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고 속에 영접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 다음은 신앙의 성숙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어린이가 갓 태어나면, 열심히 젖을 먹기도 하고 코코 자기도 하고, 앙앙 울어대며 부모의 관심을 북돋우고, 옹알이도 하고 아장아장 걸으면서 부모를 기쁘게도 하면서 열심히 자라나는 것처럼, 갓 거듭난 신자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께 속삭이듯 간구도 하고 주님을 찬양하면서 점점 성장해야 합니다.
크리스토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갓 태어나 열심으로 믿는 듯 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성장이 둔화되고 성숙이 정체된 듯한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 생활의 틀이 잡히면서도 어느새 습관이 붙고 타성에 젖어 이른 바 '종교생활'으로 변질돼 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흔히 '종교생활'은 수동적인 신자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수동적이라면, 신앙생활을 자신이 적극 꾸려 나가기 보다는 남의 손에 맡기는 듯한 자세이지요. 이것은 믿음의 실천 과정 초입에서 나타나기 쉽습니다. 또 이미 성숙한 신자를 바라 보다가 자의식 때문에 작은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기에겐 이 세상이 온통 신나는 모험과 흥미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조금만 힘이 생기고 자라나도 방안을 온통 누비며 발발 기어 다니기도 하고 장난감이나 가구 등 눈에 띄고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탐험합니다.
그런데 수동적으로 엄마가 물려주는 젖이나 먹고 울지도 놀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모험이고 무엇이 신이 납니까? 그런 수동적인 아기는 병든 것이지 건강한 아기는 아닙니다.
거듭난 우리는 건강한 아기처럼 말씀을 믿음과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신앙적인 모험 생활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세계를 탐험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자임하고 나면, 신앙의 실천이 거의 멎어 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려 하나님의 책임으로 '일임'하고 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돼어 갈 줄 믿는 것입니다.
그건 수동적 믿음이지 능동적인 믿음이라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신자에게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어렵지요. 그런 교인들은 교회에서도 적극적인 참여자 보다는 단순한 '관객'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한 애독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지속적인 방언기도가 그 분의 신앙 성숙을 북돋운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물론입니다! 방언기도를 계속함은 성경 말씀 실천의 한 방법입니다.
파울은 코린토 14장에서 분명히 이 점을 밝힙니다. 방언이 '덕 세우기'(建德, edification)라는 개념은 다소 헬라/그리스 철학적입니다. 실제로 그리스어 원문 해설에 '덕'이라는 개념이 없지 않지만 지속적인 방언 실천이 단지 덕 쌓기 차원의 정도가 아닙니다.
방언은 바로 믿음 쌓기 신앙의 빌드엎에 도움이 됩니다! 비유컨대 믿음의 근육단련(fitness)에 도움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수많은 남녀가 근육미 키우기와 다듬기로 '몸짱'을 만들어 가는데..성도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근육을 키워 '영짱'이 돼 갈 수 있습니다. 말씀 실천으로도 물론이고 지속적인 방언기도로도 그렇게 합니다.
사도 파울은 분명히 단순한 '덕 세우기' 차원이 아니라 믿음 기르기의 차원에서도 방언은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원문 상으로 드러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으앙!' 하고 새로 태어나 막 시작되고 향상돼 나가야 할 성숙이 신나고 힘찬 신앙의 모험생활이 아니라 습관적이고 피동적인 종교생활 차원에 머문다면 성숙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영적인 근육미의 '영짱'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눈으로 읽고 접어 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음미할 뿐더러,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매일 삶 속에서
영/혼/육의 모든 분야에 실천해 나갈 때,
믿음의 근육이 불어나게 됩니다.
그래야 모험스럽고 힘차고 발랄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냥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매주 강단에서 들려 오는 듣기 좋은 말을 듣기만 하고
찬양대에서 들려 오는 달콤한 음악을 듣기만 하고
나머지 시간과 관심은 세상의 이런저런 것에다 바쳐 가며
늘 수동적인 자세로 참여하고 관망만 한다면,
믿음의 성숙이 잘 될 리가 만무하지요.
주님은 분명히, 믿는 사람들에겐 맑 16:17,18과 같은 표징이 따른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어 보는 게 손해가 아니지요!
그렇다고 일부러 독사를 집고 독극물을 마시란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믿음으로 극복하라는 뜻이지요.
믿음과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변에 슬며시 다가오거나 몸과 혼에 수시로 침입하려는 악령도 내쫓고!..
믿음과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방언도 말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기도 하고!..
믿음과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독사를 물리치거나 혹 실수로 물려도 몸에서 독을 내쫓기도 하고!..
부지 중 독극물을 마셨거나 알게 모르게 저주의 '독'으로 습격 당했을 때도 믿음과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믿음과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집안 안팎의 환자에게 손을 얹고 병을 물리치기도 하고!..
이런 믿음의 훈련을 자꾸 해 봐야 모험적 신앙이 자라고 믿음의 근육이 불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과 똑 같은 믿음의 분량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믿음의 선포를 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믿음으로,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실로 창조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넘쳐, 예수 이름으로, 믿음으로 선언하고 영혼을 살려내고 몸도 살리고..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려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을 바에야 예수님을 왜 믿는 것이며..
타 종교와 별 다름 없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종교생활'이나 할 바에야,
왜 당초 애써 부르짖어 구원 받고 거듭난 것입니까?
구원 받고 거듭난 바로 그 믿음으로
방언도 하고,
은사도 받아 누리고,
날마다 믿음의 실천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영들에 대한 검증도 해야지요.
성경대로의 믿음의 실천은 아무 것도 또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맨날 남에 대한 비평과 검증에만 그친다면,
사실 그것도 올바른 자세는 아니지요.
티엘티 독자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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