한국 교계에서는 대체로 1~3절을 모두 전조 없이 연주하는 것이 보통인데, 제3절 정도는 E 또는 F 장조로 효과적으로 전조하여 극적인 절정을 이루는 것이 좋다. 그리고 회중 찬송가를 오르간도 아닌 피아노로 4부 합창곡 그대로 '반주'한다는 것은 비음악적이고 완전 넌센스에 가깝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반주 합창이 더 낫다. 적어도 피아노를 쓴다면 피아노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반주편곡이 필요하다. 



합창 예2 >


녹음 위치 때문(?)인지 전체 규모에 비해 테너는 강하고 베이스가 약한데도, 테너는 처음부터 불안하고, 베이스는 대체로 안정돼 있다. 테너 라인은 시종 음이 떨어지며 소리가 목에 걸친 성향이 강하다. 물론 이 곡의 베이스 라인은 부르기가 훨씬 더 쉽다. 

주로 호흡난 탓이다. 일부 소리의 특징이 두드러진 음질의 대원은 훈련으로 음조/음량/음색/음질/발성 등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테너는 숨이 차서 뒤로 갈수록 음이 플랱되고 있다. 물론 훈련 부족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수는 많아도, 좀 더 윤택한 소리와 부피 있는 음량, 알찬 공명이 아쉽다.   


합창은 "여럿이 합해서 부르는 노래'답게 뒤로 갈수록 "강인하고"도 정제된 마무리가 필요한데, 호흡난 탓에 아쉽게도 힘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왕 할 바엔 좀 더 인상적인 합창이 되도록 노력해야 바람직하다.  


호흡이 짧아 '우리 주 십자가' 부분에서 매번 끊기고 마는데, 속도를 약간 빨리 해서라도 '..고난 당하실 때에'까지 이어 주는 프레이징이 합창으로서는 더 프로페셔널하게 들리고 이상적이다. 물론 일반 회중은 그렇게 부르기가 힘들다. 

그건 그렇더라도, 후렴에서 역시 호흡난 탓이지만 '우리 위해 죽(으신)~'하고 한 낱말 도중에 끊어버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이 성가대에 절대 필요한 것은 복식호흡 등 호흡훈련이다. 


이 곡에서 전반적으로 호흡에 유의해야 하는 부분은 첫째 둘째 줄 프레이즈 끝의 1박, 4분음(예: 1절 '.. 때에'의 '에')이다. 이것을 숨이 턱 막힌 듯 끊지 말고, 여유 있게 테누토 하듯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독창 예: >


이 곡은 반주만 좋다면, 독창용으로도 괜찮다. 그런데 위, 테너 C 교수의 연주 동영상은 독창다운 표현은 풍부한 편이지만, 테너 곡으로서는 조가 너무 낮아선지 고음에서 충분하게 탄력있는 음색이 반영되지 못했다. 또 (녹음자의 위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노래 자체는 너무 작게, 반주는 너무 크게 들린다.). 그리고 뒤의 오르간 역시 은은하고 장엄한 소리로 독창 반주에 활용됐더라면 금상첨화 격일 텐데 아쉽다. 



오르간 연주 예 


예1 > (전곡을 들으려면 회원가입 필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악목사가 연주한 곡으로 오르간의 특징인 음색에 있어 대체로 생동감과 힘이 넘친다. 그러나 뒷 부분이 좀 더 화려하고 화성적인 변주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점에서 미국식 연주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예2 >

그러나 위의 예2는 21세기로서는 너무 느리고, 템포 루바토도 아닌데도 속도가 불안하며, 별 생기도 없는 키보드 연주이다. 



기타

사족인지 모르나 다음 동영상을 보면 명백히 이단에 속한 모 교회가 이 찬송가를 맘대로 사용하는데, 과연 저작권/판권법 저촉 문제가 없는지..?

http://www.youtube.com/watch?v=Z9ThAmvUbvk 



필자: 작곡편곡가, 합창클리니션, 음악평론가, 언론인, 블로거/웹선교사(티엘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