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서, 성령님?
-구약/신약이 '혼동'된 가사
지난 주일(2019년 6월 9일)은 대다수 교회가 '성령강림주일'로 지킨 날이었다. 그 날, 여러 교회서 예컨대 이런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물론 유튜브 동영상 등에 늘 올라있는 노래들이기도 하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 위해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이 곡은 성령과 부흥에 관한 대표적인 노래의 하나로, 크고 작은 교회의 찬양팀은 물론, 회중과 성가대까지 자주 불러온 노래다. 그런데 비단 이 노래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노래의 가사들 다수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퍽 잘못돼 있다는 생각이다. "뭐라고? 그럴 리가..?" 하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상으로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지 가사 일부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독자는 위 글귀의 잘못된 점을 포착하겠는가? 지금 교회나 회중이 진리의 성령님께, 땅에 오시라고, 땅을 흔들며 임하시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인가? 독자여, 진리의 성령께선 이미 이천년 전 땅에 오셨다! 교회에 오셨다! 과거 구약시대의 엘리야 때 같은 땅이나 바위가 아니라, 예루샬렘의 성도들 무리가 모인 곳을 진동시키며 오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대로 확인하길 바란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시는 성령님께 번거롭게(?) 다시 하늘에서 이 땅을 흔들며 임하시라는 말인가? 땅에 계시러 오신 분이 언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던가. 3번 반복된 '이 땅'은 무슨 땅인가..대한민국? 2천년전 유대의 예루샬렘에 내려오신 성령님을 대한민국에 다시 내려오시라고 초청한다는 뜻인가? 이미 오셨는데? 오셔서 여기 계시는데도? 하늘에 올리는 재 주문(再注文)인가?
물론 성령님은 보좌 앞 일곱 영으로도 늘 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 편재(=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거창한 강림사건을 하늘-땅에 재탕하신다는 말인가?
그 다음을 보자. 문제가 더 크다.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지금 성령께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라고?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시라고? 주 영광 위해 타오르라고? 마음이 착잡하다. 왜 이리 답답할까. '하늘을 가르고'라는 표현은 슈무엘B(삼하)서 22'10이나 시편 18'9, 예샤야후 64'1 등에 있는 시적 표현인데, 어디까지나 구약적이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때고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으나, 구약 말고 신약 때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내주로써 완성됐다. 이제는 하늘과 땅에 대한 그 분의 심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순절에 이미 임하신 성령님께 다시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라니, 뭘 더 추구하는 것일까? 엘리야가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카르멜(갈멜) 산 돌 제단에 불덩이가 떨어졌듯, 성령께 지금 또 그런 거룩한 하늘 '생쇼'를 한 번 더 보여주셔야 뭔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래야만 비로소 그 분의 존재나 임재를 믿겠다는 말일까?
거기에다 불꽃이나 하늘의 불꽃 등은 거의 다 심판의 상징이다(예샤야후 5'17,24; 10'17). 아마도 작사자나 독자는 2천년전 오순절 그날, 불이 혀 같이 갈라지는 모습을 연상할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그날 다락방에 모였던 무리에게만 보여 주신 것으로, 불 침례(세례)와 성령침례의 표징인 영언(방언)을 동시에 상징하신 모습이다.
성령께선 우리가 원한다고 아무 때고 불꽃으로, 불의 혀로 임하시는 게 아니다. 그 분의 이런 나타나심은 과거의 계시적인 상징들이었다. 오순절날 예루샬렘 다락방에 내려오셨음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그 분의 강림이었다.
돌아보면, 구약 때도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사역하시곤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사역적 기름부음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신약 때 영원히 오시어 교회 위에 계시고 신자 속에 내주(內住)하시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적 임재였다. 바꿔 말하면, 구약 때는 한 번도 사람들 속에 내주하신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도는 거룩하신 분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알기까지 하는 상태다(요한A서 2'20).
다시 말하건대, 2000년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 분의 완성된 영구적인 강림이었다. 바로 그 사건으로 교회를 이루셨다! 그리고는 계속 참 교회와 신자 속에 내주하시면서 대대로 감동과 감화와 권능을 줘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성령께 내려오시라, 불꽃으로 임하시라, 하늘을 가르고 오셔라 다시 주문하고 있으니, 이 어찌 엇갈리고 헛갈린 요구와 호소가 아니리요?
신약 기자들이 그랬듯, 시편이나 기타 성경 권서들의 시적 문구를 인용하거나 원용할 순 있다. 그러나 율법시대가 아닌 복음과 신약 사상 원칙이어야 한다. 그림자에 불과한 구약시대의 정신을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순 없는 문제다. 위에서 말했지만, 예컨대 구약 신앙 선진들에겐 성령께서 내주하신 적이 없다. 감화나 사역적 임재는 있었어도. 성령의 내주는 오직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약인들에게만 벌어진 일이다.
신약시대, 성령시대, 교회시대, 복음시대 은혜시대는 이미 2천년전 시작됐으므로, 이 사실을 믿는 신자는 성부, 성자님의 영이신 성령을 개인이 자기 속에 모셔들이면 되는 것이고, 마르코스복음서(맑) 16'17의 주님 예언대로 오순절날 성도와 교회가 시작한 영적인(신령한) 새 언어를 행전 2, 8, 10, 11, 19장에서처럼 우리도 시작하면 되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더욱 발전시켜 가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하늘나라 건설을 계속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위에서, 하늘에서 마치 새로운(?) 성령님이 다시 오시길 구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성령님도 재림하시는가?
물론 저 노래 작사자는 성령 강림사의 이런 깊은 내력을 미처 모르고 쓴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애당초 성경을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신학적으로 자문을 하든가 확인한 후에 확신 가운데 썼어야 옳다. 실은, 신학자들도 자주 헷갈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 여기서 늘 하는 얘기지만, 우리네 찬송가 뿐 아니라 성가나 경배찬양의 가사와 곡도 검증돼야 마땅하다. 그런 검증이 지금껏 거의 부재해 왔다고 보면 맞다. 듣기 좋다, 부르기 좋다, 은혜롭다로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해선 안 된다. 얼마나 성경적이냐, 얼마나 신학적이냐, 얼마나 논리적이냐 등이 관건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면 걸러내야 옳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 찬송가가 부단히 개혁돼 왔겠는가?! 수많은 찬송가들의 삽입/탈락/재삽입/재탈락 등이 돼 오지 않았나?
교회 노래는 바로 짓고, 바로 골라 바로 불러야 한다. 교회에서 찬양팀에 의해 불린다고 해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눈물을 글썽이도록 뜨거운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분별과 검증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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