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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유진 피터슨의 끈끈한 인기는 왜?

 

유진 피터슨의 끈끈한 인기는 왜?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비평문의 바탕은 주로 뉴욝타임즈/NYT 기사입니다.]

"인격적 관계 속에 있는 목회자는 사람들을 기분 좋다고 느끼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등등 뭐든 느끼게 해 주는 방법만 추구하진 않는다."

'느끼게' 해 주는 방법만을 추구하지 않는, 그런 대표적인 목회자가 피터슨 자신이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자임할 자신이 있었기에 그랬나요? 그렇다면 그의 대표작인 그의 나름 성경, 더 메시지(The Message)'는 어찌해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 수준인가요? 현대인들에게 호소하는 최초로 성경을 만들려고 온갖 속어까지 써 가며 가장 '느끼게' 해 주는 방법을 추구하여 번역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세계를 맛봬 주려고 한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피터슨은 진정 인격적 관계 속에 있는 목회자가 아닌 건 아닌지요.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왕국이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돼야 한다. 정의와 관계돼야 한다. 온정과 관계돼야 하며, 당신은 그것을 도매급으로는 못한다.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생명과 삶, 구원과 정의와 온정을 도매급이 아닌 소매급 차원으로 충실히 해 왔다는 말일까요? 그만큼 자신이 인격적 사역에 충실해 왔음(?)을 자랑삼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저자는 왜 말년에 갑자기 동성혼은 지지했던 것이며, 금방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인지요? 동성애자라는 개인 인격을 중심으로 했다가, 이내 다시 대중을 의식해서가 아니던가요? 그건 도매급이 아닌지요?

아무튼, 그 무엇보다 그가 도매급 차원으로 해낸 것은 크리스천에겐 곧 생명을 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현대화하여 해석하고, 편집하고, 짜깁기한 더 메시지가 아닌가요? 그렇게 해서 최소 1500만 권이나 뿌린 게 아닌가요?
그건 비진리가 포함된 하나님 말씀의 도매화가 아니던가요? 

그는 자신의 소형교회 사역이 굉장히 보람차고, 또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이 점을 그의 2011년 책 '목회자(The Pastor)'에서 회상하지 않았나 싶군요. 그럼 계속 그렇게 소매화로 나가지, 거대독자층을 염두에 둔(?) 자기 나름의 메시지인 '더 메시지'는 왜 펴낸 겁니까? (더 메시지와 특히 그의 '주기도' 번역에 문제점은 본 블로그 글에서 지적됨.) 솔직히 말해서... 뭔가 획기적인 것으로 주목을 끌고 결과적으로 돈도 벌기 위해서..?? 우리는 생시에 그의 속을 몰랐댔고, 지금도 아직은 미처 모릅니다. NO, NEVER! 하나님만 아실 뿐입니다.  


피터슨은 덧붙입니다. "미국 문화는 아마도 우리가 여태 가져본 가장 덜 기독교적인 문화일 터이다. 너무나 물질주의적이고 거짓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전체 (교계) 광고업계는 단지 거짓으로 얽히고 설켰으며, 우리가 지닌 최악의 본능에 호소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소비자로 취급받아왔기에 다른 살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가요? 물론 그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매급을 싫어한다는 그는 미국 문화 전체를 도매급으로 보고 있다는 자신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쉽게 말해서, 미국 문화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으며, 기독교적인 요소와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공존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몇 천 만권을 팔아서 큰 이득을 남겼을 그의 책들은 도매급의 결과는 아닌가요?  

아무튼 그렇다면, 피터슨이 가장 기독교적이라고 보거나, 또는 그래도 꽤 기독교적, 또는 미국보다 더 기독교적이라고 보는 문화는 어느 나라 것일까요? 영국? 독일? 러시아? 아니면, 한국 문화일까요? 이렇게 묻는 이유는 그가 도매급으로 미국 문화를 때려 몰기 때문입니다. 

아 물론, 그의 주장은 아마도 상당량 맞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도매급의 두루뭉술한 정의와 규정은 현재 어느 나라에도 갖다붙일 수가 있을 겁니다.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어떨까요? 제가 맨날 보고 듣는 그곳의 뉴스는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타락한 물질주의적 세계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소비자로 취급받아왔기에 다른 살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슨은 이 '다른 살 길'을 알고서, 제시해 주고 간 것일까요? 그게 바로 '더 메시지'일까요? '더 메시지' 독자들은 정말 그렇게 느끼나요? 그 현대화한 문장에 혹시 또 다른 소비자로 취급된 느낌은 들지 않나요? 몇 천만 권이나 팔아준 '더 메시지'의 구매자와 애독자들은 자신들이 소비자임을 모르거나 소비자일 수 없다고 믿는 것일까요?  

목회 생활

피터슨은 1963년,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시 북동부 근교에 있는 벨 에어(Bel Air)에 자신이 세운 '크리스토우리왕장로교회(COKPC)'에서 반평생 목회를 해 왔습니다. 당시 벨 에어의 인구는 8000명 정도였답니다. 미국장로교(PCUSA)에 속한 피터슨이 개척 당시 자신이 직접 가가호호를 방문해 초청한 동네사람들을 포함한 46명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전엔 목회에 전혀 취미가 없었던 그는 40여명이나 나타나자, '와우, 교회는 강의실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계시처럼" 갖게 됐다네요. 10년 후 교인수 500명이 됐고, 주일 출석수는 25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피터슨은 자기 교회에 관해, '목회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비공식적인 회중'이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교인들은 나보다 나이가 위여서, 나를 (성/姓 아닌) 이름으로 부르곤 했어도 나는 좋았다". 

So what(그래서 어떻다는 건가요)? 목회자를 이름(first name)으로 그렇게 불러대면 자동으로 '비공식 회중'이 되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 그런 교회는 흔하며, 필자가 다니던 미국인 교회도 그런, 아니 그 이상의 분위기였습니다. 피터슨 자신은 퍼스트네임으로도 불리던 자기는 그만큼 '인격적인 목회자'였다고 자랑하는 건가요? 저런 언질은 사뭇 은근히 목회자중심적, 자기중심적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술생활과 '더 메시지'

피터슨은 1980년대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 주제를 갖고 첫 주석들을 써냈는데, '말들과 함께 달려라--최고 삶의 탐구'를 썼고, 그후 목회적 주제로 옮겨 가면서 '이슬 같은 여러분의 젊음: 십대와 함께 성장해 가기(1994)', '벽 뛰어넘기: 크리스천의 매일을 위한 땅의 영성'(1996) 등을 썼습니다. 

언어학자였던 그는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총 3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의 '더 메시지'는 제임스왕역(KJV) 성경에 쓰였던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를 숙어적 영어로 병기하여 옮긴 번역이랍니다. 그는 시적인 표현, 현대 문학적 구조, 심지어 속어적 표현도 썼습니다. 

'더 메시지'의 편집 동기에 관해 그는 주장하길, 시대가 흐르면서 의미가 모호해지고 딴 역자들에 의해 "변경된" 성경 본문의 뜻을 밝히면서 미국 독자들에게 근접할 만한 현대적이고 신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네요. 이건 그가 경계한 도매급이 아닌가요?? 그래서 그런 획기적인 결과가 이 황당한 '더 메시지'였다는 말인가요? 또한 일시적인 동성애 지지였다는 건가요?? 이거 정말, 거의 어불성설에 가까운 역설입니다. 정작 자기 자신의 영적 수준을 몰라서였든지, 아니면 자기환각 속에 빠져 있었던 건지?

유수한 단체인 소위 복음주의기독교출판협회(ECPA)는 지난 2003년 '더 메시지'에 대해 '황금메달상'을 수여했다고 합니다(ㅎ). 세상에서 상 받는 사람들은 과연 천국에서도 받을 상급이 있을지 조심스러워 해야 합니다.
'더 메시지'의 독자들 다수는 피터슨과 출판사인 (관상영성 도서 출판으로 악명 높은) '네비게이토'의 전문 출판사인 냅프레스 출판 그뤂 출판사임)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이 자신들에게 "영적 카타르시스를 주었다"고 추켜올렸다는 군요. 영적 카타르시스? 

그러나 많은 성경학자들과 평자들이 피터슨을 종교다원주의자, 뉴에이저(New Ager)로 봅니다. 그들 일부는 피터슨의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속어 사용, 지나친 평상 구어체의 말투, 별난 의역, 다채롭고 만화스러운 표현들 등이 성경 본문의 의미를 매우 탈색시키고 왜곡시켰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그 평가들이 다 일리 있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피터슨의 시 23 편 

다음은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시 23편입니다. 

God, my shepherd!
I don’t need a thing.
You have bedded me down in lush meadows,
you find me quiet pools to drink from.

나의 목자 하나님!
난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은 호사스런 초장을 침대 삼아 날 재워주시고,  
조용한 물웅덩이(또는 강물)를 찾아 마시게 하십니다. 

나는 다뷔드의 위대한 시를 갖고 장난(?)치다시피 한 이 부분이 다분히 위선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낍니다. 

피터슨은 말하곤 합니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엔 모호성이 없다. 그냥 옳거나 그르거나이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모호성 없는 진리의 원어를 갖고 그가 장난(?)을 친 모호한 결과가 '더 메시지'이냐는 겁니다. 

이런데도.. 그의 책을 찬하하며 추천해 주려고 어쩔 줄 모르던 이름난 목회자들, 특히 한국 목회자들이 퍽 많았다는 점은, 그들의 영적 수준 역시 간파하게 만듭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지도자를 좋다고 따르는 교계와 크리스천들입니다. 저런 저자들의 책을 열심히 번역하고 출판해 열 나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팔아 먹는 서점들이기도 하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어 본 블로그에서도 다년간 그의 이름이 거의 매일 최고 검색 순위를 차지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앞으로도 수시로 피터슨의 입장에 비평을 가하려고 합니다. 


오순절적 배경에서 진보 장로교로

피터슨은 원래 오순절적 배경이 강했습니다.  유진 호일랜드 피터슨은 1932년 11월 6일 워싱턴주 이스트 스탠우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롸벑은 정육점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오순절계인 하나님의성회(AOG) 안수목사였다네요. 그래서 유진 자신과 캐런, 케넽 등 형제 자매들이 모두 오순절 크리스천으로 자라났다고 합니다. 

피터슨은 1953년 플랱헤드 고등학교(FHS)를, 1957년엔 시애틀 퍼시핔 대학교(SPU)를 철학학사로 졸업했습니다. 그는 또 뉴욕성경신대원(BSNY, 훗날의 뉴욕신대원=NYTS)에서 영성신학 학위를 받았고, 좐스 핲킨스 대학교에서 쉠 어족 언어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욝에 돌아와 모교인 BSNY에서 일시 가르치다, 교단의 요청으로 갑자기 벨에어 지역 목회 전선에 돌입했습니다. 

그렇다면 피터슨은 영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계열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하나님의성회는 영적 분별을 중시하는 교단입니다(저는 AOG를 지지하는 입장은 아님. AOG 신학교들도 근래 관상영성을 받아들이는 등 많은 타락 상황에 빠짐). 그런데 그는 위에서 보듯 진보적인 신학교들을 두루 거쳤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변질됐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피터슨은 1958년 재니스 스텁스(현재 생존)와 결혼했고, 유족으로는 3 자녀와 9명의 손주들 등이 있습니다.