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살펴 보시는 분이 성령님의 생각이 어떤지를 아십니다. 성령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중재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신서 8:26,27 사역)
불꽃처럼 밝게
바람처럼 맑게
햇빛처럼 따뜻하게
주 성령님 내게 오사..
젊은 시절 불렀던, 아름답던 현대적 찬양곡 가사의 앞 부분 일부입니다. 성령강림절 기념 성가로 기억됩니다. 가사가 전반적으로 그럴 듯 하긴 하나 당시 영문 원시를 보지 못했던 저로선 원문대로 또는 성경대로, 제대로 성령님을 묘사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아름답게 수식한다고 다 성령님을 제대로 묘사한다곤 할 수 없겠지요.
성령님은 성경대로 신자를 거듭나게 하고
불로써 죄악과 죄성을 태워 변화시키고
방언하게 하시고
권능과 은사를 주시고
성도를 위한 도움기도('중보기도')를 하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 성화시키십니다.
궁극적인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다들 아는 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동시에 성자(聖子) 하나님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주님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로마 10:9,10) 예수 크리스토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내 속에 모셔 들이면, 나의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새 창조물이 됩니다(코린토B 5:17). 성령님이 내주(內住: 안에 머무심, dwell in)하시기 때문이지요(코린토A 6:19).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한복음 4:24). 사람이 하나님을 눈으로 뵐 수가 없습니다(요복 1:18, 요한서신A 4:14). 그런데 눈에 뵈지 않던 하나님을 사람이 뵐 수 있게끔 오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시지요.
성자님은 곧 성부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귀띔해 줍니다(콜로세 1:15, 히브리 1:3).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하늘땅을 자주 오르내리셨습니다(잠 30:4).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시곤 했습니다(창 18:1,2). 손수 빚으시고 영을 불어 넣어 지으신 사람과 가깝게 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아직 온전히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천사와 방불한 모습이었죠(창 18:16,17, 32:24-30 참조).
[ 우리가 아는 대로 천사는 인간을 짓기 훨씬 전 천상계의 창조 당시 만들어진 영물입니다. 천사 역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존재입니다만 성령님이 영안을 열어 주실 때에 한하여 영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왕들B=왕하 6:17). 천사들의 형상은 인간과도 비슷합니다. 다수는 '두 날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그룹(group)의 천사들인 케루빔(cherubim, 단수: cherub. 한글성경 표기 '그룹' 천사들)이나 세라핌(seraphim, 한글표기 '스랍')을 볼 때 천사가 모두 단순한 모습은 아닐 수 있음을 느낍니다. 많은 날개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이사야 6:2, 계4:8).]
그렇다면, 천사나 사람이나 어떤 일정한 형상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사와는 또 다른 영물입니다(시 8:5).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창 1:26,27). 물론 하나님의 형상인 성자님을 닮은 존재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동물에는 없는 생기를 사람의 코에다 숨으로 불어 넣으셨습니다(창 2:7). 이 숨(히브리어 '네샤마')은 바람(히브리어 '루앟')과도 통하는 낱말입니다.
여기서, 왜 성령님이 바람으로 비유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요 3:8, 행 2:2). 바람의 가장 큰 특징은 눈에 띄지 않아서 그 향방을 모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인간의 영도 눈에 띄지 않지만 존재하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시각을 비롯한 몸의 감각에 의존하는 특성이 있어서 모든 것을 눈과 감각으로 확인하려 듭니다..마는 사람의 영은 몸보다 더 리얼한 실존입니다. 사람의 참 존재는 겉사람인 몸과 혼이 아닌 속사람(코B 4:16, 롬 7:22, 엪 3:16) 즉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혼을 지니고, 집인 몸 속에 살아 갑니다(페트로B 1:14b).
사람들은 철학자들을 위대한 성인으로 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탁월한 현인이더라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악으로 인해 영이 죽은 존재에 불과합니다(에제키엘=에스겔 18:4). 성경에 의한다면, 부따인 가우타마 시타르타 샤카무니(석가)나 콩푸지(공자), 소크라테스, 무함마드 등이 모두 죽은 영들에 불과했습니다.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속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코B 5:17). 성령님을 모셔 들여 늘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부/성자님의 영이시자 (영이신) 하나님 곧 성령님을 잘 모르기가 일쑤이며 그분에 대해 무지와 실수를 범하는 때가 잦습니다. 큰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이것은 우리가 영보다는 몸과 정신에 치중하는 거듭나기 전의 옛 성향이 있어 성령님께 대하여 밝지 못한 탓입니다.
[ 많은 신자들이 예수 크리스토와 명사들의 차원과 '위대성'을 혼동하는 까닭도 바로 그 탓이지요. 조지 W. 부쉬 같은 사람은 거듭났다고 자임하나 세속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철학자' 정도로 시인한 바 있습니다. 참 신앙고백이라기보다 정치 공정성 발언으로 느껴집니다. 사실 대다수 정치인들이 대동소이한 말을 하곤 합니다. 그들은 예수 크리스토가 인류의 유일한 구주시며 주님이심을 시인하기를 꺼리고 부끄러워 합니다. 기독교를 많은 '종교'들의 하나로 여기며, 기도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을 생략하기가 일쑤입니다. 프리메이슨들과도 일치한 성향이지요. 과연 성령님을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인지 의혹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모신 사람들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그분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끄러워 하는 만큼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 하십니다(루카복음서 9:26).
성령님을 속에 모신 사람들은 육적/혼적이기에 앞서 영적인 사람들이므로 감각/생각 등 자연적 방편이 아닌 초자연적 방편을 통해 성령님을 바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코A 2:10-15).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적' 방편이란 타락한 영물인 마귀나 그 종들이 나타내는 초자연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신자들이 성령님의 초자연과 마귀의 초자연을 혼동하곤 합니다. 올바른 검증이 아니지요.
이런 혼동이 어디서 올까요? 말씀에 대하여, 영에 대하여 밝지 못한 탓입니다. 바꿔 말하면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민감은 오로지, 영이신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방편으로 계속 사귀고 성령님이 친히 쓰신 기록 문서인 성경 말씀을 계속 내 영에 머물게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콜 3:16, 요복 15:7a의 표현을 살필 것).
오순절 이후 모든 신자에게 방언을 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신자들!)에게 따르는 표징들의 하나로 새 방언을 열거, 예언하셨고 그 예언이 오순절에 성취됐습니다(마르쿠스복음서 16:17a. 비교 행 2:4b).
오늘날 선교한다는 사람들 다수가 행전 1:8만 '대명'(大命, the Great Commission)이라며 그것 하나만 붙들고 선교지로 냅다 뛰는 성향이 있는데..그 대명조차도 '(성령의) 권능을 받고'란 전제가 딸려 있습니다. 권능이 도대체 뭐기에?
대명이라면, 주님의 제1계명인 사랑 계명도 포함되며, 복음서 뒷 부분에 있는 말씀- 주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모든 말씀들이 다 대명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도 대명이지요. 성령님의 권능은 능력과 은사, 방언 등 초자연적인 도구들입니다. 거기엔 당연히 맑 16:17이 포함되죠.
우리는 주님께서 맑 16:17-18 대명에다 새 방언 이외에 다른 은사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 나타난 5 표징들 중 나머지 넷이 '은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성령의 9은사(코A 12:4-11)엔 믿음은사와 권능은사, 신유은사도 포함돼 있지만,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능과 성령님이 그분 뜻대로 신자마다 달리 선정/분여해 주시는 은사들은 다르지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믿음과 9은사의 하나인 믿음은사는 본질로는 같으나 기능과 성격상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병을 낫거나 치유할 수 있는 신유와 9은사의 하나인 신유은사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모든 신자가 할 수 있게 주어진 방언과 성령님이 따로 선정하여 주시는 9은사의 하나로서의 방언은 다릅니다. 전자는 주로 기도/찬송용으로 쓰이며 상향적 특징을 갖고 있고 통역이 꼭 필요한 건 아닌 반면..후자는 주로 공동체를 위해 주어지며 하향적이고 오로지 성령님이 선정하신 사람에 의하여 뜻하신 때에만 나타나므로, 반드시 통역을 필요로 합니다(코린토 14장 전체 참조).
이 점을 많은 신자들이 혼동하곤 하지요.
성령님의 사역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9열매 맺기 또는 신적인 성품(페트로B 1:4)을 지니게도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께 복종함으로써 가능해 집니다. 인간이 맺으려 힘쓰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한 것이지, 인간 자신의 윤리적 실천 노력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만약 성령님의 열매가 그런 데 그친다면, 알버트 슈바이처, 헨리 나웬, 테레사 수녀 등의 노력도 '성령의 열매'로 불려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지요. 휴머니스트나 예수회 사제, 카톨맄 수녀 등의 말과 사상을 신교에서 무차별 수용하는 작금의 현실은 다행스런 게 아니라 불행한 일입니다. ]
영적이기보다 혼적/심리적/심성적인 명사들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들의 교훈과 사상에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성령님을 모르게 되고 혼동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오로지 성령님의 방법으로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차적인 주 방편이 방언입니다.
티엘티에서 방언을 강조하는 데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게, 제 자신 명사들의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과거에 그랬기 때문이지요.
방언 강조를 싫어하는 성향은 주로 심적/혼적/심리적인 신학체계를 초자연과 혼동하는 영적인 혼동 탓입니다.
또 다른 요인은 성령침례를 갓 받고 나서 성령의 열매가 무르익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내는 단점과 결함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단점과 결함들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지, 특정 그룹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열매가 드러나는데도 저런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 성령의 9은사와 함께 나란히 개인과 공동체로서의 9열매도 병행하는 믿음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요.
그러나 방언은 하나님을 사귀고 그분을 아는 데 기본이요 기초입니다(코A 14:2,14).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 코A 2:10).
방언이 모든 은사들의 관문이고 채널이라고 하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점이 저는 퍽 의아스럽게 여겨집니다. 방언이 아니면 어떤 은사들도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은 오로지 제대로 된 체험자들이 아는 사실입니다.
까닭은 성령침례의 일차적 표징이 언제나 방언이기 때문이지요(행 2, 8-11, 19장 등 참조).
방언을 하지 않으면서 9은사의 일부를 지녔다고 하는 주장은 9은사의 초자연적 특징을 잘 몰라섭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방언을 '꼴찌 은사'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의미는 둘째 치고라도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을 만홀히 여기는 '꼴찌'라는 용어를 함부로 달 수 있을까요? 그러나 존경받는 신학자들도 흔히 남용해온 말의 하나이지요. 왜 그럴까요? 영적이기보다는 심적/혼적인 탓이지요.
신자 누구나 하도록 된 방언은 (성령님의 뜻대로만 나눠 주시는) 9은사의 하나와는 다를 뿐더러, 모든 은사로 가는 바탕이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입니다.
일차적 성령 채우심(Spirit-filling, 한글성경 표기 '성령충만')인 성령침례 때는 반드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표징이 나타납니다. 그것 없이 성령침례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내주(Spirit-indwelling)와 성령침례(Spirit-infilling)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성령내주는 비신자가 믿고 크리스토를 영접하는 순간 가능해집니다.
성령충만은 아무나 되지 않고 오직 이미 믿어 성령님을 모신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방언은 비신자들을 위한 표징이긴 하지만 비신자들은 방언을 못합니다!
성령충만 개념은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오해하듯 일종의 심성적/도덕적/성정적인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우선 일차적인 성령 채우심 자체를 가리키며..이 채우심이 지속되어 성령의 열매도 아울러 나타나는 개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형용사적이기보다 동사적 개념, 자연적이기보다 초자연적인 개념, 심적이기보다 영적 개념이 강합니다.
성령침례 과정이야 말로 일차적 충만이므로 ..
방언은 성령충만의 필수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없이 성령충만 개념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많은 신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와 순차, 코스를 모르는 탓이지요.
많은 신자들이 심적/혼적으로 치우쳐 있기에 행전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9열매나 신적 성품에 관한 계시가 행전보다 훨씬 후기 문서들인 서신서에 나타난 것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물론 성령님이 오시는 그날부터 9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완숙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성령침례를 받아 방언을 시작한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9열매의 완숙 상태를 기대합니다. 자신들은 그러지 못하면서. 방언을 하는 신자가 그렇지 않는 신자를 깔보고 얕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방언을 하지 않는 신자가 방언하는 신자를 질시(=밉게 봄)하는 것도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고요? 성령님이 정하시고 보여 주신 기본 코스를 제대로 밟지 않는 탓이지요.
성령님이 보여 주신 지정 코스란 바로 오순절 이후 행전에 나타난 기록들입니다. 오순절 이후 신자들은 어디서든 먼저 방언을 말하고 찬양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예언도 합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 경우는 할 수 있는데도 본인이 코스를 안 밟고 안 하는 것 뿐이지 남들이나 성령님께 책임이 있는 게 아니지요.
이 지정 코스를 지도자가 가르쳐야 하는데도 자기 설교나 신경 쓰지 초자연적 관심사엔 뒷짐을 지고 있는 게 지도층의 현실입니다. 영적이긴커녕 심적/혼적/심리적인 신학의 영향 탓이지요.
그런데도 지도층이나 신자들은..신학과 신학계는 마귀의 영향을 안 받고 오로지 초자연 세계만 마귀의 영향을 받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습게도 신학은 '성역'이고, 은사계는 거의 '악령계'인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이지요. 아니면 대부분 긴가민가하든가.
마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신자가 초자연계를 알면 알수록 자신에게 불편해지므로 더욱 더 초자연적인 가짜를 갖다가 들입다 부어 주고 초자연적인 것을 이상스럽게 혼동시켜, 초자연적/영적인 사람들을 이상스럽게 보이게 만들거나 실제로 이상하게 뒤틀어 온갖 잡동사니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까닭이 뭘까요..?
신자가 영적으로 밝으면 밝을수록 마귀와 그의 나라는 불편해지고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신학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언은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엉터리 방언이나 방언에 대한 온갖 착각과 혼동, 오해와 편견을 몽땅 갖다 쏟아 부어 줍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지 혼동을 낳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은 질서를 위한 것이지 혼동을 위한 게 아니지요.
방언에 대한 기록인 마르쿠스의 복음서나 루카의 행전, 파울의 코린토 A서 등은 결코결코결코 상호충돌이나 상호모순되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방언자들을 질시하는 이유 한 가지는 반듯한 지상언어, 외국어가 아닌 '탓'에 표면상 너저분(?)하게 보인다는 인상 외에 신학 성향을 중시하는 탓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천하고 약하게 보이는 것들을 강하게 들어 쓰십니다(코A 1:25, 28).
흔히들 상대방의 성령의 열매 부족을 탓하지만 그런 부족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지 완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지요. 방언자들을 헐뜯는 사람들은 헐뜯는 만큼의 열매가 부족한 셈입니다. 헐뜯는 것을 성령님의 열매라곤 할 수 없겠지요.
어린아이가 처음부터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광경을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그거야 말로 비정상이고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어린이는 모두 옹알이로 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랄랄랄라이든 럴럴럴러이든 다다다다이든 옹알이 같은 방언을 시작하고 계속해 나가노라면 하면 할수록, 혀를 폭넓게 활용하면 할수록 점점 더 유연해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방언은 오로지 성령님이 택하신 사람들만이 성령님이 정하신 시간에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방언은사자의 방언도 반드시 성령침례와 그 일차적 표징인 방언을 거친 뒤에야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정해 놓으신 코스입니다.
그런데 신학적 선입견에 밝고 그런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신학의 필터로 거르는 탓에.. 성령님의 코스도 신학으로 이리저리 걸러내고 체질 합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는 상황이지요.
행전에 분명히 명시된 기록들도 이런저런 신학논리로 뒤틀거나 부정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선입견들을 보면..
방언은 외국어다. 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이고, 코린토서신의 방언은 다른 이상한 방언이다.
성숙하지 못한 코린토 교우들이 했기에 그들의 방언도 다 미성숙한 행위다.
방언은 (다) 은사이다. 모든 신자들의 것이 아니다.
방언은 안 해도 되고 해도 된다. 못하거나 안 되면 안하는 게 하나님 뜻이다.
방언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다. 사랑만 있으면 방언도 다른 은사도 다 필요 없다.
방언은 모습도 천해 보이지만 꼴찌은사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행실이 엉망 '개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안 하는 것이 어느 모로나 더 깨끗하다.
방언은 결국 필요악 또는 불요불급한 불필요선이다.
이런 유의 견해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결국 신자가 권능과 은사도, 그 기초요 관문이요 채널인 방언도 모두 못하게 막는 마귀의 뜻을 적극 반영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즉 이런 편견과 선입견들은 신자를 초자연적으로 무력하게, 무장해제 시켜 버리는 마귀의 전법/전략을 돕는 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하게 됩니다.
그런 편견과 선입견과 부정을 말하면 말할수록 결과적으로 덕을 보고 득을 보게 되는 쪽은 마귀이지 하나님 쪽, 교회 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뜻은..신자들과 그 공동체인 교회가 더욱 이런 초자연적, 영적 도구들을 활용하여 하나님 왕국의 확장에 기여하고 마귀의 왕국을 제압하고 막는 데 있지, 크리스토의 몸인 교회 자체를 혼동시키고 서로 반목 질시하게 하고 지리멸렬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방언자들은 미방언자들을 질시하거나 얕잡지 말고, 미방언자들은 방언자들이 왜 방언자인지 자신에게 뭐가 모자란지를 성경으로 확인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더 나은 은사, 더 높은 은사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은 이 모든 것의 바탕이어야지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참된 의미의 검증은 성령침례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오해하지 맙시다.
그분을 알되 바로 압시다.
모든 티엘티 독자들에게
성경을 바로 보는 시각과
슬기..
그리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넘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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