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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따라야 할 성령님의 패턴


김삼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자주 망각하곤 합니다. 그분은 우리들 그 누구보다, 우주와 천상계의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슬기로우시며, 따라서 그분의 뜻은 항상 우리보다 높고, 앞서며, 언제나 절대로 옳습니다!    

그래서 더더욱..신자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생각들이 가득 담긴 성경책을 자주 대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의 실저자이신 성령님의 생각들-성경 자체 풀이와 그분의 영감을 통해 깨닫는 영적인 뜻-을 열심히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크게 의아스러워지는 한 가지는, 현대 교회의 모습이 초기교회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초기교회에 분명 있었는데 지금 현대교회에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반대로, 초기교회에 없던 것들이 현대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독자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성경과 현대교회를 서로 비교해 보면, 금방 알게 되지요.

대형교회 목회자 등 일부 인사들은 일부 현대 교회들의 교인수가 많은 것을 초기 예루샬렘교회와 "같다"거나 되레 더 "나은" 모습이라고 자족할지도 모릅니다마는, 초기교회가 현대교회와 크게 달랐던 대표적인 한 가지는 초자연적 특성이 넘쳤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시면서 영적인 권능으로 교회를 충만케 하셨기 때문이죠. 

이것이, 당신께서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중요한 패턴입니다. '패턴'(pattern)이라는 말을 굳이 쓰는 이유는 성령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영이신 그분은 변개하거나 변질되시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같으신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한 그분은 성자님을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에 늘 한결같죠. 

이래서 그분의 패턴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그분의 패턴은 그분이 기자들을 통해 쓰신 책 곧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거듭난 사람이 성경을 성경 자체의 풀이와 그분의 영감으로 읽으면, 그분의 패턴을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교인들 다수가 성령님을 과거와 현재가 다르신, 그런 변화무쌍한 분으로 착각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학문을 한다는 신학계가 그러합니다. 신학은 유용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반대로 도움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신학이론들도 많습니다.

예컨대 성경신학이 없었다면, 오늘날 다양한 나라와 다양한 언어의 성경 번역판들이 있기가 힘듭니다. 
반면, 신학은 성령님의 패턴에 역행하는 그릇된 해석과 풀이를 자주 합니다. 신학은 교회의 시녀여야지 주모 노릇 하려고 해선 결코 안됩니다! 신학은 성령님의 패턴에 녹아들어야지, 무시하여 물과 기름처럼 엇돌고, 맞서거나 초월하려 해선 안됩니다.


지난 약 이십 세기 동안의 '교회사'(敎會史)라는 문서기록들과 책들을 훑어보면, 전반적인 전통 제도교회의 흐름이 성경이 보여주는 성령님과 거의 전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주된 까닭이 뭘까요? 행전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 패턴을 이해하지도, 맛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죠. 성경대로 체험하기에 앞서 이성과 철학과 신학으로 나름 풀이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놀랍게도 성령 패턴 아닌 이 교계의 패턴은 지금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전체 교계의 대세라는 흐름을 쥐고 있습니다!    

거의 20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전통적 제도교회의 주류-주된 흐름-는 행전대로의 성령사역과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잘 모르던 로마 카톨맄교가 변개/변질시킨 이후의 '성령론'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을 붙들고 있어 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믿음이 아닌 생각과 이성과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요리하여, 더구나 남들과 후대에 보급하고 전수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의 신앙체험을 믿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성경과 다른 방식으로 성경에는 없는 신비체험을 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중세 개혁가들도 카톨맄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카톨맄과 별 다름 없는 입장인 소위 '종식론'/'중단론'(cessationism)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풀이하면, 초기교회의 모든 초자연적 요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쳤다'는 것입니다. 즉 오순절 강림 때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은 반복되지 않고 훗날 성경 계시가 완성되면서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제멋대로식의 인위적인 주장인지요.

그들은 행전에 나타난 성령님의 패턴과 사역을 기록계시인 성경 문서의 완성으로 마감됐다고 풀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초기 '교부'들을 중심한 천주교 신학사상과 대동소이합니다. 개혁가들은 이 점에서 천주교보다 낫지 못했습니다. 

개혁가들이 천주교를 제대로 개혁하고 그보다 더 나았으려면, 행전을 바로 알고 바로 해석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패턴을 성경 그대로 배우고 익혔어야 합니다!  
개혁교회는 로마 교회 아닌 초기교회와 대동소이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들 특히 소위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예루샬렘이나 동시대의 초기교회와는 달리, 천주교와 더 비슷합니다. 
그들은 천주교회와 다름없이, (초기교회 같은) 권능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천주교회나 다름없이 종식중단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권능의 성령님은 관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천주교계를 보면, 전반적으로 초기교회와 같은 참된 이적과 권능 대신, 소위 '스티그마타'(성흔)나, 마리아상의 피눈물, 신비주의적인 마리아 발현 등 성경과는 다른 괴이한 '이적'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신비주의, 신비주의 하지만 진짜 신비주의란 성경대로의 이적을 구하지 않고 성경 밖 이적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패턴 밖의 패턴을 구하면,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초/중세처럼 오늘날도 성경에는 없는 기도 방식인 관상기도 따위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발상이 곧 신비가들의 신비주의입니다. 

그런데도 흔히 수많은 교인들이, 영언(방언)이나 은사 등 성경에 명시된 초자연적 요소를 구하면 '신비주의'라고 잘못 말합니다. 성.경.대.로.의. 초자연을 구하고 영언으로 기도하면 '신비주의'이고, 성경 밖의 기도방식인 관상기도는 '괜찮다'니, 실로 도치현상이요, 주객전도이죠. 

성령님은 예나 지금이나 그분의 패턴대로 일하십니다. 초기교회에 권능을 부어주시면서 모든 신자들에게 영언을 하게 하신 그분은, 지금도 역시/여전히 모든 신자가 초기교인들처럼 영언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지금도 초기교회처럼 모든 신자가 은사를 받아 활용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성령님의 패턴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성령님의 패턴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역행하는 것이지요. 성령님이 초기와 달리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나님이신 줄로 오인하는 소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뉘우치고 초기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성령님의 패턴대로의 권능과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네 패턴대로 나아갈 뿐이지요. 신학으로 재해석된 패턴은 인위적 패턴이지, 신본적 패턴일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언이 '사라졌다'는 주장은 제도교회적 또는 신학적 패턴이지 성령님의 패턴은 아닙니다. 초기교회의 초자연적 은사와 권능이 오늘날 종식/중단됐다는 주장은 인위적 패턴이지 신본적 패턴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이죠.

첫 교회인 예루샬렘 교회와 기타 초기교회들의 영언이나 은사가 서로 "달랐다"고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사역방식 상의 변질을 주장하는 것도 성령님의 패턴대로의 생각이 아닙니다. '달랐다'는 주장은 신학적 사고와 이론에 근거한 '나름 해석'의 결과이지, 성경의 텍스트 및 컨텍스트와 성령님의 영감대로의 해석에서 온 발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성령님은 수시로 변하시는 분이시라는 논리가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과거와 현대의 교회를 차별하시는 분이 되어버립니다. 

이 다이내밐스 관계를 독자는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사역을 성경대로-행전처럼(!), 초기교회처럼(!) 체험하는 길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분의 패턴을 알고 익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베레아 교우들처럼 열심히 행전을 읽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묵상/상고해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 패턴대로 알고 따를 길이 없습니다. 구원만 받고, 부분적으로 언저리 교인 생활을 할 뿐입니다. 물론 "아고! 구원이고 천국이면 됐지, 뭘 더 바라?"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런데 과연 기독교가 구원과 천국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죠. 갓난아기의 탄생은 삶의 시작이듯, 거듭남 역시 믿음생활의 시초일 뿐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믿음의 선행도 있고, 크리스토님의 분량에 이르는 점진적인 성장/장성도 있고, 성화(聖化)도 있고, 나중 상급도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은 믿을 때의 구원과 최종적 구원을 둘 다 말합니다.  

역동적인 크리스천이려면 나의 패턴, 신학의 패턴이 아니라 성령님의 패턴을 따라야 합니다. 
인위적 방식이 아닌 신본적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열심히 읽되, 성경 자체의 풀이와, 거듭나서 받은 성령님이 비춰주시는 영감으로 풀이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바람직한 신자답게(참고: 맑 16:17a) 영언을 열심히 하면서요.  


티엘티 독자 모두가 성령님의 패턴에 따르는 충실한 성령님 따르미들이 되기를~. 
주 예수님의 전능한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