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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코로나와 이 찬송가

19세기 황열병 환자들의 병상

 

코로나와 이 찬송가

김삼 (목사/저널리스트/문예비평가/작곡가) 

세기의 역병 코로나(COVID)19로 사람들이 나날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는 요즈음. 나는 우리 한국교회도 애창해온 유명한 미국 찬송 작가의 한 분인 롸벑 로우리(Robert Wadsworth Lowry, 1826~1899)와 그의 명작, '우리 그 강가에 모이리(Shall we gather at the river)'가 생각났다. 이에 관해 일찍이 2008125일에 '한국교회는 왜 이 찬송가를 버렸을까?'란 제목으로 썼던 글을 순서만 좀 바꿔 다시 쓴다.

우선 이 찬송가의 합창 버전인 최신 녹음 한 가지를 유튜브로 들어 보자.

https://youtu.be/z3nMha3C0h8(셀러브레이션 콰이어 연주)

 

다음은 해당 찬송가의 원 가사를 필자가 조(=음절수)에 맞춰 한글로 옮겨본 것이다.

 

우리 그 강가에 모이리

(가사: 김삼 재번역)

1. 수정 같이 맑은 강물 보좌 곁에 흐르네

천사 오고 가는 그 곳 우리 함께 모이리

 

<후렴> 주님 보좌 곁에 있는 그 아름다운 생명 강가에

성도들과 다 함께 모여 나 영원히 살리라

 

2. 은빛 물결 찰랑이는 생명 강물 가에서

순금 길로 거닐면서 주를 경배하리라

 

3. 빛난 그 강 이르기 전 모든 짐을 벗고서

흰옷 입고 금관 쓰고 주님 은총 기리리

 

4. 주님 빛난 얼굴 비쳐 미소 짓는 생명 강

죽음 이긴 모든 성도 은혜 찬송 부르리

 

5. 우리 순례 길 다 간 후 은빛 강물 가에서

맘에 기쁨 가득 넘쳐 평화 노래 부르리

 

이 찬송가를 떠올린 이유가 뭐냐고? 작가가 이 찬송가를 쓸 당시 그가 살던 뉴욝 시에는 황열병(yellow fever)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황열병은 코로나19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황열병에 걸린 사람은 입과 코로 피를 쏟다가 결국 검붉은 마른 핏덩이를 토하고 죽어갔다. 당시로서는 이렇다 할 치료법이나 예방책이 없었다.

뉴욕의 경우, 세균 테러의 일환으로 황열병이 침투했다. 뉴욕타임스(NYT)의 역사적 기사를 보면, 남북전쟁 후반기인 당시 남군 지지파였던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 핼리팩스의 룩 블랙번 (의학)박사가 북군 상대로 테러를 할 목적으로 황열병이 대거 유행하던 버뮤다에 상륙했다. 그는 겉으로는 치료를 해 주는 척 하면서 몰래 세균이 득실거리는 환자들의 소지품을 세 트럭분이나 수거해 캐나다로 운송해, 최종 목적지인 뉴욝으로 스며들게 했다. 어질 인(仁) 자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아니라, 살인광이었던 셈이다. 블랙번의 테러 음모는 북군의 첩보원 '헤이워드'에 의해 당시 주 버뮤다 미국영사 앨런에게 보고돼 탄로가 났다. 그러나 이 병은 사람이 아닌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이 1901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서 이 찬송가가 태어났던 것이다.

 

작가의 배경 스토리

이 찬송가는 지금 대다수 교회에서 성가대 합창으로밖엔 잘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정성들여 부르노라면, 매우 파워풀하게 느껴진다. 이 찬송가의 큰 매력과 힘은 작가가 가사와 곡을 동시에 썼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빛난다. 게다가 실감나게도 작가는 지금 같은 7월에 이 창작품을 써냈다.

작가 로우리 목사는 1826년 3월12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다방면에 천재적 면모를 보인 그는 어릴 때부터 손에 들어오는 악기마다 즐기는 등 뛰어난 음악 재질을 나타냈다. 17세인 1843년 4월 23일엔 필라델피아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 조지 아이드 박사에게 침례를 받아 교인이 됐고, 이내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당시 루이스버그대학교(현 버크넬 대)의 이사였던 아이드 목사의 권고로 그 대학교에 입학(1848년), 졸업(1854년)했는데, 최고 성적을 올려,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후 펜실베니아 웨스트체스터(1854~1858)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1861년 침례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그는 뉴욕시 블루밍데일침례교회(1859~1861), 브루클린 핸슨플레이스 침례교회(1861~1869), 펜실베니아 루이스버그 제일침례교회(1869~1875), 뉴저지 플레인필드 파크애브뉴침례교회 등 45년간 펜실베니아/뉴욕/뉴저지의 다섯 교회에서 목회 했다. 1869년부터 한동안은 목회와 겸하여 모교의 순수문학 교수, 챈슬러 등을 지냈다. 이 모든 분야에서 매우 성공적이었고 탁월한 행정가, 유머가 풍부한 뛰어난 설교가, 철저한 성경학도였다.

로우리는 약 500편의 음악, 복음찬송가를 작시/작곡, 또는 딴 찬송가 작가의 시에다 작곡을 했다. 우리네 찬송가에도 '주 음성 외에는', '무덤에 머물러' 등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실려있다. 빼놓으려야 빼어놓을 수 없는 수작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찬송가를 일찌감치 내버렸다. 일찍이 한국 여자 어린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흥얼거릴 정도로 유명한 가락이어서, 찬송가로서의 가치가 못(?) 느껴졌나 보다. 성탄절/부활절용 음악 작품을 쓰기도 했다. 비글로 출판사의 음악 편집인으로도 있었다. 2004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모두 최소 300만 회 이상 출판/발행됐다. 

1875년엔 모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았고 1880년부터 4년간은 안식년 기간을 얻어 유럽을 방문한다. 1880~1886년 뉴저지 침례교 주일학교 연합회 회장을 지내면서 1880년 런던의 영국 주일학교 100주년 기념행사인 '로벗 레익스 백주년'에 참가했다. [레익스는 1780년 글라우스터에서 최초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침례교 역사를 보면 로우리는 주일학교 사역에도 은사와 소명이 커서 그가 가는 곳마다 주일학교가 흥왕했다.

백 주년 행사장인 올드베일리에서 유럽/아시아/미국 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일학교 사역자들을 만났다. 그는 혼자 따로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그의 참석 소문을 들은 대회장이 청중에게 알렸다. " '우리 그 강가에 다시 모일까?'의 작가 로우리 박사님이 여기 참석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분을 단상으로 환영합니다!" 로우리가 강단으로 다가가자, 청중들은 일제히 우레 같은 박수를 퍼부었고, 여성들은 손수건을 흔들어 경의를 표했다. 이 찬송가 때문에 그는 일약 세계적인 명사가 된 것이다. 로우리는 그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건 이 찬송가에 대한 찬사였다. 그러나 갈채가 끝나자, 결국 나는 이 세상에 약간이나마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이 부르실 때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만족감이 생겼다." 1885년엔 더 안식이 필요해 플레인필드 교회 목회를 사임하고 남/서부/멕시코 등지를 방문한 뒤 건강이 회복돼, 다시 뉴저지 목회를 시작했다.

음악은 그에게 '본업'이기보다 늘 레크레이션이나 취미같은 대상이었다. 로우리는 고백한다: "음악은 내게 부차적인 이슈다..찬송가 한 곡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기대하는 청중을 위한 복음설교 한 편을 더 하고 싶다. 설교자로 늘 자임해왔기에 작곡가로 더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평가절하되는 느낌이었다."

그즈음 위대한 찬송가 작가 윌리엄 브랟버리(Wm. Bradbury)가 죽자, 브랟버리의 출판업자 비글로우/메인 두 사람이 주일학교 노래집인 '빛난 보석들' 편집인으로 로우리를 선정했는데, 대 히트를 쳤다. 결국 또 다른 찬송가의 대가인 윌리엄 도운(Doane)과 힘을 합해 '순금'을 발행했는데, 100만권 이상 팔렸다. 도운과는 모두 20여권을 출판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던 로우리는 1899년 11월 23일, 뉴저지 플레인필드에서 73세의 삶을 마쳤다. 현재 플레인필드의 힐사이드 공동묘지에 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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