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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기억하소서 주여


김삼



   '기억하소서 주여 ( Call to Remembrance )...'


연말을 지내고 연시를 맞으면서 특별히 이 성가곡이 기억났습니다. 젊은 세대는 리처드 파랜트(Richard Farrant)의 이 곡을 얼마나 아는지 모르지만, 과거 한국교회 성가대를 통해 퍽 많이 애창되던 곡이죠. 

우선 어떤 곡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죠.


연주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BuwkJ5gvCOc

http://www.facebook.com/video/video.php?v=10150551659275468

http://www.frequency.com/video/call-to-remembrance-by-richard-farrant/35990274

http://youtu.be/827wNm9x7ug

http://youtu.be/ZzTo8ZMLXHk


악보: 몇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다음은 오리지널 버전으로 현대적으로 기보한 것입니다. 

http://www0.cpdl.org/wiki/images/b/b8/Farrant_-_Call_to_remembrance.pdf


오리지널보다 장2도 높게 옮긴 악보

http://www1.cpdl.org/wiki/images/sheet/farr-ca1.pdf


다음은 박자표도 다르지만 위보다 단3도 높게 조옮김한, 현대 교회에서 가장 자주 쓰여온 버전입니다. 

http://www3.cpdl.org/wiki/images/sheet/farr-cal.pdf


아래는 한국교회에서 주로 사용돼온 버전입니다. 좀 더 가락적으로 맛깔스럽게 원곡을 누군가 편곡한 것입니다. 한글 가사도 원 가사인 시편 성구와는 다소 다릅니다. 

(아래쪽으로 스크롤다운하면 한글 악보 의 일부가 보임.)

http://www.akbotong.com/home/view.htm?sitemusic_no=MS07C18A006


무반주 다성부(폴리포닠) 합창인데도 곡이 아쉬울 정도로 짧아서 별 부담이 없고 다성부 연습용으로도 좋습니다. [ 곡이 너무 짧아 아쉽다면 한 가지 아이디어로, 맨 끝에서부터 3번째 또는 7번째 마디의 끝 장음을 페르마타로 처리한 뒤,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는 '편법'이 있음. 연주 예: > ]


이 곡을 연주할 때는 비록 단음계이더라도 애상적 감정에 빠지지 말고 시계 바늘 돌아가듯,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정확하고 투명하게 부르는 것이 듣기에 더 낫고, 서로 다른 음높낮이 사이의 촌스런 '스키 타기'(음악용어로 "포르타멘토"라고 하는 것^^)는 금물입니다. 애상적 감정은 되도록 청중에게 맡겨야 합니다. 연주 속도는 다양하지만, 아무래도 현대인 지금은 좀 더 빨리 부르는 게 더 정서적으로 맞지 않나 싶군요. 


사실 이 성가는 16세기의, 매우 오래된 곡입니다. 중세 곡으로선 비교적 현대적이며 다소 센티멘탈하고도 호소성이 강하지요. 이 점은 작곡가 리처드 파랜트가 어린이 악극 감독이었다는 점과도 통합니다. 그의 작품들과 생애에 관해서는 글 맨 아래에 참고 박스로 추가했습니다.  



가사: 시 25:6~7


저는 이 곡의 가사에 눈길이 더 갑니다. 구약 시편 제 25편 6,7절을 가사로 하고 있습니다(성가곡에 '5. 6절'로 기재된 것은 영국 국교회 기도서에 편집된 성구이기 때문). 거의 성경 그대로인 이 가사를 히브리어 원시에 좀 더 충실하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하소서, 오 예호봐(여호와)님,

    예로부터 있어온 님의 온정과 사랑을!

    내 소싯적 죄악과 잘못은 기억하지 마시고

    님의 사랑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님의 선하심을 위하여!

 


우선 이 시구의 특이한 점은 기억하소서, 기억하지 마소서, 기억하소서가 번복된 점입니다. 약간 구약적인 기도인 것은 사실입니다. 현재 (거듭난) 신약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과 성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온정과 사랑과 선이 영원하다(!)는 진리이죠. 이 분이 바로 보혜사(=위로자),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 영감 받은 다뷔드(다윗) 왕의 작품인 이 시편 전체도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이 구절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바 많습니다. 


다뷔드는 하나님께 질문도 자주 했지만(참고글: >) , 그는 하나님께 뭔가 상기시켜 드리기도 자주 했습니다. 시편 도처에 그가 하나님께 이런저런 것들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기!-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도원리 내지 기도 정신의 하나라는 것이죠. 우리는 얼핏, "아니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그렇게 할 수가..?" 하기가 쉽지요. 

좀 쉽게 풀어서..아마도 우리는 자칫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시고 따라서 당연히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도대체 그분께 우리가 뭘 감히 기억하시라고, 그 분에게 우리가 뭘 상기시켜 드린다는 말인가? 헐~! 그분이 영원 전부터 오래 살아계시다 보니 기억력이 감퇴되셨다거나 잊어버리신 것도 아닐 텐데, 이런 기도가 뭐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시인이 '기억하소서'라고 되풀이하여 간청하는 호소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새삼 그 분의 약속을 다시 떠올리기를 간구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분주한 사장님이 뭔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곁에서 비서가 이것저것 챙겨 드리듯 그렇게 하나님께 챙겨드리려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결코 깜박 잊어버리시거나 건망증 내지 기억상실이 되실 리가 없지만, 이 시인/기도자는 그 분의 약속과 신실성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다시 한 번 떠올려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정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무턱대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고백하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일깨우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때 우리 속 깊이 그 분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십니다(예: 요한복음서 15'7).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 때, 우리는 무엇이든 간구할 수 있다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무엇을 놓고 간구할 때 거기 해당하는 적절한 성구를 우리 속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분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나 기타 교파의 관상영성에서의, 의식적인 소위 '렉시오(렉티오/렉치오) 디비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우리 기도와 간구의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 속에 머물게 해야 좋습니다. 


구약 시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 상기시켜드리는 기도를 자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됐거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기도가 아니라 슬기로운 기도 방법임을 우리는 다뷔드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시인은 무엇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당신의 온정(라하메카<라함)과 사랑(하사데카<헤세드)을 기억하시라고 탄원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간구할 때 늘 하나님의 온정(mercy/compassion)과 사랑(구약에서 흔히 인애/인자=lovingkindness로 표현됨)을 강조하곤 합니다. 왜냐 하면 라함과 헤세드는 인간에게 표현하시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하향성(下向性) 성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아랫것들인 우리 인간을 불쌍하게, 가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대하고 선한 마음이고, 후자는 조건 없이 늘 상냥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보살피시고 돌봐주시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온정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은 아주 예전에 다 말갛게 멸망 당했을 겁니다(헉~!). 마치 노아 홍수 때 지구인들처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은 그 분이 바로 온정과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어떤 신화나 종교의 어떤 신도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다들 무자비하고 무심하고 정욕적인 '신'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마구 죽여도 좋고 크리스천 여성들을 강간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치는(?) 회교의 알라는 대표적으로 무자비한 신 같습니다. 

오직 성경의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참 온정과 사랑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흔히 어르신과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짜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높은 분이 없기에 언제나 오직 아래로 사랑을 베푸실 뿐이기 때문이죠. 

성경에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단 말이 없습니다. 그분은 아드님이신 독생자 성자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분이 구원하시려고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신 인생들을 사랑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 내리사랑이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두 성품을 잘 깨달아 알고 기억하여 기도할 때마다 라함과 헤세드가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상기시켜 드려야 좋습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슬퍼하시고 진노하시고 쳐 죽여야 마땅하시지만 그 대신 불쌍히 여겨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고 그 사랑을 닮은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영적인 열매로서 우리 삶 속에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인은 기억해 주시라고 간구하다가 이번엔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도 호소합니다. 아니 기억해 달라고 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또 뭘 기억하지 마시라고 구할까요? 자기 소싯적 곧 어릴 적 또는 젊을 적 죄악을 기억하시지 말아 달라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십자가 공로와 보혈로 지금까지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씻겨 주실 때, 우리의 지난 죄를 다 잊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사람처럼 두 가지-잊기와 기억하기-를 다 하십니다. 잊을 것은 잊으시고, 기억하실 것은 기억하신다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죄를 낱낱이 기억하셔서 "꽁쳐" 두셨다가 우리에게 매일매시 추궁하신다면, 우리의 두려움이 어떠할까요? 간이 콩알만해져서 맨날 얼굴이 노랗게 뜨기만 하다가 끝내는 일찌감치 세상을 뜨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염려는 놓읍시다! 우리가 뉘우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우리 죄악과 죄과를 동이 서에서 멀듯 그렇게, 모두 그분의 등 뒤로 돌리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시 103'10,12, 참고: 예샤야후=이사야 38'17, 미카 7'19).

 

그러고 보니, 시편 제 103편 8~14 말씀도 참으로 은혜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온정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더디 노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시며, 

   자주 책망하지 않으시고

   노를 언제나 품고 계시진 않고요

   우리의 죄악를 따라 일일이 처벌하시지 않고

   우리의 죄과대로 갚지 않으신다


..고 고백하고 있거든요. 

이래도 하나님은 잔인하신가요??? 


더욱이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듯 그렇게, 특히 그분을 두려워 섬기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까닭은 그 분이 손수 지으신 인간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이죠. 알고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인생은 들꽃이나 안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온정과 사랑을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십니다. 언제나, 영원히 그렇습니다(시103'17). 


이렇게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사랑이신 스스로를 보이시고 약속하셨는데, 사람이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한 공의의 신일 뿐이라고 하는 스베덴보리나 헬렌 켈러 같은 사람들의 주장은 다 엄청난 착각이고 허상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고, 더 나아가 성경을 조롱하고 업신여긴 것입니다. 죽은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지난 날의 죄악을 자꾸만 반복하거나 거듭 기억할 때, 하나님 앞에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를 경시하거나 만홀히 여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소싯적, 젊은 날의 죄악과 악습은 회개하고 난 직후 빨리 잊고 끊을수록 좋습니다. 



그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기억하시되 그 분의 선을 위하여 그렇게 해 주시라고.


구약인의 기도로서는 매우 바람직하고 당연한 기도이죠. 그런데 오늘날 땅에 내리신 성령님은 거듭난 우리 속에서 몸소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아무튼 구약 시인이 자신을 기억해 주시라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평소 우리를 기억하지 않으셔서가 아니지요.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더 잘 기억하십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빼 놓치 않고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나를, 우리를 기억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언약/약속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비롯한 하나님의 수많은 언약들이 있지만, 나 자신이 언약의 수혜자로 거기 포함돼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내겐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곁에 함께 매달렸던 강도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딴 강도와 함께 주님을 욕하다가 나중에 뉘우친 그가 주님께 탄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 (루카복음서=눅 23'42) 


하지 않았나요? 그때 주님께서는 뭐라 답하셨나요? 


   "내가 참으로 참으로 그대에게 말하오만, 그대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오."


심지어 반 평생을 주로(?) 강도질을 하면서 살아온 무뢰한조차도 이렇게 주님의 구원의 언약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인 누구나 이렇게 뉘우치고 주님께 "저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부르짖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그렇게 부르짖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든 얼마든지(!) 부르시더라도(참고: 행전 2'59), 정작 부르심에 응할 개인의 자의지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죠. 

또한 성령님은 우리 신자 각 사람을 언약의 수혜자들로 삼으시고 여태 붙들고 계십니다. 이 확신이 흐릿해지고 약해질 때마다 우리는 "주님,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기억하시되 사랑에 따라 기억해 주시라고, 또한 주님의 선을 위하여 그리하시라고. 이것은 우리 누구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같은 시인은 시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선하심과 사랑이 내가 사는 모든 날 동안 날 따를 테니 

   내가 예호봐(여호와)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 



이처럼 다뷔드 시인은 주님의 선과 사랑을 언제나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 선과 사랑 없이 우리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올 한 해도, 주님은 그 분의 온정과 선과 사랑 속에 우리를 늘 기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작곡자: 리처드 파랜트 (Richard Farrant) 


김삼


성공회 작곡가였던 이 사람에 대해선 자료가 매우 희박하여, 아직 구체적인 검증을 거치지 못했지만 대강 생애와 작품들을 소개해 본다. 


중세인 1530년(?)경에 태어나 50대초인 1585년(1580,81년 설도 있음)에 죽은, 영국 궁정과 교계의 작곡가/연주가/악극감독/희곡작가였던 사람. '검은수사들'(Blackfriars) 수도원을 어린이악극 극장으로 개조한 장본인이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파랜트의 삶은 역사 기록에 극히 일부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처음엔 에드워드 6세와 메리 튜더의 궁정 합창단 단원으로 있다가 윈저 궁 교회당인 '채플로열'의 악장으로 지내면서 작곡과 연주를 한다. [ 에드워드 6세는 제네바의 개혁가 칼뱅과 동시대 사람으로 칼뱅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고, 칼뱅은 그의 '기독교강요'에다 이 군주에 대한 헌사를 곁들이기도 했음.] 

1564년에는 직책을 사임하고 성 조지 채플의 오르가니스트 겸 성가대장/지휘자로 있으면서 1567년 슈로브타이드('재의수요일'전 사흘간) 때와 '성 요한 축전' 때 (엘리저벹 1세) 여왕 앞에 악극을 공연하기도 해다. 1576년에는 채플 로열 어린이 악장인 윌리엄 허니스의 부악장으로 있으면서 같은 해에 '검은수사들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파랜트는 종교음악도 썼지만, 궁정을 위한 세속 합주음악 등도 썼다. 또 매년 겨울 궁에 머무는 왕후를 위한 악극을 썼는데 다 사라지고 현재는 제목들('아이아스(Ajax)', '율리세스', '퀸투스 파비우스', '아하수에로 왕'/King Xerxes..등)만 남아있다. 악극 중 실제 노래는 '아이아스' 중 한 곡, '판테아' 중 1곡 등 2개 독창곡이 남아있을 뿐이다. 


파랜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짧은 의식 합창곡인 '기억하소서', '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등 성가곡들인데, 이 곡은 당대에 출현한 최초의 악절성가합창곡(verse anthem)의 하나로서 단순악절이 시의 문구와 거의 일치되게 독창>합창 등으로 되풀이하여 진행한다. 아울러 파토스(pathos, 감성/애절감) 표현과 조성 등에 있어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아, 현대적 합창곡을 향한 고무적인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그의 의식곡중 하나인 '마그니피카트 및 눙크 디미티스'(Maginificat and Nunc Dimitis) 등은 음악학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을지 모르나, 역시 현대적 의식곡/미사 전례에 어떤 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성가곡 일부는 당대의 '존 힐턴'이나 성이 같은 '존 파랜트'(들)의 작품으로 혼동되기도 한다. 가령 회개에 관한, 아멘이 곁들여진 매우 아름다운 합창곡인 '주님 님의 다정한 온정으로(Lord, for thy tender mercy's sake)'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동시에 존 힐턴의 작품일 가능성도 있다. 한 때는 심지어 토마스 탈리스의 작품으로 오인받기도 했다. 


파랜트에 관한 추가적인 것은 다음 자료도 참조하기 바란다.


관련도서

http://scissurl.com/2/ki9


Magnificat and Nunc Dimittis 악보: (악보 아래 화살표를 누르면 노래가 흘러가면서 악보도 진행됨. 악보가 확대되지는 않음)

http://www.notamos.co.uk/145315.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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